1.
나는 정말 몰랐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치루는 세계노동절대회에서, “일본의 망동”에 대해 “남북 노동자가 한 목소리로 철저한 응징을” 하겠다는 외침이 울려퍼질 줄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그리고 북한 조선직업총동맹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 행위를 규탄하는 남북 노동자 공동성명>이 결연한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노동절 행사 마지막 즈음 하이라이트 시간대였다. 그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은 나 뿐이었을까?
“일본은 우리가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경고를 듣고, 과연 일본이 섬뜩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섬뜩했다. “나약한 민족이 아니”라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응징”하겠다고? 전민족이 “한목소리로”?
일본의 침략 전쟁 기도에 대해 반일투쟁을 결연히 벌여나가겠다는 선언에서, 만국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을 주창했던 노동자들과 노동 대표자들이 전쟁이 예기(豫期)되자마자 애국주의 광풍에 몸을 맡겼던 역사를 떠올렸던 것은, 역시 나의 과민반응이었을까?
물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행위는 규탄할 만한 일이다.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적 경향도 우려할 만하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우려스러운 일은, 외세에 대해 전국민 전민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또다른 애국주의의 발상이다.
어째서 그것이 우려스러운 것이냐 하면, 전국민과 전민족은 똘똘 뭉쳐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가 없고 내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국가간 경계와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가로질러, 자본과 노동이라는 심대한 계급 분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른바 국민적·민족적 목소리는 짐짓 이러한 계급 적대를 은폐하고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기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우경화라는 현상 자체가 바로 이에 근거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 신화가 한계에 부딪치고 장기 불황에 접어든 90년대 이래, 갈수록 어려워지는 일본 노동자 민중들의 불만을 달래고 상실되어가는 자부심과 희망을 환상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극우 민족주의 선동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일본뿐인가. 한국 역시 정확히 이러한 상황에 해당한다. 그러니 남을 규탄하기에 앞서, 그를 거울로 삼아 우리를 성찰해야 할 일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에서 나라마다 난무하는 강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수사가 전세계적 자본과 노동의 적대와 대립을 은폐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노동자와 노동 대표들의 임무일 터다.
그러나 노동절대회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노총 위원장의 연대사를 듣다가 잠시 귀를 의심해야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국가경쟁력이 세계 10위 안에 들고 노동자들이 살맛나는 세상이 오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노총 위원장이 국가경쟁력이란 말이 곧 자본의 경쟁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한국의 자본이 잘 되면 노동자들이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내도록 열심히 투쟁(!)하겠다는 취지였을 게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자본이 잘 나가면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많아질 가능성이 그나마 높아진다 하더라도,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노동자 대표가 할 소리인가?
이 말이 성립되려면 또다른 국가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높아지면 노동자들도 잘 될 거라는 생각. (‘강대국 건설’을 외치는 일본 우경화의 대중적 기반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하여 국가의 경쟁력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와 손을 잡고 ‘우리나라’ 자본과 손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 속에서 계급의 분열과 적대는 환상적으로 사라진다.
2.
노동절대회 동안 받은 많은 선전물들 중에서, <2005년 노동절대회 문선을 하지 못하게 된 수도권지역 문화패들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이미 <참세상>에서 보도한 대로, 사회적 교섭 반대와 총파업 투쟁 호소를 형상화하려 했던 문화패들은 노동절대회 전야제를 참가하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런 내용은 올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며 지도부가 밝힌 기조와 지침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화패들은 민주노총 집행부 전속 쇼단이 아니다. 그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이고 기층 조합원들이다. 노동자로서 조합원으로서, 밑으로부터의 목소리를 지도부에 전달할 권리가 있고, 노동자의 대회에 그 생각과 표현을 맘껏 펼쳐보일 권리가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내용을 노래하고 몸짓한다면, 상업적 연예인만도 못한 일. 따라서 문화패들이 지도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그렇잖아도 사회적 교섭 논란으로 분열이 심각한 와중에 그런 문선을 용납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민주노총 문화미디어실장의 인터뷰대로 “조합원들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열이 심각하고 지도부의 지도력이 누수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노동절대회 문화패들의 공연을 봉쇄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번 일은 사회적 교섭을 강행하려는 지도부와 그를 결사저지하려는 측 사이 분열과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 대의원대회 이후 양측은 서로 공공연하게 비난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뜨겁게 흥분한 시점에서 양측의 적대심을 저울질할 수 없어 보였지만, 결정적인 책임은 지도부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지도부는 지도부이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왜 존재하는가? 노동자들의 분열을 막고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더냔 말이다. 자신이 대표해야 할 노동자들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조건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분열과 대립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기조차 했다. 대의원대회에서 발언과 참여를 봉쇄했고 이번 노동절대회에서 문선을 봉쇄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것이 자신의 지도력을 공고히 하는 방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오해다. 지도부의 지도력은 밑으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괄하고 아우르고 집중해나가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봉쇄하는 힘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봉쇄란 적대하고 있는 적에 대해서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서로 적인가? 물론 자본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연대로써 그것을 극복해야 하고 지도부는 바로 그것을 임무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절대회 전야제는 반쪽이 되어 버렸고, 배제된 노동자들은 무대 아래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다.
3.
광화문 거리에 앉아 나는 심각하게 자문했다. 노동자들은 누구와 적대하고 있고 누구와 연대하는 것일까?
내겐 너무 명백했던 답이 흔들리는 순간, 나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2005년 5월 1일, 115주년 세계노동절기념대회,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오는 날. 바로 그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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