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경쟁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상황은 자못 심상치 않다. 연이은 성적비관 자살 소식, '저주받은 89년생'이라는 고1 아이들의 자조와 한탄, 일본 영화 '베틀 로얄'에 비유되는 학교 교실, 결국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만한 청소년들의 항의집회까지 열린다.
작년 새 입시안이 나왔을 때 교육운동단체들은 ‘입시부담을 가중시키고 본고사 부활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문제점을 경고한 바 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벌어지는 부작용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고실업과 비정규직이 만연하는 상황에서 생사를 건 학벌경쟁은 기성세대가 경험했던 것보다 지금 청소년에게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현실보다 인식은 항상 뒤처지는가 보다.
상황이 이 쯤 되고 나니 여러 군데서 소동이 인다.
우선, 정부. 새 입시안이 입시부담을 덜고 사교육을 줄일 것이라고 자화자찬하던 교육부는 아이들이 죽어나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않더니 집회를 연다고 하니까 그 때서야 비상을 걸고 난리다. 징계 운운하고 경찰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동원한다. 그야말로 정책 무능을 넘어 인권 무시의 ‘수구꼴통 부처’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새 입시안은 좋은 것이라고 박박 우긴다. ‘국민과 학생들이여 오해를 풀라’고 한다. 정말 웃긴다. 한국에서 교육부만큼 교육현실을 잘 모르는 데도 참 드물다.
보수 언론과 일부 대학은 더 가관이다. 이 사태가 내신 강화 때문이니 '본고사'로 해결하자고 한다. 아이들을 입시경쟁으로 아예 절이고 말려서 다 죽여야 속이 시원할 놈들이다. 그렇지만 본고사 부활에 대한 신념과 일관성 만큼은 대단하다.
그리고 교육운동을 포함한 우리 진보 세력. 청소년들의 고통과 비관자살에 가슴 아파하지만 자신들의 의사를 사회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반긴다. 그러나 상황 파악 못하기는 별반 마찬가지고 무능하기는 더하다. 지금 상황이 구경만 하다가는 덤태기로 꼬일 형국인데 이런 사정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혼란을 틈타 대학별 새 입시요강으로 서울대는 ‘논술형’으로 본고사를 부활한다고 당당하게 밝혔고, 기타 대학들이 내놓는 ‘대학별 논술, 구술 강화’도 실상은 다 본고사이다. 입시경쟁 해소는 커녕 본고사 부활로 흘러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대응력은 거의 꽝이다.
그 동안 한국의 입시는 해방 이후 크게는 13번, 작은 것까지 합치면 35번이나 바뀌어 왔다. 수십 번 바뀌면서 나타난 몇 가지 경향적 법칙이 있다. 첫째, 교육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바꾼다. 정권 교체 때마다 장관 교체 때마다 바꾼다. 둘째, 바꿀수록 문제는 더 꼬인다. 그래서 입시제도 바꿔서 실제로는 덕 본 정권이랑 장관 없다. 셋째, 자주 바꿀수록, 전형을 다양화할수록 사교육이 늘어나고 상류층이 유리하다. 항상 학교를 정상화하고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하지만 결과는 학원만 살찌우고 돈 있고, 정보 있는 상류층은 점점 유리해 진다. 넷째, 그럼에도 아이들과 민중은 거의 매번 속아 넘어 왔다. 다섯째, ‘대학평준화’라는 해법이 있지만 절대로 안 한다. 대학서열구조가 있는 한 방식을 아무리 바꾸어봐야 사활을 건 입시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인데 요 것 만은 건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동안 입시제도에 관한 한 ‘대학평준화’만 빼고 인간의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다 동원해 봤다. 예전에 했던 것 다시 써 먹기도 하고 이것저것 붙이기도 해봤다. 2008년 입시안은 내신, 수능, 대학별고사를 모순적으로 다 갖다 붙인 ‘악마적 결합의 결정판’이다.
입시 문제와 관련하여 상기해야 할,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있다. 지난 80년대 이후 ‘입시교육철폐와 참교육실현’을 주장해 온 교원노조운동과 학부모운동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는데 보시다시피 입시지옥의 현실은 거꾸로 더해 왔다. 아무리 황당한 주장도 그 정도 줄기차게 외쳤으면 현실을 조금은 바꿀 법한데 모든 국민이 동의할 만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거꾸로 돌아가는 참으로 이상한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가?
돌이켜보면 우습지만 교육운동은 20년 동안 ‘입시교육철폐’까지만 외치고 원인인 ‘대학서열구조’는 건드리지 않는 모순된 실천을 해왔다. ‘대학평준화’라는 해법을 절대 건드리지 않기는 기득권 세력과 똑같았다. 마치 ‘인간다운 삶’까지만 말하고 ‘비정규직철폐’는 절대로 말 안하는 것과 비슷한 우스운 짓을 해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비밀은 패배주의요 타협주의다. 혹시나 입시교육철폐 주장의 ‘현실성’을 떨어뜨릴까봐 좀 어려워 보이는 ‘대학서열철폐, 대학평준화’는 감히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하는 대학평준화가 한국에서는 안 될 거라는 지독한 패배주의와 지배세력의 강한 의지를 알아서 접수해주는 냉철한(?) 타협주의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교육운동은 지난 20년 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지당하기만 한 주장'을 하염없이 읊어 왔고 결국 입시교육에 관한 한 아무런 현실 변화도 추동해 오지 못했다. 현실성 때문에 알아서 기고 타협했는데 그 때문에 현실성과는 점점 더 멀어져 온 교육운동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지독한 패배주의와 모순된 실천양식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 실천의 허망한 결과와 논리적 모순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있었다. 그 덕분에 아직 충분치 않지만 빠른 속도로 극복되기 시작했다. 정책적으로는 2003년 범국민교육연대의 ‘공교육개편안’을 거쳐 민주노동당의 ‘국공립대통합네트워크’로 구체화되어 갔고 2004년 4.15 총선 때의 '서울대 폐지'를 불러 일으켰으며 9-10월 입시투쟁에서 시민사회단체의 입시개편방안으로 제출되기도 하였다.
이제 아이들의 반란을 통해 입시문제는 새로운 차원에서 전사회적 사안이자 논란이 되었다. 여기에서 '대학서열구조를 온존한 입시개선방안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20년 교육운동의 우를 더 이상 반복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까지 더 이상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서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이 시기, 기존의 시스템으로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해 진 이 시기는 대학평준화라는 해법을 제대로 힘있게 내밀만한 충분한 상황이다. 대학평준화 요구의 사회적 동의를 확대하고 정책적 현실성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공세로 상황은 녹록치 않으며 솔직히 말하면 지금 현재로 라면 본고사가 부활되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고 보여 진다. 보수정당과 제도언론, 대학 등 온갖 세력과 기관의 본고사부활 시도가 가시적으로 노골화되고 있으며 교육부는 겉으로는 ‘3불’을 고수하는 척 하지만 내심은 본고사 부활의 연착륙이다. 그 같은 의도는 이미 2008년 입시안 자체에서부터 내재되어 있다. 대학별 고사 강화가 그 장치다. 만약 본고사마저 부활될 경우 입시 스트레스가 곱으로 늘어나고 사교육과 불평등이 확대될 것임은 불문가지다. 89년생 이하에게는 ‘겹 저주’가 내리는 셈이 된다. 이제 싹트기 시작한 청소년들의 ‘주체화’도 취업경쟁이 대학을 피폐화시킨 것처럼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들 것이다.
고1 아이들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의 힘만으로는 한계이며 근본적으로는 민중의 요구와 힘일 것이다. 지배세력의 온갖 세력과 기관들이 나서는 상황에서 이제는 민중과 진보진영도 당사자인 학부모로서, 사회단체로서 ‘주체적 목소리’를 내고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 교육문제에 대한 ‘범민중적 개입력 형성’이 필요한 때다. 입시문제를 계기로 민중과 진보진영의 목소리와 힘으로 한국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가는 새로운 도정이 시작된다면 그리하여 본고사 부활 책동을 제압하고 대학평준화 방향에서 교육의 새로운 틀을 짜 나가기 시작한다면 지금의 이 격동은 교육에 대한 민중 주도권이 마련되는 일대 전환의 시기가 될 것 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89년생은 ‘저주’의 주문에서 풀려나 새로운 신화 탄생을 알리는 첫 세대로 기록될 수 있다. 민중의 목소리로 우리 아이들에게 내린 저주를 풀어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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