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를 다시 불러 변혁의 희망을 노래한다

그 옛날 맑스는 “공산주의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21세기 한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맑스, 왜 희망인가”를 화두로 진보진영이 다시 모였다. '과연 희망인가'가 아니라, '왜 희망인가'이다. 맑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인 공산주의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그는 세상을 해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변혁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 시대의 유령도 맑스가 되었고 또 그래야 한다.

20세기 후반 이래 우리들의 삶은 지난 500여년의 역사보다 더 빠르게 바뀌었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더욱 고도로 발전하지만, 비정규직은 확산되고, 소수자들의 권리는 사각 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의 경계는 더욱 강화되어 20 대 80의 사회가 10 대 90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는 가운데 인간을 상품화하는 경향도 더욱 치밀해져 간다. 자본주의의 물신성이 인간성의 소외를 갈수록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과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초국적 자본과 침략전쟁의 본질을 폭로하는 싸움이 있고, 제3세계 민중들의 절규와 불굴의 투쟁들이 있으며, 비정규직들의 목숨을 건 저항들이 있다. 비애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싹들이 돋아나 꿋꿋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과 투쟁의 세상에서 2003년 5월 한국의 진보적 좌파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반대하고 대안적 지구화를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맑스코뮤날레’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맑스코뮤날레는 동구권 붕괴 이후 급속히 잊혀져 온 맑스와 맑스주의 이론의 정신과 방법을 오늘의 시대상황에 되비추어 계승 혁신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구화와 전면 대결하는 강력한 이론적·실천적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이다”(결성취지문 중에서).

‘코뮤날레’는 코뮤니즘과 비엔날레의 합성어이다. 2년마다 치르는 맑스주의자들의 코뮤니즘 축제라는 의미이다. 이제 그 두 번째 축제와 투쟁의 장이 열린다. 맑스의 현재성을 밝혀 그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다.

2003년 제1회 대회의 화두는 “지구화시대 맑스의 현재성”이었다. 많은 노동자와 학생 및 활동가들이 모여 맑스와 사회주의의 의미를 두고 토론하며 맑스와 함께 어울려 놀았다. 맑스코뮤날레를 통해 그들은 정치경제학 비판과 정치학, 철학, 문예ㆍ문화이론, 종교에 대해 논하고, 맑스주의의 확장과 비판 및 현 시기 저항형태들과 이행과 변혁의 전망을 생각했다. 현장에서 무대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을 꿈꾸며 활동하는 많은 문예활동가들도 참여해 맑스를 불러내었다.

이제 맑스의 300여 아들딸들과 동지들이 25개 주관단체를 중심으로 다시 그를 부르고 있다. 올해 5월 28-29일 건국대학교에서 열릴 제2회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에서 우리는 그를 볼 수 있다. “맑스, 왜 희망인가?”를 그에게 확인할 것이다. 기만과 야만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에도 맑스주의가 여전히 희망적 대안임을 밝히고 실천을 재조직할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괴감을 가지고 묻는다, “도대체 대안이 무엇이냐?”고. 1980년대 말 이래 세계는 ‘대안 없는’ 공간과 역사가 되어가는 듯하다. 좌파적 대안은 없고 우파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패배감이다. 그러나 왜 대안이 없는가? 언제나 한 가지를 제외하거나 잊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공산주의가 대안이고 희망이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건 맑스코뮤날레의 동지들은 변혁의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고자 한다. 왜 공산주의가 희망인가? 그것은 5월의 맑스코뮤날레가 답할 것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정병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