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인의 변화와 사회적 역할

2001년 7대 일간지를 장식했던 지식인 논쟁을 떠올려 본다. 근대적 지식인의 역사가 결코 길지는 않지만, 한국사회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도 매우 중요해졌음을 느끼게 해준다. 2001년의 지식인 논쟁도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지식인 관련 논의들이 80년대 중반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80년대 말부터는 괄목상대할 정도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2001년의 마지막 논쟁이 지나고 나서도 다시 4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그 논쟁들이 충분히 발전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새로운 지식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스스로 지식인 범주에 든다는 사실로 인해 한 번 돌아보고 싶은 소박한 마음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근대적 지식인의 형성과 이데올로기적 지식인 구분의 배태

우리 나라의 전통에서 볼 때 학자를 지칭하는 ‘선비’라는 개념을 지식인 개념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선비란 주자학을 신봉하는 학자로서 사(士)의 단계에서 수기(修己)하여 대부(大夫)의 단계에서 치인(治人)하는 학자관료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선비란 사대부와 유사한 개념이다. 반면 근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공론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이러한 의미의 지식인 개념이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것은 일제 식민지 시기이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 통치라는 시대적 상황이 우리 나라의 전통적 지식인 개념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곧, 민족 독립이라는 절대적 과제로 인해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라는 비판적 지성의 맥락을 담지함으로써 적극적인 현실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는 식자층을 지식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지식인이 형성되는 최초의 계기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은 다양하여 지배계급 출신의 반동적 의병단, 온건 민족주의 인텔리겐차, 사회주의 인텔리겐차 등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또한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서 구체제는 붕괴되었고, 외부로부터 강제된 근대사회로의 변화를 겪음으로써, 당시의 지식인도 더 이상 양반지주계급으로터 충원되지 않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은 주로 중간계급에서 충원되었으며 일본지배집단으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저항문화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일제 시기 지식인들의 활동은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은 청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강한 계몽주의나 혁명주의(사회주의,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띠고 나타났다. 그러나 일제의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통치 정책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는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한편, 문화 활동과 예술 활동에 집중하는 경향도 증대해 갔다. 따라서 일제 식민통치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이미 좌우 이데올로기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두 축으로 하는 지식인의 구분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해방정국과 1950년대, 저항적 지식인의 단절과 비판적 지식인의 형성

해방 직후의 상황은 이러한 구분을 더욱 가시화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는 한반도에 대한 세계 초강대국의 이해관계가 현실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 한국 사회구조 변화로 인해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부적합한 정국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국제적 이해관계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의 저항적 지식인들은 미군정과 자유당 정권의 억압과 친일 세력 등용으로 인해 그 맥마저 끊기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이 자주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이념의 제시에 있어서 심한 사상적 갈등을 보임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한반도를 동서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더욱이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문화 전통의 계승과 서구문화에 대한 재해석 및 비판적 수용이 대단히 강조되었음에도, 당시 지식인들은 이를 원만히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문화적 신사대주의를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지식인의 이러한 부정적 경험은 1950년대로 이어져 자유당 독재정권의 아집 속에서 지성의 부재까지 초래되었다. 장준하와 같은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고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정치영역에서 물러나는 경향을 보였다. 6.25의 경험이 이러한 한국의 지성사에 더욱 나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6.25를 거치면서 남북한 각각 완전히 획일적인 사상 풍토와 지식인 사회의 분단을 맞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남한은 휴전 이후 중도적인 사상조차도 극좌로 몰리는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와 같이 1950년대 한국 사회는 미국식 자유주의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주의 이념조차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독재정치 아래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상황은 역으로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의 반독재운동을 촉발시켰으며, 그에 따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분기가 4.19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곧, 일제시대 지식인 개념은 저항적 의미에 한정되었으며, 이 전통마저 미군정 하에서 단절되어 현 지식인 집단의 맥과 연결되지 못했던 반면, 4.19혁명을 전후해서는 보편적이고 근대적인 의미를 띠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지식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개발독재 시기, 지식인의 분화와 무력감

비판적 지식인의 형성을 통해 싹트던 한국 지식인 사회는 5.16쿠데타로 또 한 번 된서리를 맞았다. 5.16군사쿠데타로 성립된 개발독재는 지식인사회의 형성을 또다시 억압하고 지식인의 역할을 정부가 원하는 특정한 방향으로 강제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근대화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함으로써 정당성의 결여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자유당 정권의 권위주의적 억압을 뚫고 분출한 비판적 지식인들과 정부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기능적 지식인들이 양분되어 형성되었다. 기능적 지식인이란 현상유지나 기득권을 옹호하는 사제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서 정체성을 찾는 부류인 반면, 비판적 지식인이란 현상타파나 신체제를 추구하는 예언자적 역할에서 정체성을 갖는 부류를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과 정체성에서 반드시 현실 참여를 전제할 필요는 없다. 상아탑에 안주하여 학문을 위한 학문에 종사하지 않는 한, 현상유지 혹은 현상타파를 위한 이론적 개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재 정권 때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이론적 활동만 하더라도 억압을 받았다는 사실도 적극적 개입과 이론적 개입의 구분이 불필요했던 이유였다.

개발독재 시기에 한국 지식인들은 이와 같이 양분화된 상태에서 민주화운동을 소극적 혹은 적극적으로 전개하거나, 근대화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능적 지식인들은 경제부문 엘리트와 기타 전문지식을 소유한 기술관료로 진출하여 준국가기구인 연구기관이나 국가행정기구의 외곽단체, 경제기획원 등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부서를 비롯한 관료행정기구의 실무진에 광범위하게 포진했다.

그러나 기능적 지식인의 활발한 활동과 비판적 지식인들의 분화 발전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와 획일적 지배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은 많은 지식인들을 무관심과 자아정체감 상실을 유발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정치ㆍ경제적인 소외감을 강하게 나타냈다. 지식인들이 정치나 경제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 정도는 상당히 높게 평가하지만 그러한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에 있어서는 아주 낮게 평가해서 무력감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 정체감을 상실한 무관심의 지식인은 지나치게 먼 과거 혹은 요원한 미래에 대한 탐구를 함으로써 현실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른바 ‘구름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들이 탐구한 지식의 내용을 미화하거나 추상화하고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1980년대 중반의 한 연구는 허위의식을 보지 못하는 지식인, 허위의식을 꿰뚫어 볼 정도로 날카롭기는 하나 이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무비판적 지식인, 비록 비판적으로 폭로하기는 하나 이의 시정을 위해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대부분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비판적 지식인의 형성은 이후 1970년대 재야 반정부운동과 노동운동을 시발로 1980년의 광주항쟁 이후부터는 이른바 ‘혁명의 시기’의 연출로 이어졌다. 이어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지식인 사회는 더욱 분화되었다. 비판적 지식인 그룹 내에서도 좌우의 구분이 뚜렷해지고, 좌파 지식인들도 이념의 경향성에 따라 더욱 세분되어 갔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의 분화 발전과 사회적 역할의 제고

1980년대 ‘혁명의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식인들도 이론적ㆍ실천적 측면에서 현실참여 경향을 높여 갔다. 특히 1987년 민주화를 전후해서는 통일과 사회ㆍ정치발전에 대단히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와 함께 성찰적 지식인과 활동적 지식인의 구분도 생겨났다.

기능적 지식인의 경우는 그 자체로 이미 활동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분화는 비판적 지식인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론적 개입에 대한 억압이 약화되거나 사라지면서 비판적 지식인들의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비판적 지식인들은 개혁이나 민주화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참여를 지양하고 지식활동을 통한 변화를 시도하는 성찰적 지식인과 적극적 행동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적 지식인으로 각기 분화해 나갔다.

이제 지식인 사회의 화두는 정치개혁과 사회발전 및 통일의 문제가 된 것이다. 더욱이 19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과 시민사회 영역에서는 유럽의 신사회운동과 같은 다양한 이슈들이 제기되었고 활발한 연구와 실천들이 조직되었다.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이데올로기적 배제도 차츰 약화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독재와 민주의 구도가 아니라 개혁과 변혁의 구도를 거쳐 자본주의 체제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구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에 따라 그람시적 개념인 ‘유기적 지식인’도 집단적 분류로서 적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판적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적 유기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적 유기적 지식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비단 계급적 구도로만 발전한 것은 아니다. 환경, 여성, 반전 등 탈물질주의(postmaterialism)적 사고에 기반한 신사회운동을 이론적으로 지지하거나 그 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그룹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1990년대 민주화가 공고화되면서 한국의 지식인은 계급적 의미의 보수와 진보라는 구분에 더하여, 물질주의적 지식인과 탈물질주의적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축을 형성해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노자계급모순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유(類)적 모순에 대한 인식을 중시하는 탈물질주의 개념이 한국 사회에도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아래 도표와 같이 4개의 그룹으로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질주의적 좌파는 모든 사회문제를 계급문제로 환원시키는 전통적 좌파의 관점을 가진 지식인들인 반면, 탈물질주의적 좌파는 권위주의와 환경문제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계급모순을 인식하는 지식인들이다. 탈물질주의적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지지하면서도 새로운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 그룹이라면, 물질주의적 우파는 새로운 사회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성장과 축적만을 추구하는 지식인 그룹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좌파 지식인들의 담론이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적 주장으로 나타나는 반면, 우파 지식인들의 담론은 ‘탈계급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파 지식인들은 계급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인하기 때문에 ‘국민’이나 ‘시민’과 같은 ‘탈계급적’ 담론을 펼치기 때문이다.


변혁에 동참하는 해석의 주체, 탈물질주의적 좌파 지식인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의 발전을 절대적으로 주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주요한 역사적 계기들은 지식인들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한다. 진리를 발견하고 전파하며 새로운 미래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사명이다. 따라서 지식인 사회의 모순에 민감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도 진정한 지식인이 못되는 사람들을 단호히 비판하는 자성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다시금 곱새겨야 할 때가 왔다. 이제 그 변혁의 주체는 탈물질주의적 좌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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