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빵과 리프트

장마가 시작 되었다더니 비가 추척추척 내리고 있다.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 나오기는 몹시 힘든 날씨다. 과연 몇 명이나 오려나 하늘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전동휠체어에 비를 맞은 장애인동지들이 반가운 얼굴로, 이런 분위기에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한 명 두명 나타나고 있었다.

오늘은 서울역에서 ‘서울시 46개 지하철역사에 엘리베이터설치 촉구 지하철타기’행사가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 46개의 역사에 장애인용 이동수단으로 리프트를 설치하겠다는 서울시의 발표가 있었다. 이에 장애인의 이동수단으로 느리고, 안전성이 보장 되지 않는 리프트는 안 된다는 우리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 서울역으로 장애인들이 모이고 있었다.

2004년 추석의 연휴를 보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붐볐던 서울역에서는 노들야간학교소속인 중증장애인 이광섭 씨가 전동휠체어와 함께 리프트에서 추락하여 크게 부상을 당한 사고가 있었다. 그래서 서울역은 장애인의 이동에 커다란 걸림돌인 리프트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그대로 증명한 곳이기에 의미있는 곳이다.

나는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떨려오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다. 2004년 추석연휴를 앞두고 우리는 ‘버스를 타자’는 행사를 광화문에서 하고, 서울역에 와서 추석 인파들에게 장애인의 안전한 이동권에 관한 선전전을 진행하였다. 가을 햇살이 한풀 사라져가는 저녁 시간, 우리는 정리집회를 한 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2004년에는 장애인 이동권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법률제정을 간절히 바랬었고, 이광섭 씨와 헤어지면서 ‘장애인 이동권의 얘기는 2004년에 끝내자는 약속을 하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헤어졌다. 그런데 30분도 채 넘지 않아 전화가 왔다. 광섭 씨가 리프트에서 추락하여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리프트에 타려고 올라간 순간, 전동휠체어와 함께 계단 아래로 떨어졌을 광섭 씨를 생각하며 병원으로 달려가는 시간은 그저 두려움뿐이었다. 병원 응급실에 들어가니 역시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었고 입안 가득히 피가 고여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할 말을 잃었고 눈물조차도 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은 “대표님, 다리가 아파요”였다. 온 몸의 상처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조차 모르겠음에도 다리가 편한 자세가 안 되어서 오는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웃으면서 헤어졌었는데.....

검사를 해봐야만 알 수 있다는 의사의 한마디 말과,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가는 광섭 씨를 뒤로하고 나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겨 지하철 마지막 차를 타기위해 전동휠체어를 달려야만 했다.

동대문운동장역, 5호선을 타기 위해서는 기나 긴 리프트를 타야만 한다. 리프트 앞에서 공익근무요원이 나오길 기다리며, 광섭 씨 얼굴이 아른거린다. 리프트가 펼쳐지고 나는 전동의 속도를 최소로 낮춘다. 그리고 까마득한 계단에 시선을 피하고 바퀴 네 개를 좁은 리프트에 올린다. 내 목숨은 나의 왼손 손가락 컨트롤전동조정키에 걸려있을 뿐이다.

안전봉도 없고, 그저 무방비 상태에 공익의 한마디가 무섭다. ‘앞으로 더 가세요’ 몇 센치는 더 가야 뒤의 판이 올라오고 작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몇 센치를 더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내가 광섭 씨가 되어 피투성이로 침대에 누워있는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 때 누구에게 무섭다고 할 수 있고, 안 타겠다고 거절 할 수가 있는가. 집으로 가려면 이 공포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광섭 씨도 이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공포를 극복하려다가 죽음을 넘나들게 된 것이다. 우린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날이 바로 그 날, 밤을 꼬박 지새웠다.

다음 날, 지하철공사장 면담을 했다. 긴 장시간 얘기를 하였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안전하지 않는 이동수단을 설치한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의 한결 같은 대답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개인적인 사과는 할 수가 있단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할 수가 없다는 말만을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리프트는 국제규격이라 기계이상이 확인이 안 되는 상황에서 보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를 않았다. 우리 말은 장애인의 이동수단으로서 리프트가 안전하지 않고 신속하지 않은 상태임이 증명이 되었고, 이것으로 장애인 이동을 위험하게 방치한 것에 책임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국제규격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2002년도에 장애인이동권연대가 발산역 사건에 대하여 서울시장의 사과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 단식농성을 했었다. 그 때 서울시장은 ‘장애인에게 드리는 말씀’을 냈었다. 2004년까지 지하철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현재 이런 저런 이유로 마른 여섯 개 역사에 리프트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공동조사팀을 꾸려서 안전한 이동권이 보장되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를 우린 바라고 있다.

광섭 씨가 사고 난 다음 날 의식이 돌아오고 상처투성이 얼굴로 광섭 씨가 누워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빨리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회복되면 뭐든지 사주겠다고 하자 그는 큰 입으로 웃으며 말했다. “건빵을 사주세요”

그의 한 마디가 나를 눈물나게 하였다. 이 한마디가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해준 말이었고 얼마나 고마운 말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다시 또 다른 광섭 씨가 이런 말을 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진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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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이없는 현실..

    한국 어느 곳에서는 죽음을 방치하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것이다.

    라디오 방송에서 "종아리 예뻐지는 법"을 방송하며 희희덕 거릴때

    트럭에 한 노동자가 깔려죽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매스컴이 조명을 비추지 않는 곳에서는 인권이 있다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일이 벌어지고,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는 스튜디오에서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온통 나라를 시끄럽게 한다.

    그 잘 다듬어진 방송용 외모와 목소리에 인간의 냄새가 배인다면,
    국가와 민족과 이웃을 위해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저 몸담고 있는 그들의 세계에만 맴맴 도면서, 들으나 마나한 잡담을 쏟아내는 그 이중적 모습들.
    (겉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인 그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그야말로 하품이 날 정도로 못나고 이기적이다.)

    이웃에 관심을 갖던 심야프로 한 여자 mc가 운전 중 죽었던 모습을 기억한다.

    사고!였었을텐데도... 꺼림직 하고, 그토록 아쉬운 까닭은.

    참 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그 소중한 목소리가 너무도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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