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 드디어 사이버 공간의 질서회복을 위해 전가의 보도를 빼들었다. 가문에 전승하여 내려오는 명검은 이름하여 게시판 실명제. 사이버폭력이 한계에 달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대갈일성을 외치며 힘차게 칼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웃긴다. 얘들의 특징은 지들이 욕먹은 일을 오래 기억 못하고 시간 날 때마다 똑같이 욕먹을 짓을 반복한다는 거다. 욕먹기 위해 빼든 전가의 보도 게시판 실명제. 이번에도 썩은 무 하나 동강이 내지 못하고 다시 칼집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전례없는 위용을 자랑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뻑하면 게시판 실명제를 운운하는 이들의 감수성은 캄캄한 방에 있으면 바로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애의 그것과 같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두려운거다. 익명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이들을 떨게 만든다. 그러나 어둠에 익숙해지면 사물의 형체가 보이는 법. 다 큰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계속 울어제끼는 것은 손가락질을 받거나 정신감정을 받을 일이지 결코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
사이버폭력이 도를 넘어섰다는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게시판에서 난무하는 욕설과 인신비방이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인 경우도 많다. 심약한 사람이 보면 충격을 받고 쓰러질만한 글들도 많다. 고명하신 고관대작들이 보시기엔 말세가 가까왔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이 익명성 때문이라고 몰아부치면서 사이버공간의 아바타를 주민등록증의 사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화사회를 선도하는 IT 강국의 지도자가 할 소리가 아니다.
문제는 사이버공간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투영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인과관계에 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오늘날 사이버세계의 문제는 익명성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권감수성에서 온 것이다. 사이버공간의 폭언은 정확히 말하면 현실세계에서 억눌린 감정의 폭발이다. 이걸 익명성때문이라고 주장하면 난감해진다. 길거리에 다닐 때 명찰이라도 하나씩 달고 다니라는 말인가? 버스 승차할 때마다 신분증을 보여주어야 하나?
정부와 여당은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이든 정말 몰라서 간과하는 것이든 간에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바로 이미 실명제는 너무나 널리 이용되고 있고, 오히려 문제점은 너무나 많은 신원정보가 사이버공간에 떠돌고 있다는 것 말이다. 왠만한 포털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서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한 신원정보는 필수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도토리를 누리꾼들의 필수품으로 만들어놓은 싸이월드를 보자.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싸이월드는 개인의 신원정보 뿐만이 아니라 지인들과의 네트워크까지 완전히 노출되고 있다. 경찰을 비롯한 공안기관 뿐만 아니라 일반 누리꾼들도 얼마든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가능성으로 그치지 않고 소위 '00녀' 사건에서 실제상황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바는 정확하게 이거다. 이미 우리의 사이버공간은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으로 가입을 해야하고 고정 IP를 통해 접속상황을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 뭘 또 더 강력한 실명제를 하자는 것인가? 불과 몇 개월 전에 인터넷 상에서 주민등록번호 등 과도한 신원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를 제한하겠다고 밝혔던 정부가 복날도 되기 전에 벌써 더위를 먹었단 말인가? 문제를 일으켜서 제재를 받아야할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지금의 시스템과 제도로도 제재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같은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하겠다는 이유는?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으로 인증을 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어차피 익명성이 완전히 거세된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익명성 거세의 상황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익명성의 횡행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와 여당은 진짜 모르는 걸까? 얼마전 불심검문하는 두 형사를 살해하고 도주한 용의자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헤프닝. 오밤중에 이 용의자가 인터넷에 접속하여 실명인증을 한 후 게임을 시작했다. IP를 확인한 우리의 경찰, 급기야 기동대를 급파하여 한 아파트단지를 급습, 집집마다 수색영장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공포심을 조장했다. 알고보니 게임을 하던 사람은 뉘집 어린 아이. 수배전단의 인적상황을 가지고 실명인증을 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신원사칭 또는 신원절도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이들이 남의 주민등록번호로 실명확인을 거친 후 게시판을 더럽히게 되면 그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실명제 덕분에 게시판 문화가 안정이 될까? 질서가 잡힐까? 이런 불상사를 직접 겪었으면서도 실명제에 목을 메다는 이유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속담은 오늘날에도 명언이다. 누리꾼들 덕분에 정권을 잡은 참여정부,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뼈속 깊이 느꼈을 잘난 '386'들, 정보화시대의 선진국을 만들겠다고 설레발이를 치고 있는 정보통신부, 도대체 지들이 오늘날 어떻게 그 자리에 가 있는지를 잊은 게다. 개구리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야 실감이 될 지경이다. 검열과 통제를 통한 질서의 회복. 그게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참여정부고 민주사회의 본색이었단 말인가?
자, 어쨌든 게시판 실명제라는 전가의 보도는 칼집을 빠져나와 그 서슬퍼런 위용을 드러냈고, 바야흐로 빅 브라더의 세계는 '1984년'을 넘어 2005년에 대한민국이라는 IT 강국에서 재림의 기회를 맞이 하였다. 누리꾼들이여, 그대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호적에 기재된 실명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닐 지어다. 어느 게시판을 가더라도 실명으로 로그인을 할 것이며, 남긴 글마다 정보통신부의 눈길이 닿아 있음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다시는 인터넷이 참여민주주의를 앞당기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촌스러운 분홍빛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환상을 가지는 순간 말 마디마다 삑사리가 날 것이며 저들이 빼어든 서슬 퍼런 칼날에 키보드와 함께 손가락이 날아갈 것이다. 아듀~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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