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중반 독일 사민당 당수 뮌테페링은 대연정도 가능하다고 언급하면서 독일 정국을 연일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있다. 물론 12일에 슈뢰더 총리와 기민/기사연 총리후보 메르켈이 대연정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며 즉각 이를 부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슈뢰더 측근에서 선거 정책을 도맡아 왔던 뮌테페링의 과거 행적과 비중을 볼 때 대연정 언급은 여전히 무게가 실린 담론이다. 실제 뮌테페링은 슈뢰더 총리의 부정과 무관하게 여전히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정 제안 바로 전에는 총리가 직접 의회의 신임을 묻는 독일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7월 1일 슈뢰더 총리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신임투표에서 불신임이 결정되고 9월에 조기총선을 치르게 된 것이다. 독일의 불신임제도는 이른바 ‘건설적 불신임’으로서, 정국 혼란을 막기 위해 차기 총리를 선출하는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욱이 여당이 조기총선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불신임을 유도하는 것은 합법성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이다. 실제 기민/기사연은 적법성 문제를 제기하려는 흐름도 없지 않다.
슈뢰더 총리가 이런 계산을 하게 된 배경은 내년 총선에서 재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사민당은 지속적인 인기도 하락으로 고민하고 있다. 더욱이 이른바 정부강령인 ‘아겐다 2010’은 기업경쟁력 제고와 탈규제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노조를 비롯한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일으켜 왔다. 사민당 분열의 직접적인 계기도 바로 이 ‘아겐다 2010’이었다.
지난 5월 사민당 내 케인즈주의적 전통주의자인 라퐁텐 진영이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당’이라는 좌파정당을 새로 띄웠으며, 6월 이후에는 구동독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과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통합이 본격화된 직후 이루어진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새로운 좌파연합당의 지지율이 11%에 이르렀다. 기민/기사연의 지지율도 47%에 달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5월에는 더욱 심각했었다는 것이다. 조기총선 계획은 이미 5월부터 진행되었고, 당시 기민/기사연-자민당 연립에 대한 지지율은 53%에 달했으며, 사민당은 이미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기총선이라는 슈뢰더의 고육지책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 슈뢰더가 구체적으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따져 볼 때 적어도 사민당 내부 문제 돌파나 재선 기회 포착 또는 점차 벽에 부딪혀 가는 ‘아겐다 2010’의 실시를 목표로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좌파연합에 대응하여 사민당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하고, 재선을 통해 사민당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내각과 의원들의 임기단축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도가 가능했던 것은 아직도 슈뢰더의 개인적 인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상대후보인 메르켈과 비슷했던 인기가 돌파 정치 이후 다시 상승하여 상대후보를 약 4% 앞선 38%로 나타나고 있다.
대연정 언급의 속뜻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기 상승 기류를 다시 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적녹연정만으로는 재집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독일 역사는 이미 대연정을 경험하였다. 양대정당이 엇비슷한 득표를 하고 제3당이 캐스팅보우트를 행사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대연정이 가능한 정치전통을 가지고 있다. 차기 총선도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또한 ‘아겐다 2010’의 내용은 기민/기사연으로서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정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칫 기민/기사연으로 향할 수 있는 부동층의 표를 좀더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대연정 제안은 이미 신자유의화한 사민당으로서는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제안인 것이다.
최근 노무현 정부도 대연정까지 포괄하는 연정 제안을 했다. 배경도 독일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열우당 내의 분란이 독일 사민당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자유주의 진영과 더 개혁적인 진영으로 분열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또한 점차 실용을 강조해가는 당 기조와 민노당의 등장이 한국의 정당스펙트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바꾸어 갈 것이다. 그 스펙트럼에서 열린우리당이 차지할 위치는 우익-자유주의이다. 정치 역정을 보았을 때 자유주의 정당의 연정 범위는 대단히 넓다. 특히 수구보수가 여전히 사회정치적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연정은 가능하고 또 정당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실제 연정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익-자유주의적 열우당은 한나라당의 표를 잠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연정 제안도 열우당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연정 제안을 통해 한국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구도가 더욱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좌파 진영에서도 비판하되 반대할 이유는 없다. 지금 반대해도 장기적으로는 어차피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적 지지를 상실해가면서 찾을 수 있는 활로이자 고육지책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 3당 합당처럼 보수진영의 대폭 통합이 진보진영의 등장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좌파의 연합과 연대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걱정하고 추진해 나가야 할 일은 좌파의 연대와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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