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큰 수술을 했다. 엄마가 가슴의 통증을 호소한 건 꽤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소화제를 먹으면 곧 나았고 그래서 우리는 ‘엄마는 체하면 가슴이 아픈가보다’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그 통증이 너무 심하여 2주일 전 일요일, 오빠 내외가 엄마를 집근처 시립병원의 응급실로 모셨다. 의사는 심장이나 위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내시경과 심전도 검사 날짜를 예약해주었다. 그러나 약속된 날짜가 오기 전에 엄마는 통증 때문에 다시 응급실을 찾아야했다. 그때부터 엄마의 일주일간의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첫날 아침,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커튼 너머의 곡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계속 울었다. 다시 검사를 했고 협심증이 의심되는 엄마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꼬박 사흘을 중환자실에 계시면서 엄마는 월요일을 기다렸다. 월요일이 되면 드디어 주치의를 만날 수 있고(그 사흘동안 엄마는 주치의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병원이 의뢰한 다른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검사결과에 따라 수술이나 약물처방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전화를 해보니 엄마는 화가 아주 많이 나있었다. 오매불방 기다리던 월요일이 왔는데도 여전히 주치의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11시 30분 쯤 돼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주치의는 “검사는 그 쪽 병원 스케줄도 봐야하기 때문에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고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기약이 없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노발대발한 엄마 옆에서 병간호를 하던 큰언니는 민간 종합병원의 간호사로 있는 시댁의 사촌 형님에게 연락을 했고 그 분이 손을 써준 덕분에 엄마는 그날로 병원을 옮기고 바로 다음날 검사와 수술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다. 엄마의 병명은 불안정성 협심증. 심장을 둘러싼 세 개의 혈관 중 두 개의 혈관이 좁아져 있었는데 수술로 좁아진 부분을 넓히자 엄마의 통증은 씻은 듯 사라졌다.
일주일간 엄마의 병원생활을 지켜보며 두 병원의 차이가 시립병원과 민간병원의 차이인지, 아니면 연줄의 문제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큰언니의 사촌형님 덕분에 일들이 수월하게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언니 말에 따르면 두 번째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언니의 사촌형님은 처음 온 환자가 밟아야할 절차를 모두 생략시킨 채 곧바로 중환자실로 올려보냈고 담당의사까지 다 ‘맞춰놓았다’고 한다. 남동생이 군의관 시절에 절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그 병원에 근무하고 있어서 엄마의 마음은 더 편안해졌다. 남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그 선배는 ‘특별히’ 엄마를 찾아와 현재의 상태와 이후의 과정을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고 그 날 잠깐 본 엄마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보였다. 엄마의 말,
“야야, 뭣보담도 시원하게 얘기해줘서 진짜 좋다”
그날, 다른 가족들을 기다리며 지하 상가 의자에 앉아있을 때, 그 병원의 의사와 그의 오빠로 보이는 남자와 어린아이가 지나갔다.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우연히 들은 한 마디,
“오빠, 그건 반칙이야. 순서를 지켜야지. 위급한 병도 아닌데.”
우린 반칙을 한 거였을까? 하지만 원칙적이고 정직한 방법으로는 또 며칠을 기다려야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 지하상가의 의자에 앉아서 내 첫 번째 소개팅 상대였으며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의대 선배를 생각했다. 결혼시장에서 의사나 법관들이 인기있는 이유가 새삼 이해되었고 또 <모래시계>에서 박상원이 조민수에게 했던 대사가 생각났다. 카지노 대부를 아버지로 둔 고현정이나 신문사 사회부장을 삼촌으로 둔 기자 이승연 얘기를 하며 하숙집 딸의 인연으로 부부가 된 조민수가 울먹이며 말한다.
“내가 너무 힘이 없어서 미안해요. 그 사람들이라면 당신이 이렇게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
그 때 박상원의 대답이 참 멋있었다.
“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법관 사위를 바라는 건 자신들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예요. 당신이어서 내가 내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고 현실은 현실이다. 병원이나 법원은 위기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장소이다. 그날, 그 거대한 종합병원의 지하에 앉아서 나는 그 병원의 소유자인 거대 재벌의 위력을 실감했고(결혼으로는 한 사람하고만 인연을 맺는 거지만 돈으로는 그 잘난 의사들을 수도 없이 고용할 수 있으니까) 내가 참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퇴원한 엄마는 회복기에는 비탈길이 안좋다고 해서 봉천동 언덕빼기를 떠나 일산의 둘째언니네 집으로 옮기셨고 매일 운동을 하시며 평지와 잔디와 숲들이 참 좋다고 말씀하신다. 엄마를 보러 몇 번 일산에 간 나는 다른 것보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와 결고운 모래들이 부러웠다. 나이가 들고 아이가 생기고…그리고 더 이상 젊지 않은 엄마가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생전 처음 병원입원과 수술이라는 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새삼 느낀다. 정직한 순리는 여전히 뒤쳐지는 것이다.
얼마 전, 씩씩이 어린이집의 어린이들이 브라운스톤이라는 아파트단지에 놀러갔다가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냥 동네 놀이터여서 놀러간 씩씩이 아이들에게 주민들은 “우리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하며 경비를 시켜서 쫓아냈다. 집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산과 땅과 길과 놀이터에 주인들이 생겨나고 갖지 못한 이들과 그 이들의 아이들은 제대로 놀 곳도 없다. 한 줌도 안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권력자들은 곳곳에 포진해있으면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들의 영향력에 포섭되어가고 있다. 이런, 너무 패배적이잖아.
진보블로그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패배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니까. 뻐꾸기와 미류와 콩!!!과 해미….이들 말고도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서 힘을 받는다. 환자나 환자의 보호자로서 병원에 가보면 의사는 절대 권력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권력의 자리인 의사, 그런데 저이들은 자본의 권력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서있는 것같다. 그 사실이 새롭다. 진보넷을 알기 전에는 나는 세상에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의사들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 새로운 사실이 놀랍고도 힘이 된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나의 카메라가 서야할 자리를 잊지 말아야겠다. 최근에 느꼈던 나의 초라함까지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겠다.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때론 차별에 편승하기도 하며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나약한 나의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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