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가 4차 6자회담을 통해 어렵게 타결 됐다. 길게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짧게 봐도 2002년 이른바 제 2차 ‘북핵문제’가 불거진 뒤, 한(조선)반도를 감싸고 있던, 동북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냉전의 잔영이 일단 거두어질 최소한의 계기를 맞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힐의 입을 통해 이번 타결을 ‘윈-윈’으로 평가했으며, 한국 정부는 ‘한국 외교의 승리이자, 역사적 쾌거’를 내세웠다. 중국은 끈질긴 중재를 통해 공동성명을 성사시킨 막후자로서 6자회담 참가국으로부터 그 역할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북(조선)은 공동성명 채택 하루 만에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공동성명의 이행 과정에 대해 미국과의 이견 차이를 공식으로 드러냈다. 이는 공동성명의 모호성이 타결을 이끌어낸 묘수라기보다는 이후 험난한 과정을 예고하는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보다 크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번 타결은 말 그대로 ‘총론’ 수준의 합의이며, 공동성명이라는 형식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아직은 정치적 의미를 넘어 서는 것은 아니다. 타결 하루 만에 공동성명의 해석을 둘러싸고 북, 미 사이에 입장 차이가 불거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11월 중으로 열릴 5차 6자회담에서 시작될 ‘각론’을 둘러싼 힘겨루기 과정과, 합의 이행을 놓고 언제든지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북(조선)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핵’ 문제는 체제유지를 위한 핵심 사안이다. 한국 지배계급에게 ‘북핵문제’는 자본의 활로 뚫기와 관련된 문제이다. 미제국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동북아에서의 패권을 지속해 가기 위한 수단이다. 중국에게는 동북아에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문제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 받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의 민족주의 좌파는 ‘북핵문제’를 ‘민족통일전선형성’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원칙적 수준에서 ‘북핵문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핵무기 ‘폐기’ 문제다. 그러나 위 세력들은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6자회담 참가국 모두에게 ‘북핵문제’는 일종의 상징이다. 북(조선) 당국은 ‘보유’가 ‘폐기 또는 포기’보다 체제유지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한국 지배계급은 자본 진출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으면, 미제국주의자는 북(조선)의 보유 선언 또는 의지가 자신들의 패권 유지에 활용될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하면, 중국은 동북아에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계산이 서면 언제든지 태도를 달리할 수 있는 문제이다. 한국의 민족주의 좌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들에게도 ‘북핵문제’는 폐기 또는 보유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민족통일전선형성’을 위한 매개 또는 고리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6자회담 당사국들이 ‘북핵문제’에 임하는 정치적 함의와 목적은 각각 다르다. 또한 이번 타결의 내용 역시 이후 6자회담 당사국을 강제할 수준의 규정력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6자회담 당사국은 물론, 전 세계가 말하고 있듯이 ‘북핵문제’는 아직 타결되지 않았다. 타결된 것은 ‘북핵문제’ 자체가 아니라 4차 6자회담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핵문제’는 이제 첫발을 내민 것에 불과하다. 비록 지난 제네바 합의 이후의 상황 때와는 단순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파기 또한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이번 4차 6자회담에서의 합의는 이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펼쳐질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일괄타결’의 의미에 근접한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매 사안이 하나의 독자적인 의제로 상정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다. 실제의 현실은 회담은 ‘일괄타결’의 모양에 맞춰 진행되는 양상을 띠면서도, 속 내용은 사안 하나, 의제 하나가 각각 별개의 독립적인 규정력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6자회담 참가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어느 한 방향으로만 쏠릴 만큼 세력관계가 일방적인 형태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에 의한 것으로, ‘일괄타결’로 보기에는 합의에 필요한 핵심적 사안인 ‘경수로’ 문제가 너무나 모호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후 회담이 곧바로 앞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한발을 내민 상태에서 당분간 열 걸음을 하는 모양새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을 해 볼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노동자계급 또는 좌파 정치세력이다. 한국의 노동자계급 및 좌파 정치세력에게 ‘북핵문제’는,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포함하여 특히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아직 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확고히 세우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북(조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가 아직은 불분명할뿐더러, 자신이 갖고 있는 정치 역량이 미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좌파에게 이 문제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되거나, 하나의 정치적 방향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아니 이제껏 그렇게 치부해왔고, 이해해왔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식이 사실 관계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미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로까지 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이 더욱 치명적인 문제이다.
원칙적으로 ‘북핵문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핵무기 폐기 문제다. 이를 ‘북핵문제’에 적용하면 한(조선)반도에서의 ‘비핵화’ 실현 문제이다. 이의 연장에서 동북아 인민의 입장에서는 ‘북핵문제’는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에 기초한 동북아 지역의 평화 구축 문제가 된다.
그러나 현 정세 아래에서 한반도에서의 ‘비핵화’와 동북아 차원에서의 평화 구축은, 그것이 비록 동북아 인민의 필요와 맞닿고는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가 동북아 지역에서 관철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등장한다. 북(조선)은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로의 편입이 현재로서는 체제유지를 위한 조건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결과가 체제유지의 약이 될지, 독이 될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나머지 당사국들은 동북아 지역에서의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 형성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지분을 최대화하기 위한 쟁투를 벌리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세와 공격을 동반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비핵화’ 실현과 동북아 지역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이 동북아 인민의 필요와도 접목되지만, 그 과정은 곧 자본의 공격을 동반하는 과정과 결합 될 것이라는 점이, 그를 막아내기 어려운 정세라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 지점이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의 좌파가 민족주의 좌파와 공동대응을 모색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현재로서 ‘민족통일전선형성’은 북(조선) 당국과 한국 지배계급에게 사실상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없다. 그들이 비록 아래로부터의 ‘민족통일전선형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불가피한 것일 뿐, 궁극적으로는 위로부터의 ‘민족통일전선형성’까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의 노동 사이의 대립은 부차화 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국의 독자적인 ‘선변혁’ 또는 북(조선) 인민의 ‘권력화’를 가까운 시일 안에 기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민족주의 좌파가 추진하고 있는 ‘민족통일전선형성’이 갖는 한계와 함정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에도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다. ‘반세계화’ ‘반전반제’ 전선 역시 정세를 반전시킬 정도로 조직화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핵문제’에 대해 비껴가거나 정치적 기권을 하는 것은 더욱 문제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좌파 정치세력은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일단 한반도에서의 실질적인 ‘비핵화’ 실현과 이를 토대로 한 동북아 지역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이에 필요한 정치적 의제 제기와 투쟁조직화에 조금도 망설일 이유는 없다. 이 과정이 비록 자본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어 신자유주의 시장 질서 형성과 맥을 같이하고는 있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이다. 이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마저 없지는 않다. ‘반세계화’, ‘반전반제’ 의제를 중심으로 미약하나마 노동자계급의 일부와 소통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북(조선)과 동북아 인민과의 교류 및 공동대응도 하기에 따라서는 모색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조직 노동자와의 접점 형성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대중의 정치 실천도 좌파의 정치기획 부재로부터 연유한 측면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을 내다보고 지금부터 시작해도 결코 늦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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