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망령에 시달리는 시대, 말쫑들로 넘쳐나는 시대"

[기고] 양심은 비약하지 않는다, 도약할 뿐이다

2002년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나온 중학교 국사 교과서 306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북한이 일으킨 6 ․ 25 전쟁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다. 전쟁으로 인한 남한의 사망자 수만 해도 150만 명에 달하였고, 수많은 전쟁 고아와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다.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 공장, 발전소, 건물, 교량, 철도 등의 경제 시설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인명과 물질적 피해 뿐만 아니라 정신적 피해도 막심하였다. 남북한 간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평화적인 통일보다는 대결의 국면으로 치닫는 민족의 비극이 확대되어 갔다.”

인용한 교과서의 구절은 대단히 모호하게 쓰여져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하지만 북한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가 없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다”는 구절에는 진짜 주어가 없다. 생명과 재산을 잃은 것이 남한 사람들인지 북한 사람들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라는 구절도 대한민국 전체의 국토인지 남한의 국토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6 ․ 25 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는 점 뿐이다.

최근 6 ․ 25 전쟁을 ‘통일내전’으로 규정한 강정구 교수가 9월 30일 민교협 정책토론회에서 한 발언을 두고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강정구 교수는 이 날 토론회에서 “1946년 당시 여론조사 결과 77%의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압도적으로 지지했기에 미군의 개입만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로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이 나오자마자 조선일보는 “강 교수가 이번엔 공산주의 택했어야 한다는 폭언을 했다”고 비판하고 동아일보는 “강 교수가 인용한 자료는 정치체제가 아닌 경제체제에 대한 조사였고 이것도 사회주의 70%와 공산주의 7% 지지율을 합쳐서 공산주의로 해석하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비판했다. 하긴 동아 ․ 조선에 기대할 것이 무에 있으라먄은, 강정구 교수를 조 갑제와 동렬에 놓고 특유의 표정으로 비판한 진중권의 태도, 더 나아가 강정구 교수에게 수강한 학생들에게 취업 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말한 대한상의 부회장의 망언은 강 교수가 발언한 구절의 맥락을 마구잡이로 해석함으로써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 논리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강 교수의 만수대 해프닝이 있었던 탓인지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 통일에 대한 논리의 도약을 학문적 ․ 양심적으로 시도하는 강 교수를 냉전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극우세력의 준동이 심상치 않다. 설상가상으로 경찰청은 강 교수 구속수사를 천명했고 강 교수는 대한민국을 UN에 고소하겠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인천의 한 진보단체가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한 이후 내심 호기를 노리던 극우세력에게 강 교수는 품질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법 앞에 성역은 없다, 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최근 삼성그룹에 대해 1차로 유죄판결이 났지만 성역이 언제 또 철옹성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동시에 우리는 학문 앞에 성역이 없다, 라는 말도 믿지 못한다. 법이 학문 위에 군림하고 국가보안법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위에 군림하는 탓이다. 98년 《경제와 사회》지에 기고한 강 교수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로 갔을 것”이라는 강 교수의 말을 “공산주의 택했어야 한다는 폭언을 했다”라고 폭언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현실적 ․ 실천적 ․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무슨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길래 “공산주의로 해석하는 논리의 비약”이라며 학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강 교수가 문제라고 벌처럼 쏘아대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1995년 프랑스 파리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세기의 철학자 들뢰즈는 니체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의인들에게서는 긍정이 일차적이고, 이 긍정은 차이를 긍정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원용하여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일자’(The One)가 지배하는 시대다.

우리가 보는 TV에도, 우리가 내는 세금에도,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도 일자가 침투해 있고 일자가 지배적인 시대에는 니체의 말처럼 의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말인’(末人), 우리가 늘 쓰는 어투로 말하자면 ‘말쫑들’만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해 보자”가 아니라 “나처럼 해 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라고 들뢰즈 또한 말하지 않았던가.

강 교수는 적어도 “나처럼 해 봐”, “나처럼 6 ․ 25 전쟁을 통일내전으로 생각해 봐”라고 그 누구에게도 강권하지 않았다. 학문적인 연구논문을 발표한 것 뿐이다. 그러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니가 하면 바람인 시대에서 생각의 차이가 긍정될 리 만무하다. 나처럼 하지 ‘않고’나를 따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적이고 웬수일 뿐이다. 그래서 벌집을 건드린 사람을 벌떼가 집요하게 쫓아가고, 놀라 달아나는 사람을 끝까지 쫓아가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곤충의 행태가 인간사는 세상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말쫑들로 넘쳐나는 시대이기에 이 시대에는 우리가 부비고 기댈 언덕도 들뢰즈가 찾았던 스승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시대를 배회하는 매트릭스의 그 일자가 바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 침투해있는 ’차이의 부정‘인 탓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맑스의 유령’이 횡행하는 시대가 아니라 ‘재현의 망령’에 붙잡혀 시달리고 있는 시대다. 강정구 교수는 조갑제를 닮았고 김일성은 박정희를 닮았으며 북한은 남한을 닮았고 이라크를 닮았다. 아니 완전히 동일하진 않더라도 유사하고 비슷하다는 것이다.

해방 후 김일성은 북한으로 가 수령이 됐고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는 남한에서 ‘총통’격이 됐다. 수령이 총통을 닮은 것이다. 『알몸 박 정희』의 저자 최상천 교수 말대로 7 ․ 4 남북 공동성명 이후 김일성과 다카키 마사오는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벌인 것 아닐까?. 그러나 김일성은 항일투쟁을 했고 박정희는 알아서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만주군 장교가 됐다. 성 씨도 다르고 얼굴 모양도 다르며 항일투쟁과 친일투쟁을 하며 서로 달랐지만 김일성은 수령독재를 했고 다카키 마사오는 개발독재를 했다. 다르지만 같은 것이고 닮은 꼴이라는 말이다. 거울을 통해 다카키 마사오(그리고 마사오를 그리워하는 이 시대 극우세력들)가 김일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중권의 말대로라면, 강정구 교수는 거울을 보며 거울 속에서 조갑제를 보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거울을 깨고 보자. 다카키 마사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을 터이고 조갑제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굴을 그대로 비쳐 보이는 재현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강정구 교수와 조갑제는 서로 비대칭이고 김일성과 다카키 마사오도 비대칭일 터인데 거울을 보는 주체인 다카키 마사오, 조갑제, 조선 ․ 동아 등은 언급하지 않은 채 도대체 누가 거울을 보면서 강 교수 얼굴에서 조갑제, 김일성의 얼굴을 집요하게 찾으려 한다는 말인가. 필자가 보기에, 이 또한 거울을 보는 주체는 누락시킨 채 재현의 망령에 사로잡힌 결과인 것이다.

재현의 망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락없이 걸리는 병이 있다. ‘양비론’이다. 양 쪽을 다 싸잡아 비판하는 이 논리 아닌 논리는 동일성의 논리, 재현의 논리, 거울의 논리에 걸려들었을 때 걸리는 치명적인 병이다.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는 냉전논리가 만들어낸, 허구적이되 현실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몹쓸 병에 걸려 있다.

10월 6일 ‘정동영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통일부장관’이라고 한 김용갑 의원의 발언이나 조선일보 조화유의 ‘친애하는 강정구 교수에게’란 글을 읽어봐도, 여전히 우리는 치유불가능한 재현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남한=자유/북한=부자유의 논리는 겉으로 보면 비대칭인 것 같지만 자신들의 얼굴이 비친 거울에서 김일성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지독한, 한국판 ‘재현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남한의 부자유, 남한의 인권유린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북한의 인권유린만 언급하는 것이다. 어디 신체적인 부자유만 부자유이고 신체적인 인권유린만 인권유린인가. 사회 양극화, 교육 양극화로 경제적으로 볼 때 거의 분단되어 있는 남한 안의 ‘또 하나의 분단’은 인권유린이 아니고 부자유 아닌가.

최근 강 교수 문제와 연관해 대한상의 부회장이 한 발언을 보면 박 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간첩혐의와 연관된 연좌제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 연좌제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연좌제’로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의 기억에는 80년대 서대문 형무소에서 먼 친척 간첩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방에 들어온 박수의 얼굴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강 교수에게 수강한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발상은 경제를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국가보안법을 이제는 경제분야에도 확대 적용하겠다는 망발에 지나지 않는다.

금강산 관광이 김정일 자본과 현대 자본이 만들어낸 협작극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국사 국정교과서의 내용을 뒤집어, 남한의 현실은 언급하지 않은 채 북한의 인권유린, 거지대국만 운운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남한=자본주의=자유/북한=빨갱이=부자유라는, 그 비대칭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동일성의 망령을 불러내고 그 망령스러운 논리에서 기득권만을 챙겨 나가는 술수일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재현의 논리를 넘어설 제3의 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제3항은, 논리의 비약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제비뽑기 같은 논리의 도약을 통해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통일을 열망하는 양심의 도약 말이다.
덧붙이는 말

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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