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고교평준화에 관한 보고서에서 평준화와 학력 저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요즘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이 연일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평준화 때문에 학력이 떨어지고 사교육비가 늘었다”며 평준화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는데, 이 모든 주장이 한순간에 날아갈 판이기 때문이다.
평준화와 학력 저하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연구 결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여러 연구자들의 개별 연구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고, 오히려 대부분의 연구에서 평준화 지역의 평균 학력이 비평준화 지역보다 높은 것으로 나왔다. 최근 OECD가 발표한 국가 간 평균 학력평가에서 우리나라 학생이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을 두고도, 외국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한국의 평준화정책이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결과라고 높이 평가한다. 결국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가 객관적 실체가 없는 일종의 ‘유령’인 셈이다.
기득권층과 보수세력도 눈과 귀가 있으니 그걸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향평준화 유령’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평준화 폐지’를 위해서는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평준화 헐뜯기’ 나아가 ‘평준화 죽이기’에 올인(All-in)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그들이 바라는 ‘명문 귀족학교’가 활개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평준화에 흠집을 낼 수만 있다면 일단 하고 보는 게 그들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먹고 사느라 바쁜 세상에 누가 기억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는 우리나라의 국책 연구기관 가운데 하나인 교육개발원의 연구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종전의 개인 연구자의 발표와는 그 차원과 비중이 다르다. 결코 예전처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이 똥줄이 타서 입에 거품을 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떠들었던 ‘하향평준화’의 근거를 직접 대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스로 ‘하향평준화’ 주장이 근거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의 소모적이었던 ‘평준화 논란’이 제 자리를 잡아간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스럽지만, 당사자로서는 적잖게 꼴사나운 일이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육개발원의 연구를 물고 늘어져 만신창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체면은 차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물귀신처럼 ‘평준화 논란’을 또 다른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행태를 보면 그들의 선택은 명백히 후자 쪽인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평준화를 때려 얻고자 하는 것은 사실 ‘학력신장’도 아니요 ‘사교육비 경감’도 아니다. 사교육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가며 명문대 입학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그들에게 ‘사교육비’는 이미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지 오래다. ‘돈 놓고 학벌 따 먹기’ 입시경쟁에서 돈으로 한 판 승부를 가르는 방식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토록 매력적인 방법을 왜 포기하겠는가?
알고 보면 평준화와 입시제도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에 접근할 기회를 분배하는 방식과 직접 맞닿아 있다. 그리고 학벌주의 사회에서 명문대학 졸업장은 다시 노동시장에서 유리한 취업기회를 획득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결국 평준화와 입시제도는 기득권층에게는 자신의 부와 지위, 사회적 권력을 계속 유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사정이 이쯤 되면 평준화나 입시제도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사회적 지위와 자산을 미리 선점하기 위한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이 평준화와 입시제도에 그토록 민감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상류층 출신 아이들이 명문대 입학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지금, 평준화와 입시제도가 왜 또 다시 문제인가? 그것은 현행 평준화제도와 입시제도가 사적 자원을 총동원한 중상류층의 총력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별 학력격차를 무시한 내신 성적은 그들의 특권을 상당부분 견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필본고사나 종합논술 금지는 그들만의 장기인 ‘사교육의 위력’을 반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요구는 이 둘을 철폐함으로써 자신들의 교육적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라는 것이다. 작년에 문제가 되었던 ‘고교등급제’는 그런 원초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다.
게임이 게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룰이 있어야 하고, 그 룰은 최소한의 공정성을 가져야 한다. 게임의 룰을 바꾼다고 해서 교육을 통한 ‘계급분리’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룰마저 없다면 그것은 ‘정글의 법칙’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게임의 룰을 바꾸려 한다. ‘평준화 흔들기’의 본질은 바로 그것이다.
평준화 제도가 학력 저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 여러 차례 밝혀진 이상, 기득권층의 교육독점을 위한 ‘평준화 논란’을 더 이상 계속할 이유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소모적인 ‘평준화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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