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가 “역사상 최초의 코뮤니스트정권”이라고 평했던 파리 코뮌은 나폴레옹 3세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독일과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려는 왕당파와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파리의 민중들이 세운 급진적인 정권으로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두달 간 지속됐다.
결국 파리코뮌은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일주일간 지속된 진압 작전에 의해 2만 명이 목숨을 잃고 4만 명이 체포되어 이중 7500명이 유형에 보내지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특히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5월 28일 파리동북부의 페레-라세스 공동묘지에서는 동쪽 벽에 포로가 된 코뮌군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집단적으로 총살을 가했다.
지난 10월 공무로 약 보름 간 프랑스, 독일과 네델란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파리에 들렸을 때 시간을 내 페레-라세스 공동묘지의 ‘통곡의 벽’을 찾았다. 92년 광주 5.18관련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세계민주화 운동 기념현장을 돌아오기 위해 들린 뒤 13년 만에 다시 찾은 통곡의 벽은 13년 전이기는 하지만 한번 들렀던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가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이 묘지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명사들의 묘지가 줄줄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프랑스 여행안내 책자의 안내에 따라 묘지 앞 카페에서 묘지 지도를 샀지만 이 지도에도 빅터 유고, 이브 몽땅, 에디드 삐아프, 짐 모리슨 등 인기예술가들과 연예인들의 묘지만 표시되어 있을 뿐 통곡의 벽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간 통곡의 벽에는 한 중국인이 놓고 간 화환, 그리고 누군가 꽃아 놓은 추모의 꽃 한 송이들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아직도 파리 코뮌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반갑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130년 전의 총탄자국이 뚜렷한 벽에는 [1971년 5월 21일-28일 파리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라는 기념현판이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 파리 코뮌 당시 코뮌군이 진압군에 의해 저항하다 마지막으로 사살된 통곡의 벽으로 아직도 총탄자국이 생생하다. "1871년 5월 21 -28일 파리 코뮌시 죽은 자들에게" 라는 글이 인상적이다. (페레-라세스 공동묘지에 위치함) |
간단히 망자들을 위한 묵념을 드리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묘지 외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파리 코뮌 기념부조를 찾아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넓은 페레-라세스 공동묘지에서 통곡의 벽이 있는 구역이 ‘좌파’구역인지 중요한 프랑스 좌파인사들의 묘지가 줄줄이 나타났다. 특히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스페인내전 당시 파시즘으로부터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자원을 해 스페인으로 달려가 전투에 참가했다 목숨을 잃은 국제의용군들을 기리는 묘비들이었다. 세계화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국제연대와 국제주의를 가장 치열하게 실천한 이들의 용기를 생각할 때 아무리 바빠도 참배를 해야 할 것 같아 다시 발길을 멈췄다.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묵념을 드리며 과연 우리 중 반파시즘 투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먼 이국으로 무기를 들고 달려갈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반문해봤다.
▲ 파리의 페레-라세스 공동묘지에 설치된 스페인내전 참전의용군 기념 묘비와 스페인내전 참전국제의용군 기념 묘비 |
묘지 외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코뮌기념 부조를 찾아 묘지 밖으로 나왔으나 13년 전 한번 왔던 일이라 방향이 전혀 기억이 되지 않는데다가 묘지 내부와 달리 그 동안 주변 거리가 너무 바뀌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카페에서 산 묘지지도에 ‘혁명의 희생자’들이라는 기념물 표시가 되어 있어 외벽을 따라 설치한 철조망 담장을 따라 그 쪽 방향으로 걸어가며 조형물을 찾았다.
그러나 벽이 주택가에 막힌 곳까지 걸어가 한 시간 이상을 헤매고도 조형물을 찾는데 실패했다. 그래 포기를 하고 실망감속에 차를 주차했던 곳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담장 안 언덕 위 벽에 작은 부조같은 것이 눈에 띄였다. “저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담장을 따라 뛰어가자 담장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
이 문으로 들어가 언덕위로 달려가자 찾고 있던 부조가 나타났다. 대강 지도에 표시되어있던 ‘혁명의 희생자들’이라는 조형물이 내가 찾던 부조였고 대강 위치도 맞았다. 그러나 기억보다 부조가 초라하고 작은 데다가 담장이 새로 생겨 담장 밖에서 담장을 따라 걸어가느라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다.
이 부조는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코뮌의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두 팔을 벌린 한 여성의 전신상 뒤에 다른 신체부위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파리 코뮌의 희생자들의 얼굴만을 스케치식으로 처리해 다시 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뛰어난 조형물이었다.
그러나 이 부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안내가 쓰여 있지 않아 지나가는 산책객들에게 그 의미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한 채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통곡의 벽처럼 최소한 안내의 글을 만들어 놓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외벽 부조를 찾느라고 한 시간 이상을 허비하는 바람에 예정했던 지하묘지(까따꼼) 방문은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 페레-라세스 공동묘지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파리 코뮌 희생자 기념 조각 (죽어간 인물들의 얼굴조각이 인상적이다) |
다음날 지하묘지인 까따꼼으로 향했다. 까따꼼은 사람의 뼈를 사람 키만큼 쌓아놓고 그 위에 해골을 올려놓아 유골 구경 자체로도 한번 가볼 만한 곳이지만 특히 프랑스 대혁명과 파리 코뮌 당시의 유골도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번 가볼만한 곳이다. 이곳도 13년 전에 한번 들렸던 곳인데(당시 근 한 달간 유럽을, 그것도 난생 처음 여행했는데, 여행목적이 목적인만큼 하구한 날 본 것이라고는 이 같은 무덤뿐이었다!!!)
당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하무덤을 소름이 오싹하며 걷은데 서양관광객들은 숨어 있다가 으악 소리를 질러 귀신놀이를 하는가 하면, 나올 때 가방검사를 하는데 우리 같으면 돈 주고 가지고 가라고 해도 안 가지고 갈 해골이나 뼈다귀들을 멀쩡하게 생긴 금발의 미녀들이 하나씩 핸드백에 숨겨 나오다가 가방검사에 걸리는 것을 보고 문화라는 것이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한 바 있다.
▲ 파리코뮌 당시의 유골들 |
한참을 걸어 내려가자 지하통로가 나오고 또 한참을 걷자 어둠속에 뼈를 쌓아놓은 ‘뼈의 산’들과 해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내를 맡았던 대학후배가 파리에 3년을 살지만 이 같은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신기해했다. 구역별로 되어 있는 유골더미에는 해당 연도들이 쓰여 있는데 한참을 걷자 프랑스 대혁명시기인 1792년 시기의 유골더미가 나타났다.
또 한참을 걷자 파리 코뮌당시의 유골더미도 나타났다. 역사, 특히 혁명이란 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 위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유골들을 직접 눈으로 보자 이 같은 희생을 더욱 실감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한참을 걸어 출구로 나오자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기념품으로 유골을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핸드백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와 달리 내가 본 서너 명의 서양여자들은 해골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13년 동안에 문화가 바뀐 것인가?
▲ 프랑스 대혁명 당시 유골들 |
오후에는 13년 전에 보지 못한 시테의 꽁시에르게리에로 향했다. 시테는 세느강에 있는 작은 섬으로 유명한 노틀담사원이 있는 곳인데 노틀담사원 옆에 위치한 꽁시에르게리에는 원래 이곳에 있었던 프랑스의 왕궁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감옥이 프랑스 대혁명당시 혁명재판소 감옥으로 쓰이며 루이 16세의 부인으로 굶주림에 지쳐 폭동을 일으킨 민중에 대해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라는 명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마리 앙뚜아네뜨를 비롯해 많은 반혁명분자들이 투옥됐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제는 기념관으로 변한 감옥에는 일층에 마리 앙뚜아네뜨가 갇혀 있던 감옥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층에는 다양한 혁명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프랑스대혁명동안 파리에서 길로틴(단두대)에 의해 처형된 2780명의 명단이었다
▲ 마리 앙투아네트 사망직전 모습 모형과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리에서 길로틴에 의해 처형된 2780명의 명단 |
구체제의 왕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건파인 단통도 길로틴의 재물이 됐고 급진파인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잡고 급진적 개혁을 추진할 동안에는 하루에 평균 38명이 단두대로 향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피의 숙청을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도 떼르미도르의 반동과 함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고 길로틴을 만든 길로틴조차도 길로틴으로 처형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역사란 꼭 이 같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 로베스피에르 흉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