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개악안 지연전술을

"한국노총은 자발적으로 차별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겠다는 것"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과업"으로 평가받을뻔 했던 소위 4대 개혁 입법도 몇 년째 지지부진한 판에, 왜 비정규법안만은 그리 빨리 통과시키려고 난리지랄들인가?

“브레이크 없는 비정규직 확산에 제동을 걸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극심한 차별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땅 850만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데 있어 비정규직 법안의 국회 처리는 더 이상 미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그럴듯하지만 싸가지 없는 논리로, 한국노총은 지난 달 30일 비정규 법안 최종안에 대해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잘 들여다볼 것도 없이, 한국노총의 수용은 "입법을 빨리 하시라"는 것일 뿐이요, 그들도 필요하다고 말한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어도 입법통과시키라는 것이다. 즉, 자발적으로 "극심한 차별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겠다는 것이다.

하루가 지난 12월 1일 참여 연대 등 7개 시민 단체들이 "최선의 안이 아닐지라도 입법 무산은 막아야 한다"는 똑같은 논리로 닫힌 느그당의 비정규법안을 대폭 수용한다고 밝힌바 있다.

우리는 저 엿같은 "차선"(알고보면 최악과 다를바 없는차악)논리를 깨부술 수 있는 논리와 레토릭을 개발해야 한다. 예컨대, 민노당의 법안이 겁나게 "극좌"라고 매도된다면, (대중 매체를 통해서 만나는 소위 '대중'에게는 '쟤들 민노당 맞어?'하고 헤갈리게 할 정도로꺼정이라도) 열라 "우파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 "알딸딸한" 어법들과 논리 구사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단병호 의원이 비정규직 법안 저지를 두고 단식투쟁을 할까바 걱정했다.

단식 투쟁은 극한에 몰려서 그 절실함을 호소하기 위한 벼랑책이긴 하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주는 이미지 효과면에서 보자면 그닥 크지 않다.

지율스님과 같은 '생명존중'헌다는 불교계와, 또 '생명과 환경'을 '보호'하자는 환경운동이 만나서 연출되는 스펙터클로서의 단식투쟁과는 달리, 소위 '극좌'[알고보면 8:2인 우리 사회 구조가 8을 위한 방향으로 변혁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의 단식투쟁은 군사독재 시대의 유물같은 것으로 이미지가 박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투쟁'진영에게도, 단식투쟁은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오는 건 결코 아님시롱, 예컨대, 느그당애들이 맨날 써먹는 레토릭이기도 한, "할만큼 했다"는 허위적인 자위의식과 더불어, 관련된 쟁점들을 둘러싼 투쟁 '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스스로 발급하는 효과가 있다.

내 생각에는, 면죄부 대신에, 입법투쟁에서 그라고/혹은 다른 투쟁에서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서 관련 쟁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그 인식이 좀더 변혁세력의 그것에 가깝게 '견인'하는 여러 투쟁방법들이 실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찌질이 딴나라당과 닫힌 느그당이 잘하는 '쇼'를 과격하게 패러디해서, 권리 주장할때도, '다리 내놓고 파는 식'의 '우리가 얼마나 양보했는지'를 무엇보다 강조함시롱 소위 '기득권'(과 스스로를 '정규직'이라고 착각함시롱 경제 관련 해서는 유독 보수적인 노동자계층)에게 '양보'를 토해내도록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열린느그당, 한국노총, 그라고 7개의 시민단체의 논리는 "비정규직 문제가 시급하니까 빨랑 입법해야 한다"는 것인데, 정작 시급한 것은 빨리 입법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최소한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일이 아닌가.

사실, 민노당이 내놓은 열라 "극좌"법안이라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은 엄청난 양보와 어쩔수 없는 타협을 통한 "후퇴"안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철폐"야말로 온당하고도 마땅한 요구지만, 그럼에도 이런 논리와 요구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최소한마저도 지킬 수 없기에, '권리보장' 쪽으로 양보한 것이다. 소위 '좌파'에 충실한 원칙대로 하자면, 비정규직 철폐법안을 제출하고 투쟁해야 하겠지만, 그 빌어먹을 '현실'을 감안한 안이라는 말이다.

인터넷, 오프라인 일간지의 1면과 인터넷 토론장의 80%이상을 황우석 사건과, 황우석 연구 대 엠비시 피디 수첩간의 엉뚱한 '진실'게임이 도배하고 있는 동안 (이런 종류의 진실게임이야말로 최첨단 생명공학에 요구되는 윤리적 연구와 그 성과의 민주적, 윤리적 사용과는 거리가 먼, '일그러졌지만 일그러져서는 안될' 영웅 구하기식으로 사회적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동시에 관련된 개인을 희생시킴으로써, 지금 여기 그라고 미래를 위해 너무나 절실한 사회적 의제의 건설과 토론을 차단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1천만을 넘어서고 있는 판인데도,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민노당의 국회투쟁은 외롭기만 하다. 민노당이 제출한 '최소권리'법안은, 사유제한을 전제로한 비정규직으로 인정하고 계속 고용의 경우는 반드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정규직노동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엄격하게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선을 넘는 것은 후퇴가 아니라 죽음이며, 멀리 보자면 소위 '민족' 전체의 공멸일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 문제 관련해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볼 때) 국민들의 관심이 불타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 사회의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기륭전자의 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말마따나 "정규직이 소원"이면서도, '나는 비정규직이 아니여(야 해)'하는 소망투사적 욕망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노무현 정권의 '노동귀족' 이데올로기는 확실히 노동자들을 이간질시키고 국민여론을 반노동적이게 만드는데 효과적이었다.

"더 열심히 일하자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는 구호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노동자들에게서 먼저 나온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이 최소한의 권리는, 말하자면, '이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보장해준다면 열심히 일하겠다'는 소박하고도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즉, 너무나 역설적이지만, 자발적인 노동 강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들은, 바로 이 최소한의 조건 보장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것이다. 이토록 양보했건만, 이런 양보와 타협의 대가가, 오로지 '해고의 자유만이 있는' 비정규 강제 노역이란 말인가?

'별 관심도 못받'도록 조작당하고 있는 총파업 투쟁과 더불어, 입법 투쟁 단체인 민노당은 비정규직 법안 관련하야 영특한 지연전술을 짜내야 한다. 민주노총도 총파업이라는 벼랑끝 게릴라 전뿐 아니라, 겉으로는 '부드러운' 전면전(8:2에서 8의 상당부분에게 감정이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의 다양한 전술들을 지금 당장 발휘해야 한다.

국회 농성 점검으로는 충분치도 못할뿐더러, 최소한 개악안 통과를 막고, 결국 또다른 개악수정안이 통과되더라도, 그 사이 충분한 시간을 벌어, 비정규 노동 문제의 심각성과 대책을 알려야 한다. 심각성보다는, 실질적인 대안(입법/정책)을 알리고 관심과 동의와 지지를 얻는데 주력해야 한다.

협상이란 전투를 치르는 기술이 아니라, 일방적 폭력이 자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휴전 혹은 정전의 기술이다. 협상에 동원되는/필요한 지식은 경쟁력이 된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경우, 필요하다면 남의 둥지에서 알을 부화시켜 키우는 뻐꾸기 짓도 서슴치 말아야 한다. "주인의 연장으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을 지라도, 스피박 말마따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일단 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의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원치 않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요한 비판이 그 모티브를 이룬다."

비정규직 개악안, 연내 입법 통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그리하여 벌게 된 시간을 부산시렵게 활용하여, 이 문제를 돌파하는, 보다 변혁적인 대안들이 사회적 인식의 지평에 들어가게 투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지연투쟁마저도 최소한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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