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의 여섯 가지 원칙

[퇴직연금 약인가 독인가](3) - 연금개혁의 올바른 방향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퇴직연금제가 12월 1일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정부는 퇴직급여제도의 퇴직연금제로의 재편을 통해 노동자의 노후소득과 수급권을 강화하는 한편, 기업의 부담은 경감시키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포부와는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각종 연금정책 방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민중언론 참세상은 4차례에 걸쳐 퇴직연금제를 중심으로 정부가 추진 중인 연금개혁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올바른 연금개혁의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글은 주은선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 연수원구원이 '연금개혁의 올바른 방향'을 제목으로 기고해왔다. 주은선 연구원은 이 글에서 연금개혁의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함으로서, 연금개혁의 방향에 있어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를 제기했다. - [편집자 주]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것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한국 사회에서 공적 노후소득보장 제도의 주축인 국민연금제도는 벌써 ‘비용 축소’라는 관점에서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민연금제에 필적할만한 규모의 퇴직연금제는 연금급여 보장이 불안정한 형태로 별다른 국민적 합의 없이 도입되었다. 즉, 한국의 노후소득보장 제도는 한창 성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축소, 불안정화되고 있다. 그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인구구조 변화라는 상황이 정부가 주도하는 모든 변화를 정당화시키는 효과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이 민영화, 시장화를 주로 하는 연금개혁은 인구노령화 문제해결보다는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와 신자유주의적의 금융주도 자본축적체제의 미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노령화에 대한 연금제도의 대응은 필요하지만, 민영화가 그 대응책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민영화를 통해 연금급여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현재 연금제도는 신자유주의하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길과 연대와 평등을 기축으로 하는 재정비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진보진영의 연금개혁의 대안에 관한 논의는 더욱 그러하다. 이 글도 대안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론적인 차원의 논의도 다음 발걸음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연금개혁의 첫 번째 원칙은 공적연금의 중심성을 유지하는 것, 즉 적절한 노후소득의 공적 보장이 되어야 한다. 국민연금제도를 둘러싼 불만은 국민연금제도의 진보적 쇄신을 위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국민연금 폐지는 정당화될 수 없다. 현 연금개혁 논의의 근본적인 쟁점은 공적연금제도의 축소에 관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자본측은 지속적으로 연금시장의 확장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경쟁과 투자성과에 의해 좌우되는 사적연금 시장에서 서민들이 적절한 수준의 노후소득을 확보,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연금을 통해 공적연금 감소분을 보충할 수 있는 소득계층은 중상층이다. 서민들은 개인연금을 구매할 여력이 거의 없으며, 기업연금으로부터도 소외되기 마련이다. 또한 본격적인 소득재분배는 소득계층을 불문하고 전 국민을 포괄하는 공적제도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소득재분배 장치가 존재할 때에야 서민들은 실질적인 노후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상당한 규모의 퇴직연금 도입은 노후소득보장의 계층적 분할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퇴직연금의 발전 대신 공적소득보장 제도의 확충이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현재 연금개혁의 문제를 공적연금의 축소와 사연금 확대의 문제로 본다면,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과 한나라당의 기초연금안은 일견 공적보장의 축소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한나라당안은 기초연금을 도입하는 대신, 현 국민연금의 보장 수준을 평균소득자 40년 가입시 20%로 낮추고자 한다.

이 경우 전체적인 공적연금 급여보장 수준은 동일한 상황에서 60%에서 35-40% 정도로 낮아진다. 또한 이 안은 국민연금을 사연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즉, 공적노후보장체계를 기초연금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가지로 축소시키고 실질적으로는 기업연금과 개인연금 강화를 통한 시장중심적인 노후보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안은 민영화 면에서 더 소극적이지만, 급여삭감을 추진하고 그 공백을 사연금이 채우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기초연금 문제이다. 물론 기초연금 도입은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에 근거한 보편적인 소득보장체계를 만든다는 의의가 있다. 게다가 이는 바로 지금 노인빈곤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초연금 도입은 경우에 따라 공적소득보장의 축소 및 사연금 확대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기초연금이 공적연금의 소득보장 수준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초연금 도입 자체보다 기초연금을 포함한 전체 노후소득보장체계의 성격과 그 속에서의 기초연금의 위상이다. 이런 면에서 한나라당의 기초연금안과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공적연금 축소없는 기초연금안은 성격이 다르다.

연금개혁의 두 번째 원칙은 국민연금의 보편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성격 강화이다. 앞서 언급한 공적연금의 중심적 역할은 우리나라 국민연금제도의 개선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지금 한국의 국민연금 제도는 덜 쓰고, 더 걷는데 치중할 때가 아니라 제도의 보편성과 적절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단계이다.

현 노인들 중 연금수급자 수는 극히 미미하다. 수많은 납부예외자, 보험료 미납자들을 볼 때 앞으로도 국민연금의 포괄성 문제는 계속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안정적인 보험료 납부와 관리가 불가능한 불안정고용층이다.

이들의 현재의 빈곤은 노후빈곤으로 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민연금 제도는 소득재분배적 요소를 담고 있지만 저소득 가입자에 대한 최저보장액수는 현재 22만원에 불과하다. 그 밖에도 출산기간, 실업기간 등에 대한 연금권 유지 등 국민연금 제도는 다양한 과제를 갖고 있다.

세 번째 원칙은 연기금 적립의 적정수준으로의 축소와 연기금의 사회적 이용이다.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정반대의 방향이다. 즉 연기금적립 확대와 연기금의 금융시장 투입 증가, 운용규제 완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지금 미래연금지출을 위해 연기금을 무조건 많이 쌓아놓는 것이 연금재정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길은 아니다. 수십 년 후 노인들의 연금급여는 지금 쌓아둔 현금이 아니라 미래 급여지급 시기에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형태를 띤 연금자산이 현금화될 때 충당된다.

급속한 노령화에 따른 대량의 ‘팔아치우기’ 사태는 연금자산의 가치하락을 가져오는 것이 필연적이다. 연기금 적립강화와 연기금 주식시장 투입 확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금융자본이며, 가장 큰 피해자는 금융시장 등락의 여파를 연금급여나 보험료의 조정을 통해 감당해야 할 가입자들이다.

아직 한국 경제규모에 적합한, 인구변동의 여파를 흡수할만한 적정 연기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적정 연기금 규모를 산출하고 이에 따라 연기금 적립 속도를 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다.

정부의 연기금 주식시장 투입 증가, 해외투자 확대를 제지하고 가입자가, 즉 대중이 연기금 운용의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위원회에서 거수기 역할을 하는 이름만의 참여를 극복하고, 연기금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하고, 그 사회적 사용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는 퇴직연금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들은 연기금 적립과 사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연기금 운영의 주도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또한 대중들이 형성한 자본을 어떻게 한국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이다. 연기금을 이용한 다양한 방식의 공공의료, 교육, 주택 제공을 위한 기반 마련은 그 한 예이다.

네 번째 원칙은 재정문제에 대한 근본적․장기적 대응이다. 공적연금 역할을 확대, 강화하고 국민연금 제도의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은 더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노령화 경향은 필연적으로 연금재정 확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보험료 인상은 정부가 역설하는 바처럼 유일한 대안도,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무엇도 아니다.

문제는 개인적 자원동원이냐, 연대적 동원이냐 하는 것이다. 비례세 방식인 연금보험료는 빈곤층과 부자에게나 동일한 보험료율을 적용하여 결국 빈곤층에게 상대적인 부담이 더 크다.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양극화 상황에서 비례세 방식의 연금보험료 인상에만 의존하여 재원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분노를 살만한 일이다.

연금제도가 연대성의 원리에 근거한 사회보장제도인 이상 ‘보험료-급여의 연계’라는 폐쇄된 고리에서 벗어날 필요 있다. 즉, 노령화에 대비한 공공재원 개발 문제는 장기적인 과제로 남는다. 금융시장에서의 자본거래에 대한 연금세 부과, 사연금에 대한 조세지원 철폐 등과 같은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기되고 논의되어야 한다.

다섯째, 간과되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연금개혁의 정치 과정의 민주주의확보이다. 퇴직연금제는 그런 면에서 가장 무원칙한 개혁 사례이다. 국민연금에 필적할만한 규모의 제도가 제도의 기본 틀에 대한 별다른 공론화 과정도 없이, 사회보장적 관점은 제거된 형태로, 매우 허술하게 법제화된 상황은 한국 연금정치의 비민주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연금제도 개혁에 대한 전면적인 논의의 전제는 공적연금의 보장성 제고를 위한 투쟁과 참여의 주체를 형성하고, 논의 시작부터 법안 확정, 운영에 이르기까지 연금제도 개혁을 위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과정 자체를 위한 노력은 사회보장 제도의 운영 권리 확보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회보장 제도의 진정한 민주주의 확보의 초석이다.

여섯째, 21세기 사회변화에 대한 연금제도의 대응은 연금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금제도 민영화를 통해 인구노령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공적연금제도의 축소나 폐지는 정확한 해결책이 아니다. 노령화에 대한 대응은 연금제도 개혁만큼 노동세계의 재구조화, 삶의 시간적 차원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연령으로 구획되어 있는 노동시장 참여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노령’ 개념을 완화시키고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 소위 경제활동 연령대에 속하더라도 육아, 교육, 재충전을 위한 정기적인 휴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노동세계에서 관행화된 ‘정년’은 마땅히 늦춰지거나, 다른 의미에서 유연화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유연한 노동 리듬, 더 오래 노동할 권리 확보는 문제 해결의 요체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주도에 의해 이러한 것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요건이 충족될 때 자본이 추진하는 노동비용 감축 목적의 노동유연화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연금개혁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인구노령화이다. 수십년 후 인구구조 변화는 예측대로 진행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안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인구노령화 전망을 부인하거나, 연금제도에 대한 그 영향을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노령화가 정부와 자본의 공적노후소득보장제도 감축 시도를 그대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공포심이 현상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사회적 상상력의 여지를 압박하는 것, 그럼으로써 대안 창출의 기반을 협애화시키는 것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연금개혁 논의가 노령화 논리에 밀려, 자본이 제공하는 선택지에 맞추어 허겁지겁 진행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덧붙이는 말

주은선 님은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 연수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