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정부 탓에 홍콩 바닷물에 몸 던지는 농민들"

홍콩 각료회의, '총성 없는 전쟁'에 내몰린 한국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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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4일 스위스 제네바의 가트(GATT) 본부에서 할복 자결을 시도했던 이경해 열사는 귀국 직후 기자들에게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은 그야말로 각국의 경제적 권익 수호를 위한 '총성없는 전쟁'이다"고 말했다. 농축산물의 '예외없는 관세화'를 통한 전면 개방을 앞둔 상황에서 위기에 놓인 우리 농업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이경해 열사는 할복자결을 시도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사는 "정부 협상 대표단은 우리 농업의 보호를 위해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13년 후인 2003년 9월 10일(한국시각 11일 새벽),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는 "WTO가 농민들을 죽인다"고 외치며 다시 한 번 자결을 시도하였고 결국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쳐야만 했다. 한 달 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협상 세부원칙(모델리티)의 큰 틀에 합의를 한 상황에서, 우리 농업은 벼랑 끝에 몰리고 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열사의 자결 전날이었던 9월 9일, 당시 허상만 농림부 장관과 농민단체 대표들의 면담 자리에서, 정부 협상대표단은 "협상 대책이 없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이경해 열사의 눈 앞에는 다시 한 번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벽'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세계화에 희생된 뛰어난 농민의 삶"은 그토록 안타까운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리는 제6차 WTO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꾸려진 1,500명의 한국 농민투쟁단은, 이경해 열사가 말했던 '커다란 벽'을 다시 한 번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14일 아침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최혁 주 제네바대표부 대사의 우리 정부 기조연설문을 둘러싼 '해프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의 여당 간사인 조일현 의원까지 "농민들이 WTO 무산을 외치는 것은 물이 없는 데에다 배를 띄우는 격"이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농민이 아니다. 농민들은 피할 수 없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남고, 경쟁할 수 있는 농업인으로 탈바꿈하고자 다부진 각오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고집스러운 소신(?)은, 우리 농업의 비참한 현실과 WTO 체제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원정 투쟁단까지 꾸려야 했던 절박한 농민들의 처지를 우롱하는 처사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 나아가 조 의원 스스로가 "정부 대표단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왔다"고 하였는데, 이같은 돌출 발언은 힘겨운 DDA 농업협상 대응 활동에 도대체 도움이라도 될 것인가?

"공산품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농업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정부 관료와 일부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2005년 12월 홍콩 WTO 각료회의장 주변에서까지 변함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100여명이 넘는 농민들이 "Down, Down, WTO"를 외치며 해상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도, 땅 위에서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상여를 불태우며 투쟁 속에서 절규하고 있을 때도, 풍전등화의 지경에 놓인 농업 농촌 농민의 현실은 어디 간데없고 단지 '한국 투쟁단의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는 보도뿐이었다.

농민단체들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하여 14일의 기조연설을 진행했지만, 11월 23일 쌀 협상 국회비준 이후 기댈 곳도 없는 350만 농민들은 이제 어떻게 하소연하고 자신의 생존권을 지켜야만 할지, 14일 홍콩에서 들려온 해프닝 소식은 농민들의 가슴을 착잡하게 할 따름이었다.

2003년 3월, 이경해 열사가 WTO 사무국에 보낸 항의 서한 "이제는 진실을 말하라. WTO에서 농업을 제외하라" 중에서 한 구절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우리의 요구는 외교적 수사와 함께 일축되었고, 우리의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는 우리 앞에 선 '커다란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나는 순간, 우리 동료 농민들의 한국, 길거리에서 집단 농성하고 있는 환상을 보았고, 무의식적으로 칼(아마 스위스 군용칼)이 들려진 내 손이 내배를 긋고 말았다. 아무튼 이러한 나의 자극적이고 조절불능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국은 또 다시 허구에 찬 WTO 협상, 농민의 고통과 경고에 귀를 틀어막은 전과 똑같은 상황을 보고 있으니 내가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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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6일, 파스칼 라미 사무총장의 협상 세부원칙(모델리티) 초안이 담긴 각료선언문 초안이 발표되었다. 물론 이번 홍콩 각료회의를 통해, 완전한 형태로 합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내년 3월 혹은 4월중에 제네바에서 특별 각료회의를 열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제안을 내놓기도 할 정도로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세부원칙 초안에는 미합의 쟁점들은 그대로 쓰고, 의견 차이가 좁혀진 쟁점들은 얼마나 접근했는지에 대해서만 단순하게 제시하는 수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2003년 9월의 칸쿤 각료회의 때보다는 조금은 여유 있는 상황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수치만으로도 우리 농업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관세상한을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브라질 등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고, 농산물의 관세를 4개 구간으로 나눠 큰 폭으로 감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제기하고 있는 민감품목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전체 농산물의 15% 정도로 해야 한다고 제시하였으나 이마저도 1% 이내로 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개도국 특별긴급수입제한조치(SSM)의 도입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미온적인 상황이다. 국내보조 정책에 있어서도 무역왜곡보조와 AMS를 대폭 감축해야 한다는 내용이 다수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의 조짐도 엿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나 유럽연합 등의 선진국들에 짓눌려 있던 개발도상국들과 최빈국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14일과 15일의 회의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은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등이 자국 시장 개방에는 소극적이면서 개도국들에게만 일방적으로 무역 자유화를 강요하고 있다고 성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홍콩 각료회의에서 서아프리카 면화 생산국들이 미국에 농민들에 대한 면화 보조금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미국이 오히려 유럽연합(EU)의 농산물 관세 인하 거부 움직임과 면화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시장 접근을 사실상 거부하면서, 최빈 개도국들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랴부랴 미국의 롭 포트먼 무역대표부 대표가 15일, 서아프리카 빈국들에서 수입되는 면화에 대한 수입 관세를 면제해 줄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히면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일부에서는 "이번 회의의 신뢰성이 벼랑 끝에 떨어졌다"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홍콩 각료회의의 전망은 매우 불투명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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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어려운 DDA 농업협상 내용과 동향은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지금 당장에는, 절박한 우리 농업의 현실을 바라볼 때, 2년 전 이경해 열사의 자결 당시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라서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옴직하다. 홍콩 시민들은 한국 농민투쟁단의 일사불란하고 호소력 있는 평화 시위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보도도 종종 들리고 있다.

그러나 답답하고 슬픈 일들이 너무나 많다. 서울 청와대 앞에서는 엄동설한 속에서 전용철 농민의 사인을 규명하고 경찰 책임자 처벌과 서울 1기동대의 해체를 촉구하는 농민단체·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의 노숙 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농업인의 날이었던 11월 11일부터 정용품, 오추옥, 한상민 농민이 비참한 농업 현실을 비관하여 잇달아 음독 자결하였다.

12월에 들어서도 벌써 전남 나주와 영암에서 두 명의 농민이 음독 자결했다는 소식이 날아오고 있을 따름이다.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이 불어나는 농가부채, 생산을 위한 터전인 비닐하우스와 축사를 하룻밤 사이에 내린 폭설로 다 잃어버리고서도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하고 도움받을 수 없는 기막힌 농업 현실이 이들 농민들을 극단적인 죽음의 길로 내몰고 만 것이다.

가을철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고 내년 농사의 준비에 여념이 없어야 할 농민들이 투쟁단을 만들어 이역만리 홍콩에까지 날아가서 투쟁을 해야 하는 현실이다. 상여를 앞세워 농업 붕괴의 처참한 현실을 알려야 하고,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고 3보 1배까지 해서라도 농민생존권을 지켜야만 하는 기막힌 현실이, 21세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농업과 농민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어느 분의 블로그에 우연찮게 들어갈 수 있었다. "스위스 정부는 3마리의 소에 스위스 학교 학생 한 명 만큼의 지원을 하고 있다. 스위스의 농업지원 보조금 총액은 스위스의 방위비와 거의 비슷하다"는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독일의 농민들은 양배추 농사를 포기해도 담담하게 갈아엎기만 할 뿐, 버스를 대절하여 대도시에 올라와서 데모를 하러 갈 이유가 없다"는 내용도 읽었다. "대책없는 정부를 둔 한국 농민들만 홍콩에 가서 바닷물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필자는 글을 끝맺고 있었다.

우리 농민들은 다른 농업선진국처럼 당장에 커다란 보조금이나 혜택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 아니다. 온 몸을 던져 피눈물로 투쟁해야 하는 한국 농민들, 무릎 살이 시뻘겋게 벗겨지고 면장갑에 큰 구멍이 날 정도로 힘겹게 3보 1배를 통해서라도 절절히 호소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농민들의 목숨을 대가로 해야만, 무분별한 농업 개방과 일방적인 구조조정 농정이 끝나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인가? 농민들은 다시 한 번 메아리조차 없는 질문을 물을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말

한민수 님은 (사)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 차장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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