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농민에게는 대한민국 시민'권'이 없다

시민권 및 국가권력(활용)에 대한 초발적 단상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봄시롱 드는 생각들. 시민권과 국가권력(활용)에 대해 어떻게 다시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다르고 다양하지만 보다 강력하게 교섭해야 할 것인가.

맑스가 말한 대로,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의 독점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산수단의 독점을 통해서 지배위치를 확고히 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권력이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남성)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국가권력 타도만을 외칠 수도 없거니와, 우리 시대 그런 주장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잠시 딴소리 : 사후적으로 삐딱하게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의 탄생 비밀 중 하나는, 알고보면 부르주아 핵심 세력에게 '간택'당하고 자팠던 자칭 '개혁'신데렐라들이 '개(만도 못한)혁(신)'세력의 '수권'능력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며칠 전에 심상정 의원이 진보정치연구소 송년토론회에서"'비판에서 비전으로"를 주문한 것은 보다 구체적이고 파워풀하게 현실화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견인'해낼 다양한 이데올로기들과 레토릭, 전략과 전술, 다양한 실험이 지금 여기서 가동되어야 한다.)

여성과 '소수'주체들의 관점에서 국가의 문제를 다시금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50년간의 '냉전' '반공'시대를 지나 '국익'이 국시가 된 이 시대. 이와 동시에 모든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움직임들이 국가(와 법률)권력을 중심으로 혹은 국가권력에 호소함으로써 (잠정적) 해결점을 찾으려 하는 것을 어찌 봐야 하는가? 오늘날 국가(권력)은 진보와 보수, 그 모든 사회세력들의 중심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진보 블로거의 표현대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폭력과 이에 제동을 걸기 위한 사회 집단들의 온당한 압력행사 사이에 오가는 교섭작용들은 소위 '보편적 인권'에 앞서, 한 국가내의 '시민'(으로서 인)권'이라는 복잡한 매듭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올해 있었던 몇 가지만 들어보자면, 1) 신행정수도에 대한 '관습헌법'운운함시롱 '위헌'판결을 내렸던 사법부, 2) 금품 살포한 의원들은 계류시키고 지역주민들에게 정치적 의견을 표시했다는 이유로 유독 민주노동당의 조승수 의원만을 의원직 상실시켰던 한심한 사법권력의 엉뚱한 화풀이 사건, 3) 부산에서 있었던 반아펙 투쟁에서의 폭력진압, 4) 쌀개방 관련하야 말그대로 목숨을 건 생존권 투쟁에 대한 살인진압, 5) 이번 주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WTO반대 국제 시위단 중 가장 인상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를 주도했던 한국 시위단에 대한 자국 정부의 신원보증 거부, 6) 그라고 무엇보다 빼놓치 말아야 할, 점증하는 노동의 비정규직화란 다름 아닌 노동의 여성화, 빈곤의 여성화와 직결된다는 점. 이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닌, 연구원 난자 사용 및 매매/자발적 난자 사용에 농밀하게 녹아있는 여성의 몸, 여성인권에 대한 총체적 맹안.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불행하게도, 승질나게스리, 수치스럽게도, 다시금 확인해야 하는 것은 1) 서울 시민만이 '특별한' 시민권을 누린다는 점, 2)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치'권의 시민대표는 '진정한 대표권(력)'이 없(어야 한다고 무시된)다는 점, 3) 이 점은 반아펙 투쟁 폭력 진압이 시사하는 대로, 반세계화,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자본주의의 실질적 동력인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존경받을 만한 '시민권'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과 연결된다. 4) 노동자와 더불어, 한국 현대사에서 농민은 우리를 먹여살리는 노동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말없이, 손해 강요당하면서, 생존을 위협받으면서도 담당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생존권조차도 넘들에게 좌우당하는, 그러므로 '실질적 시민권'의 범주에서 언제나 배제당하는 비체(주체여서는 안되는 자들)이라는 점. 5) 홍콩에서의 자국민 신원보증 거부 사태는 3)과 4), 즉 노동자, 농민은 국제적인 상황에서 '자국'정부의 '버림'을 받는, 실질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존재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 또하나의 가공할 사건이라는 점. 6) 여성은 언제나 '도구'로서만 유용하다는 그 혹독한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일상화.

홍콩 시위에 함께 참가했던, 농민들의 '대표'인 강기갑 민노당 의원의 신원보증 호소마저 단칼에 거절당했다는 것이 조승수 의원의 의원직 상실 사건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정치모리배들은 필요할 때마다 '국민, 국민'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국민'이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국민'이란 모든 면에서 특권을 누리는 극소수이거나, 자기들을 '지지'(해야)한다고 착각하는 착각속의 허상으로서 국민 아닌가.

인권을 보다 우선시하는 수사를 위해서 경찰권 독립을 주장함시롱 한다는 짓이 살인진압으로 농민을 두 분이나 죽여놓고서 (한 시위에서 두 사람이 죽은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마도 처음 일텐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그 뻔뻔스러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가 복잡해지고, 이해관계에 따른 집단형성도 더욱더 유동적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국가(state)의 조정권력은 역사 이래로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지점이자, 모든 이해집단들이 사활을 걸고 그 권력을 장악, (최소한은) 활용하려 한다.

지난 번 민노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송년 토론회에서 터져 나온 대로, 한국 사회 위기 10대 주범 중에 '민주노총'이 10등으로 '등극'하게 된 바가 시사하듯, 이제 소위 '좌파'내부에서도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이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지금 여기 한국 사회의 노조운동=진보정치의 등식이 깨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화를 내고 손가락질하기보다는 하나의 현실인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에게 더 나을 것 같다.

즉, 이러한 현실 인식에 기반하여, 보다 신중한 자기비판과 더불어 보다 실질적이고 해방적인 비전을 벼리어 냄시롱, 보다 강화되고 보다 새로워진 '진보'정치의 상을 그려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다양한 전략들을 짜내는 쪽으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여, 시민(으로서 인)권과 그 인권을 보다 해방적이고 민주적으로 지키고 확장시켜 나가기 위한 국가권력(활용)의 문제를 보다 진지하고, 현실/실천-이론 정합적으로 상상, 사유해낼 필요가 절박하다.

국가(와/의 법률적) 장치는, 문화적 가치들과 규범들이라는 법률-외적 네트워크에 근거를 마련함으로써만, 효능과 합법성을 얻는다. 법률적/국가 장치와 법률-외적 문화장치(알고보면 열라 자본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가치들과 규범들)의 이러한 의존은 양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문화적 형식/장치들에 의존하는 국가의 법률적 차원이 국가 자체의 헤게모니에 맞서도록 어떻게 동원될 수 있을까? 여기서, 특수하게는 '진보'정당으로서 민노당의 현재(와 미래) 역할과, 일반적으로 '진보'정치(세력)의 동력, 방향, 역할은 무엇일까?

덧붙여, 문화와 시민 사회의 층위에서 복수적인(multiple) 형식들의 가능성을 증강시키는, 국가-중심적이지 않은 공공의 채널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미디어문화행동>을 위시한 진보매체 및 언론이 가고 있는, 한겨레시렵지 않고 딴지시렵지 않고 오마이시렵지 않고 서프시렵지 않은 길에, 보다 '과격한'(empowering) 상상력이라는 동력을 단다면 다양한 채널들을 그려내고 구체화 할 수 있을듯도 한데...). 아니면, 최소한 우리 시대의 국가권력에 보다 힘있게 개입, 변혁하기 위해서 우리 시대 국가(state)를 보다 정합적으로 설명하는 틀이 필요하다.

초발적 문제제기나마 마지막으로 최소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잪다. 민노당 국회 진출 이후 우리가 계속 '목도'하고 있는 바대로, '진보' 사회세력 및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가장 엄격하고 가장 비판적이고 가장 준열한 '압력'의 형식을 띤다는 점을. 그라고, 페미니즘적 차원 그라고 소수주체들이 제기하는 아젠다를 담보하지 못하는 운동은, 살아남아 발전할 가능성(viability)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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