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인권위의 병역거부 인정 결정을 접하고

2004년 5월 따뜻한 날이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소식. 남부지법의 한 판사가 병역거부로 재판중인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예정이라고 했다.

재판 방청석은 예상대로 만원. 어차피 결론이 이미 보도자료로 배포되었지만, ‘무죄!’라고 판사의 입이 움직이는 순간은 세상이 멈추고 움직이는 건 판사의 두 입술이었고 내게서 작동하는 감각은 쫑긋 세운 귀뿐이었다.

그날 밤, 병역거부자들과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전쟁없는세상' 사무실로 모여서 밤을 지새우며 얼굴에 오월만큼이나 아름답고 슬픈 내면의 웃음을 띄었다. 우리는 아직 병역거부가 인정된 것은 아니며, 어차피 검사가 항소하면 다시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법부가 최초로 병역거부에 대해서 인정했다는 것에 우리는 너무도 기뻤다. 그리고 그 판결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범위에서 불쑥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 황당함마저 기쁜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일 년 하고도 반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병역거부자들은 여전히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고 있다. 우리의 예상대로 일 년 반 전의 무죄 판결은 곧 이은 대법원의 판결에서 유죄로 확정되었고, 헌법재판소도 현행병역법이 헌법의 양심에 자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그러면서도 대체복무 입법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할 필요도 힘이 빠질 필요도 없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이제 사법부에서의 논란을 거쳐 국회로 공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입법은 지지부진했다. 2004년 9월과 11월에 각각 임종인 의원과 노회찬 의원의 대표발의로 ‘병역법중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지만, 법안에 대한 논의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공청회가 이루어지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이 있었지만, 국회가 개원될 시기면 어김없이 국회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또한 국가보안법 등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굵직굵직한 사안들에 묻혀서 병역거부 이야기는 비집고 나올 틈이 없었다. 원래 쉽게 입법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안이 발의된 상태에서 그다지 진전이 없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에 재판이 연기되었던 병역거부자들이 재판이 속개되면서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 할 사람은 줄어들고 할 일만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되면서 언론은 병역거부 문제에 관심이 떠나가게 되었다.

2005년 상반기에 빨간신호등캠페인, 병역거부역사 자료전,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등 거대한 행사들을 여러 차례 했지만 언론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다. 물론 우리의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2005년도 9월로 접어들고 심리적으로도 절반을 넘어가고 나서야, 인권위원회는 병역거부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국가인권위가 생기고 병역거부가 두 번째로 접수된 진정이라고 하니, 너무 오랫동안 인권위는 침묵했던 것이고 우리들은 기다렸던 것이다.

여름의 말미부터 이야기만 들리던 인권위원회의 청문회가 10월 19일에 잡혔다. 우리는 그날에 맞춰서 10달에 입영을 거부한 두 병역거부자들의 공개적인 선언 기자회견을 기획했다. 오정록, 고동주를 시작으로 12월 1일에는 김태훈, 김영진, 이용석 세 사람이 공개적인 선언을 했다.

또 공개적인 선언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병역거부를 하고 우리에게 연락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천주교 신자인 고동주의 병역거부와 한동안 잠잠하던 병역거부선언이 이어지면서 사회는 다시 이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인권위원회가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취지의 권고문을 낼 것이라는 예측들이 흘러나오면서 관심은 더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두 차례 예정된 발표를 연기하며, 12월 26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권고문을 국회와 국방부에 제출하였다. 국가기관으로서는 최초로 병역거부에 대한 찬성의 입장을 발표한 것이었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몇몇에게만. 보수적인 언론들은 일제히 인권위원회의 입장에 반박하는 사설과 그런 뉘앙스를 심하게 풍기는 기사를 내놓았고, 한기총과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보수단체들도 나라가 거꾸로 간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나라당은 인권위가 엉터리같은 결정을 내렸다며, 병역거부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결정이 아니었다. 이 문제가 진정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도 대체복무입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국회에서 이미 발의가 되어서 지지부진하게나마 입법이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많은 부담을 던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은 너무도 늦은 것이었고, 내용 또한 늦은만큼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징병제가 인류역사와 괘를 같이하고 절대적인 제도라고 믿고 있으며 국가안보가 머릿수로 채워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자신들이 믿고있는 근본이 흔들리는 결정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늦었지만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국회의 짐을 한 층 덜어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국민의 절반이 넘는 수가 반대하고 있고, 국회의 제일 야당인 한나라당이 결사반대 하고 있다. 아직 병역거부운동은 시작일지도 모르고, 대체복무입법은 절반쯤 지났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몇 년 간의 경험과 병역거부자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의 평화는 아주 더디고 천천히 온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평화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평화는 아주 천천히 오고 또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대체복무가 하루빨리 도입돼 많은 젊은이들의 인권이 침해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우리의 평화를 향한 발걸음은 서로를 재촉하지 않는다. 우리의 평화는 도착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는 완성된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어떤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덧붙이는 말

이용석 님은 전쟁없는세상에서 일하고 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용석(전쟁없는세상)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