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없지만 행복해

[기고] 마야의 나라, 과테말라 '지구의 벗'을 만나

한국에 계신 활동가 여러분 그리고 각 단위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안녕하십니까, 저 김춘이입니다. 모든 분들 다 즐겁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휴가 새해휴가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여기는 오늘부터 2학기 시작입니다. 한국은 한창 방학을 즐기고 있을텐데 여기는 한 20일간의 짧은 방학이 금새 끝났습니다. 저는 12월 20일부터 26일까지 미국의 아칸소에 있다가 28일부터 1월 8일까지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의 마야 어린이들. 이들은 말 그대로 천국의 아이들이었다.

1. 건강 - 지방이 분해되는 소리에 만세를 부르다.

건강, 여기 미국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맑은 공기. 그를 최대한 즐기기로 하고 어느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1시간 가량 달리기를 하고 날씨가 추워지자 예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습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매일 하다보니 거의 중독 증세를 보이더군요. 운동을 하고 저녁에 있다보면 지방이 분해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때마다 만만세를 몇차례나 불렀드랬습니다. 그래서 침대에서 넘어지고 등등.

지금은 다시 운동전의 상태로 돌아갔고 더 체중이 늘었습니다. 제가 20일을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또 남미의 음식을 너무 즐겼기로.

2. 여행계획 – 라틴아메리카 환경운동을 보기 위해

겨울방학이 되면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미국에 올 때 미국-남미 비용이 한국-남미 비용의 3분의 1정도에도 못 미치니 미국에 있는 동안 최대한 라틴 운동단체를 많이 방문해보기로 마음먹었더랬습니다.

온두라스는 바나나 공화국으로 유명해서 그 실상을 직접 보고 싶었고 또한 지구의 벗 온두라스 의장님 후안 씨를 마음 깊이 존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엘살바도르는 리카르도 나바로 지구의 벗 전 의장님이 계시기에 가면 지구의 벗 엘살바도르 활동을 면밀히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지구의 벗 온두라스 후안 의장님으로부터는 메일 답장이 없어서 온두라스행을 포기하고 예일 서점엘 갔습니다. 라틴 관련 책 중에서 중남미에서 꼭 가봐야 할 곳 16곳이 있었는데 그 많은 국가 중 네 곳이 과테말라더군요. 그래서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이 나라를 가기로 순간 결정했습니다. 더구나 엘살바도르와 국경연결이 되어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대안도 없다 싶었습니다.
  과테말라 파카야 활화산 현장. 이 구멍에서 연방 연기가 새어나오고 주변의 바위는 뜨끈뜨끈. 황성분으로 인해 오랫동안 활화산 현장에 있기가 힘들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저는 언어도 안 되면서 물 설고 낯 설은 남미를 간다니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학업동료들이 부러움 반, 걱정 반 하더군요. 눈만 내리는 뉴헤븐에서 20일을 보내는 것이 인생에서 참으로 아까울 것 같아서 아무튼 온 인터넷을 뒤져 싼 티켓을 구했습니다.

2-1. 과테말라

조지아 애틀란타 공항에서 1박하고 아시아를 그리워하다

조지아 애틀란타 공항에서 과테말라행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저는 12월 28일밤을 그냥 공항에서 묵었습니다. 공항에서 혼자 숙박한 경험이 이번까지 합치면 한 네 번 정도 되는데 “어휴 나이 사십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까지 공항에서 자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냥 그 기쁨도 최대한 즐기기로 했습니다.

과테말라행 비행기가 12월 29일 오전 11시였는데 제 게이트로 가다보니 일본 토쿄행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를 보니 동아시아가 그립더군요. 그래서 그곳에 내내 앉아 있다가 제 비행기를 탔습니다.

과테말라 공항에 내려서 이민국에 들어서니 그냥 마치 내 집에 온 것처럼 긴장이 풀리고 가슴이 따뜻해지더군요. 확실히 미국에 있을 때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또 공항 검사관들은 얼마나 친철한지……

스페인어를 못 한다고 하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줄 거라며 겁내지 말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캄보디아를 무척 좋아하는데 도착한 순간부터 캄보디아와 동급으로 좋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테말라 파카야 활화산을 가기 전. 맨 앞에 있는 화산이 파카야 화산이다. 산 아래, 산귀툴에 마을을 형성한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와 같다.

돈은 없어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마야의 나라, 과테말라

인구의 60%가 마야인 나라, 과테말라. 거리 거리에는 마야인들이 울긋불긋 그들의 전통옷을 입고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지형은 또 왜 그렇게도 한국과 비슷한지, 아 정말 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산아래 움푹 도시를 건설한 모양이나 산 귀툴귀툴에 마을이며 촌락을 이루어사는 마야인들의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세탁기가 없으니 마야 여자 어린이들은 모두 손빨래를 하고 가스나 전기가 여의치 않으니 모든 에너지는 산에서 덤불에서 구해 온 나뭇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운송수단이 없으니 모든 것은 머리에 이고 다닙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만한 유모차도 없으니 모두 업고 다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어렸을 때의 풍경 그대로였습니다. 저희도 전기가 안 들어오니 촛불과 호롱불로 생활했고, 가스가 없으니 산에서 나무를 해다 음식과 히팅을 했더랬죠. 자기들끼리 놀다가도 버스가 지나갈라치면 거리거리에서 손을 흔드는 마야 어린이들을 보고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했습니다.

거리에는 구두닦이 아이들이 버짐퍼진 얼굴로 손님을 기다리다 지쳐 낡아빠진 자기 운동화에 구두약을 묻히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배시시 웃는 표정. 제가 낳지 않아도 이 세상에 사랑할 아이들이 너무 많음을 알았습니다.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한 필자. 너무 맑고 천진한 눈빛에 반해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그들은 두려움 반, 기쁨반. 그러다가 우리는 이내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한국 음식 생각이 너무 안 나 오히려 한국 음식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다.

음식하면 제가 참 힘든 사람인데 과테말라에 있는 동안 한국 음식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엘살바도르에서도.

매일 저녁을 가이드책을 보며 내일은 뭘 먹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여행 중 한국 음식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싶었습니다. 음식의 천국, 태국에서도 김치 생각은 났었는데 말이죠.

정말 맛있더군요. 그래서 보통 5끼니를 먹고 지냈습니다. 지나가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그 구수함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은 보통 한끼에 2-3달러. 잠은 하루 3-4달러 수준에서 해결했습니다. 그래도 깨끗하고 좋았습니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호떡 같은 것에 야채며 붉은 콩이며 닭이며를 소스와 함께 넣고 싸서 먹는데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여행중 한국에서 미국으로 1살 때 입양된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은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도 아닌 본인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도 했지만 미국사회에서 아시안-아메리칸의 문화를 일구어나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더군요. 팔 문신에는 대한민국 지도가 분명히 새겨져 있었구요. 그래서 저도 '조국'이란 것에 잠시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거리에서 만난 17세의 마야인 안토니오는 7살때부터 10년간 거리에서 목걸이를 파는 청년입니다. 학교 문턱이라곤 구경도 해 본적 없는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모두 거리에서 배웠답니다. 물건을 팔면서---.

그는 “마야인들은 여자 15, 남자 17세에 결혼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 시기에 아이를 갖는 건 아이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난 27세쯤에 결혼하고 싶고 그 전에 공부를 하고 싶다. 그래서 마야문화를 훌륭하게 소개하는 투어가이드가 되고 싶다” 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제가 감동해서 평생 사본 적이 없는 목걸이를 처음으로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에 2달러하는. 그것도 두 개나. 옥석을 구분 못 하는지라 그것이 진짜 옥(jade)인지 돌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토니오는 진짜 옥이라고 하더군요. 옥이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

무리한 일정, 모두가 계획 변경을 요구하다. 그리고 마야정글에서 발견한 닭도리탕

거리에서 만난 여행객들이 모두 저의 일정을 듣고 (거의 모두가 미국인들) 스페인어도 하나도 안되면서 8일동안 엘살바도르 일정까지 소화하는 건 무리라고 모두가 말리더군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간 버스 구간 도로가 얼마나 안 좋은 줄 아냐, 스페인어가 안 되면서 여자가 홀로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등등. 그래서 혼란스럽긴 했지만 혼란스러울 때는 처음으로 간다 라는 저의 원칙 때문에 들어오는 갖가지 정보를 차단하고 원래 계획대로 했습니다.

저는 “위험은 어디나 도사리고 있고(안전하다고 유명한 서울이든 도쿄든), 내가 조심하면 되고, 기본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시민은 친절하다”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과테말라도 엘살바도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두 나라 모두 가게가게마다 총들고 선 경비원들이 있어서 우리와는 다른 양상이긴 합니다. 주로 혼자 과테말라의 치킨버스를 타고 다녔고 나름대로 가격이 있는 왕복 16시간 버스 티켓(3만 원)과 왕복 10시간 과테말라-엘살바도르간 버스티켓(4만5천 원)을 콰테말라 출신 예일 친구가 표를 구해두면 그를 타고 저 혼자 이동하였습니다.

좌석제 버스(짐이 모두 잘 보관됩니다)에서 제가 하도 곤히 자서 버스 운전하시는 분은 모든 손님들이 내린 뒤에도 저를 깨우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일어나니 버스에 아무 손님도 없고 저만 있었는데 저는 10분 더 잤답니다.

좌석제가 아닌 일반 치킨버스에서는 타고 내리는 마야인들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마야인들의 남자 최장신은 160센치미터 여자 최장신은 140cm입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답더군요. 갈 때 스페인어를 하나도 준비않고 간 관계로 과테말라 현지 식당에 가서 영어가 되는 주인한테 숫자 세기를 부탁하여 그것을 가지고 모든 가격을 흥정하였습니다. 하여간 모든 사람들은 친절했고 제가 뭐 그렇게 있어보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사람처럼 보여서인지 아무도 저 물건을 가져가려고 한 시도는 없었습니다. 저도 그냥 백팩 딱 하나만 가지고 여행을 다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마야유적지 티칼에서 닭도리탕을 먹다.

마야 유적지 티칼에 심야버스를 타고 아침에 내렸는데 너무 배가 고프더군요. 마야 유적지인 이 정글을 다니려면 이대로는 못 다니고 무엇을 먹어야 한다 싶었는데 마야 할머니가 음식을 팔더군요. 서로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는데 먹는 시늉을 했더니 저쪽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음식은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싶어 그쪽으로 가보니 그곳은 세면실이었습니다. 제가 양치하는 곳을 물은 줄 안 모양입니다.

아 내 손짓에 문제가 있었구나 싶어 이번엔 확실히 먹는 손짓을 하였더니 마야수건으로 덮어둔 마야 전통 음식을 들추는데 와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의 닭도리탕이 마야할머니의 상보 아래 있었습니다. 캬, 정말 맛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입맛이 다셔집니다. 한국에선 없었는데 미국에서 알러지가 있는 관계로 고기먹기를 한동안 중단하고 그 방향으로 가려고 약간 생각해서 실천중이었는데 과테에 가서 다시 원래로 가버렸습니다. 여기 음식이 맞있는 관계로. 위생, 그냥 그런 것 잊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사실 그다지 비위생적이지도 않았구요. 한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참았더랬죠.
  마야유적지 티칼에서 아침에 손짓발짓 해가며 먹게 된 마야음식. 아 그런데 우리의 닭도리탕이었다 !!!! 생김이며, 맛이며 !!!!

정글을 쏘다니고 나서는 캠핑시설이 있는 곳에 샤워시설이 있어 샤워를 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군요.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름대로 상황에 맞춰 보면 왜 돈 안내고 샤워하고 있느냐인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역시나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600원. 그래서 500원으로 깎았지만 안 된다고 하여 그냥 600원 주었더랬습니다. 유적지를 떠날 때 함께 차에 탔던 여행객들은 샤워시설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해서 모두가 웃었습니다.

이곳 사람들 모두 외국인들에게 2-3배로 부릅니다. 1시간 30분짜리 셔틀버스를 1만원에 부르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4천 원인데.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2천 5백 원부터 가격 흥정을 해서 결국은 4천 원으로 맞추었습니다. 아티틀란호수에서도 보트여행을 할때도 안토니오가 흥정을 해줄때는 3천 원이었는데 제가 흥정하고 돌아나올때는 2천5백 원으로 흥정해서 나왔습니다. 하여간 비싸게 부르는데 왜 그렇게도 그게 밉지 않은지 저 스스로는 그 사람들이 높은 가격을 부를 때마다 웃음이 많이 나오더군요. 마야 여인들의 손뜨개 작품을 사진 좀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면 이 물건을 사면 사진을 찍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도 싫지도 밉지도 않더군요.

과테말라 지구의 벗 만났을까요, 못 만났을까요?

당연히 못만났습니다. 리카르도 전 의장님으로부터 영어가 되는 분의 이메일을 구해서 몇번 편지를 띄웠지만 답장을 못 받았고(저의 경험상 답변 못 주는 게 이해가 가더군요). 그래서 택시타고 1월 4일 오전에 가마 라고 마지막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래서 주로 과테말라는 환경 이슈를 중심으로 다니기보다는 마야유적지를 중심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구의 벗 과테말라 본부는 사무실이 과테말라시티(과테말라의 수도)에 있는 게 아니라 지방에 있더군요. 과테의 지도가 눈에 익을 때즘 보니 주소지는 지역이었습니다. 1월 4일 오후에 국경을 넘는 버스를 타야하기에 시간이 부족하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못 만났습니다.

2-2. 엘살바도르

밤에 과테말라-엘살바도르 국경을 넘다.

왕복 45달러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국경 버스는 마치 비행기처럼 음식도 나오고 음료도 나오고 스튜어디스도 있습니다. 국경 이민국은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도 언어가 안 된 채로 밤에 넘으니 약간 무섭긴 하더군요. 차내 방송은 모두 스페인어입니다. 스튜어디스들이 영어가 안 되는 관계로. 산살바드로에 밤 8시 30분에 도착하니 왜 도시가 그리 휘황찬란한지 정말 놀랬습니다. 12년간의 내전으로 고생한 나라가 아니더군요.

버스터미널 왼쪽에는 “수시 이토”라는 일본식당, 오른쪽에는 한자 “고궁”으로 쓰여진 중국식당이 있더군요. 리카르도 의장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반갑게 해후를 하고 역시 그분의 스타일대로 “1. 숙박은 우리집이다. 2. 아내가 4개월째 임신중이다. 3. 산살바도로 시의원에 출마한다”를 딱딱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세 번째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의장님의 역할과 위상이 너무 축소 되는 관계로. 산살바도르 시장이면 몰라도.

다음날 해가 떠서 본 산살바도르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어제 저녁 야경은 그냥 거짓말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기업이 거기 있는데 엘살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제공해 국민들로부터 원망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국민들은 일자리가 없으니 그냥 일할 수밖에. 총 인구 8백만 중 2백만은 미국에서 힘들게 일해 조국으로 보내고 나머지 6백만은 엘살바도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리카르로 나바로 전 의장님, 4개월된 딸을 두다. 그녀의 이름은 막달레나…

집에 갔더니 아내가 4개월째 임신중인 게 아니고 출생한 딸이 4개월 되었더군요. 얼마나 이쁜지 정말 또 하나의 천국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55세, 아내 나이 41세, 둘 다 초혼. 둘 다 지구의 벗 엘살바도르 활동가. 둘은 3년전 결혼했고 나바로 의장님은 5년전까지 산살바도르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셨답니다. 그는 그때까지 부모님 댁의 좁은 방 한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문화 궁전이더군요. 그는 쓰레기로 완전 덮힌 폐가를 5년전 사서 재건축을 직접 하고 나무를 직접 심고 하여서 지금의 이 집을 일구었답니다. 그리고 각국 방문시마다 하나씩 사 모은 조각품들이며 벽걸이들이 온 집안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벗 엘살바도르를 만들고 지구의 벗 국제본부 의장(2000-2003)을 역임한 리카르도 나바로씨와 2005년 8월에 태어난 그의 딸, 막달레나.

왜 결혼이 늦었느냐고 했더니 너무 바빠서 결혼할 틈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아내 실비아는 그의 바로 밑에서 11년간 일했는데 우리로 치면 사무총장 격입니다. 그도 아내 앞에선 꼼짝 못하더군요. 거의 모든 부엌일은 그가 합니다. 시장을 보는 것도 그가 합니다. 모든 과일은 그의 직접 심은 집앞 나무에서 온 바나나, 레몬, 만다린, 파인애플입니다. 그는 도시락을 싸고 출근합니다. 출근해서 그가 맨처음 하는 일은 출근 기록부 작성, 그리고 신문 점검.

먹는 것을 상당히 즐기는 그는 각종 회의 때도 둥그렇게 나온 그의 배를 툭툭치며 “김치, 언제가 점심 때야, 언제가 저녁이야?” 를 곧잘 묻곤 하는데 지구의 벗 엘살바도르 스탭들은 모두 그의 흉내를 내더군요. 우리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스탭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습니다. 과테행 국경버스를 1월 7일 새벽 6시에 타야하는데 그 전날 내내 광풍이 몰아닥치더군요. 그래서 버스가 제대로 이동이나 할수 있을 지 걱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바람이 불어대던지 태평양이 원망스럽더군요. 다행이 버스가 떠날 때는 조용했습니다.

엘살바도르는 태평양을 끼고 있는데 지구의 벗 엘살바도르 친구들과 태평양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여기서 배타고 쭈욱가면 일본이 나오고 한국이 나오겠다 싶으니 한층 더 엘살바도르와 한국이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도시계획을 하는 사람들이 산살바드로나 과테말라 시티를 보면 정말 연구가치가 많을 것 같았습니다.

집들이 모두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관계로 저 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지진이나 허리케인이 오면 대책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돈이 없으니 이주대책을 세울수도 없고. 그렇다고 콘크리트로 집을 짓는 것도 아니고 모두 나무로 얼기설기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벽과 천정과 지붕을 만드는 관계로 ---.
  엘살바도르 태평양연안의 주민 가옥들. 허리케인이 오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수 밖에 없다. 한편, 우리는 그들에 비해 너무 갖지 않았는가?

지구의 벗의 두 거두, 리카르도 나바로(지구의 벗 엘살바도르), 후안(지구의 벗 온두라스)

리카르도 의장님이 산살바도르 시 의원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한 스탭들의 공통의 의견은 우리 표현으로 치면 너무 아깝다였습니다. 저는 사실 그가 엘살바도르의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미국과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엘살바도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고(미국에서 공부하였기로), 이론적으로 행동으로 그만큼 잘 조화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는 교수였다가 운동가가 되었는데 운동가가 된 이유는 좀더 현장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답니다. 라틴은 거의 미국과의 역학관계에서 나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정말 슬펐습니다. 물론 어디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지구의 벗 온두라스의 후안 의장님도 이번 온두라스 대통령선거에서 시민의 요구로 대통령 후보 나섰다가 선거에서 졌답니다. 그분은 의사이신데 캘리포니아 UCLA에서 공부하셨고 온두라스 국립대학 총장까지 지내셨습니다. 어느날 우물에 농민들을 넣고 지주들이 폭약을 터뜨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완전 운동가로 변하신 분입니다. 빈곤과 열악한 인권의 현장에서 환경운동, 인권운동, 빈곤퇴치운동을 동시에 하는 이들, 마치 우리 운동 초기 멤버들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한층 오늘의 저를 있게 한 한국 NGO에 감사함과 함께 그들의 노고에 눈물이 절로 배였습니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엘살바도르 화폐 콜론

엘살바도르 지구의 벗 친구를 만나 돈을 바꾸러 은행엘 같이 가자고 했더니 은행갈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본국 화폐가 있는 가운데 상인들이 달러도 취급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4년 전 현 부시대통령이 엘살바도르를 방문했을 때 당시 엘살바도르의 대통령이 부시 방문기념 선물로 뭘줄까 하는 대화를 하다가 화폐를 달러로 하면 그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다 싶어서 일부 고위직만 이를 은밀히 알고 화폐변경을 추구했답니다.

그래서 어느날 홍두깨격으로 화폐가 콜론에서 달러로 바뀌었답니다. 리카르도 의장님은 이를 굉장히 이야기 하기를 싫어하더군요. 그냥 저항 한 번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엘살바로드는 좀 더 슬펐습니다. 과테는 마야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엘살바로드는 전통 물건을 사자고 해도 딱히 살게 없더군요. 원주민들을 너무 많이 죽인터라 원주민의 문화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운동가들은 그들 조국의 정체성확립을 위해 더욱 분주히 노력하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땅덩이가 무지 작아 중국과 일본사이에 끼여 마치 가지 않아도 될 나라로 국제사회에서 쉽게 인식당하는 것이 우리 나라와 비슷하게 느껴져서 참으로 정이 더 갔습니다. 또한 주변국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땅덩이도, 자원이 별로 없는 것도 우리랑 너무 흡사했습니다.
  톨루카 지역주민들과 함께 엘살바도르 지구의 벗이 보호운동을 펼치고 있는 바다거북이 새끼. 이들은 해파리를 먹고 사는데 사람들이 버리는 비닐봉투를 해파리로 오해하여 먹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다시 미국에 오다

낮에 엘살바로드와 과테말라 국경을 넘는데 양국가의 색깔을 비교해보니 과테말라가 엘살바로드보다 좀 더 밝았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체성때문인 듯 했습니다. 마야라는 정체성 때문에 같은 시간대에 과테말라에는 관광객이 지천이지만 엘살바로드는 그렇지가 않았거든요. 엘살바로드 활동가들의 환경을 넘어선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정말 가슴에 많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지역주민들로부터.
  엘살바도르 지구의 벗이 팔라야 톨루카(palaya toluca) 지역주민과 함께 벌이고 있는 유기농 화장실 보급 활동. 커튼 쳐진 곳이 화장실이다.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들은 유기농화장실과 유기농 과실재배를 보급하고 있었고 지역주민들은 한결같이 없지만 밝았습니다. 손에 쥔 달러는 없어도요. 우리가 한창 가난할 때 우리는 환경에 대한 고민 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몸으로 직접. 그래서 고맙고 눈물겨웠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가졌더군요…..

미국에 오니 역시 공항 관계자들의 무뚝뚝하고 위압적인 태도가 과테말라 공항직원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에서 뭔가를 사려는데 모든 돈이 과테말라 물가 기준으로 환산이 되어 물건 사기가 어렵더군요.

그리고 다시 운동을 즐기는 삶으로 그리고 매일매일을 영어와 싸워야 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방이 분해되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어 그 점이 기쁘긴 합니다. 그런데 영 고추장과 김치가 안 먹힙니다. 비빔밥을 먹는데 도저히 매워서 먹을 수가 없고 김치 생각이 영 안납니다. 제 생각으로 20일의 방학기간 중 딱 한 번 김치를 먹은 것 같고 그나마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에서는 김치를 먹어본 적이 없고 생각이 나 본 적이 없는데 그들 음식이 지금 눈앞에서 어른어른합니다. 도착해서 여지껏 김치없이 살고 있는데 김치 없어도 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또 한 번 먹으면 그래 이맛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도 이러긴 처음입니다.

자세한 단체들의 활동 이야기는 환경연합 홈페이지를 통해서 공개하겠습니다. 제가 크리스마스며 새해 인사를 못 드렸던 이유는 모두 이러한 일정 때문이었습니다. 각 단위에서 열심히 일하시고 활동하시는 이 리스트의 모든 분들, 2006년 새해에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들께도요. 올해가 무슨 띠인지가 생각이 안 나네요. 저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곳에서.


뉴헤븐에서 김춘이 드림
덧붙이는 말

김춘이 님은 환경운동연합 국제연대팀장으로, 참세상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를 여행하며 지인과 참세상 독자에게 소식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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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남미, 글을 읽어보니 정말 꼭 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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