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화와 문화 사이

[너부리의 행.페이야기] 생리공결제 도입 논쟁이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들

3월부터 도입되는 생리공결제를 두고 말들이 많다. 사회적인 사안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다른 목소리들과 이견들이 소위 공론의 장에서 더 많이 경합될수록 좋다.

우선, 생리공결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에서 문제는 이 문제 역시 찬성이냐 반대로냐만 쪼개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우석사건과는 다르게, 이 문제의 경우 인터넷 상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더 시끄럽다.

인터넷 상의 댓글 논쟁이나 블로그 의견들을 "편갈라" 보자면 많은 부분이 전교조의 입장과 평등연대의 입장 사이를 오간다. 전교조는 생리공결제를 환영하면서도 보다 구체적인 제도보완을 촉구했다. 평등연대는 제스쳐 상으로는 생리공결제를 환영하는 척 하면서, 생리결석중 성적 인정이 "비교육적"이며 "역차별인" 제도라 하여 실질적으로 반대한다. 평등 연대의 역차별 운운에 대해, 전교조 여성위원회는 생리결석인정이 역차별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장애인 우대 정책이 역차별이냐"라고 비유했다가 말꼬투리를 잡히고 말았다.

생리공결제를 둘러싼 논쟁도 물론 그 핵심에는 권력구조가 있다. 남녀간의 불평등한 권력구조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제기되고 아주 천천하고도 조금씩이나마 보다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목소리들이 나오자, 그와 더불어 "가진 자"들의 잘못된 피해의식도 함께 자랐다. 물론 젠더권력상 가진자들인 남성들을 계급문제와 연결시켜 보자면 이들의 역피해의식도 이해못할 것은 아니지만, 역차별이니 역불평등 운운은 왜 유독 여자들이 무슨 권리를 주장했을 때만 그리 강력하게 쓰인단 말인가? 역차별이니 역평등이니 하는 것들 알고보면 이미 있는 자들, 누려온 자들이 ("평등"의 미명하에) 더 갖겠다고, 더 누리겠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논리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에서도 보이는, 평등 연대식의 논리에는 '생리를 하는 여학생들은 성적을 위해 생리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가정이 암묵적으로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믿음처럼 깔려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책 제목마따나, "남자들도 월경을 한다면" [세상이 겁나게 달라졌겠지만] 이라고 맞대응 할 수도 없으니.....) 그래서 악용의 소지가 있으므로 절대 시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용의 소지가 없는 제도가 대체 있기나 한가?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현실로 인정하면서, 유독 남녀 관계에서만 경쟁상의 평등, "정당한 경쟁"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젠더불평등을 영속화하는 강력한 논리이자 방법이다. 생리공결제 관련 성명에 나타난 평등연대의 입장을 뜯어보면, 그들이 말하는 "평등," "역차별"운운이나, "성을 악용하여 소기의 목적" 운운 하는 것은 정확하게 미국의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닮아 있고, 수법은 조지고 부시는 텍사스 출신의 머저리가 "인권"과 "민주"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방식과 너무나 비슷하다.

일상과 제도, 미시와 거시 모두를 속속들이 파고 들어 있는 문화의 면에서 보자면, 생리공결제는 국가가 문화보다 빨리 "급진적으로" 입안한 제도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문화와 우리의 의식, 무의식은 때로, 새로 도입되는 제도나 법보다 느리다.

생리공결제를 도입하면서 정말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생리공결제 찬성이냐 반대냐가 아니다. 군가산점 폐지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성인지적 문화를 생산하고 확장하기 보다는 우리 사회 군필 남성들의 역피해의식을 공공화, 집단화하는데 더 많이 기여하지 않았던가. 생리공결제를 둘러싸고도 왜 하필 "평등," "성적," "악용의 소지"등등으로 논쟁지형이 형성되는가? 황우석 사건을 둘러싸고 그 수많은 온당한 이견들이 황빠/황까로 처리되는 중에 여성의 인권은 소위 "공적인" 인식과 의식의 지평에 나오자 마자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고, 국익과 과학발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의 몸은 난자로, 오직 도구로만 환원되었으며,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라면 그깟 조작쯤이야 하는 집단 (무)의식은 과학을 종교로, 그것도 비윤리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종교로 전락시켜 버리지 않았는가.

생리공결제를 둘러싸고 우리는 "평등," "성적" "악용의 소지" 운운하는 대신에, 다시 곰곰이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부터 성인지적 문화를 안착시키고 일상화하려면 무엇들이 필요한가? 성인지적 문화와 양성평등을 확장하는데 생리공결제가 얼만큼이나 기여할 것인가? 혹은 생리공결제를 성인지적인 문화를 안착시키고 일상화하는데 얼만큼 활용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는, 생리통을 공결의 이유로 인정해 주는 것이 여성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것인가? 여성의 차이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 고작 생리공결제인가? "성적 악용"의 소지가 있는 생리공결제를 보다 해방적인 방법으로 시행하려면 무엇들이 더 필요한가.

무엇보다, 생리통 그리고 배란통으로 아픈 애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약이 아닌 방법으로 덜 아프게, 바라건대 안 아프게 공부하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주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우리의 아이들이 남자 선생님에게도 여자 선생님에게도 "선생님, 저 생리중인데요..."라고 하면서 생리로 인한 자그마한 요구사항을 아무런 모멸감이나 수치심없이 말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려면, 당장 여기, 우리의 일상에서, 남들이 아닌 바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변화란,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든지 간에, 실험의 시간을 통과해야, 오로지 부분적 결과만을 예측할 수 있되 그 총체적 상을 담보하지 못한 채 진행되기 마련인 실천의 시간을 통과해서야 가능한 것이다.

조급증. 조급증의 다른 면인 섣부른 예단. 알고보면 하나인 이 둘은, 시행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착오"를 강조함으로써, 여러 실험들이 지닌 해방적이고 창조적 가능성을 애초부터 잘라버리는 효과를 생산한다. 시행착오 함시롱, 실험함시롱, 실험이 몰고 오는 막다른 결과들이 때로 예측지 못한 눈부신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하는데 말이다.

물론 모든 시행착오가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대사를 생각해보자면, 시행착오니 시기상조니 함시롱 여러 실험적 실천들을, 다른 목소리들이 위협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낸 제안들을 묵살하고 묵음처리했던 세력은 무엇이었는가?

이런 점에서 성평등이 일정궤도에 오를 때 까지는 역차별을 하더라도 성인지적 정책들을 밀어붙이고 그것이 관습화되어 보다 더 해방적인 관습, 정책들을 필요로 할 때까지 여성을 인간으로 대우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맞다.

생리공결제 도입(논쟁)이 우리에게 다시금 가르쳐 주는 것은, 제도란 문화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화가 설익었다고 새로운 제도가 들어서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 지금의 변혁 정치가 비젼을 벼리지 못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지향하려는 바들이 소위 "사생활"에서도 실천되는 문화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수자들도 인간이며 권리가 있으므로 그 인권을 존중하도록 사회를 강제하고자 하는 장구한 투쟁에서 나온 보편적 수사와 논리들을 저 깡패제국의 조지고 부시는 머저리가 제일 잘 써먹는 것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변혁 정치가 문화로, 우리 일상으로, 생활습관으로 실천, 안착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생리공결제 도입 논쟁에서는, 핵심을 놓치지 말자. 핵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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