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3, 18, 19, 22, 42.
12억 5천3백만 원
“오옷, 터졌다!”라고 했으면 좋겠으나, “에이, 또 아니네~”라고 실망할 주제조차도 아니다. 실제로 나는 로또를 사진 않았으므로. 사실 1000원도 선뜻 내버리기는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냥 부러운 눈길로 쩝쩝 입맛만 다실 뿐.
꿈이라도 꾸기 위해 1000원을 투자하지 못할 만큼 쫌생이인 주제에 상상의 크기는 자유라, 나는 자주 친구에게 징징댄다.
“로또 10억만 있으면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몽땅 해결될 텐데, 아니, 1억만 있어도...”
친구는 헛웃음을 친다.
“너 천만 원도 없잖아. 그냥 천만 원만 있으면, 이라고 해.”
“아냐. 천만 원 갖고는 여유는 생기겠지만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진 않을 거 같아. 1억 정도면 될 텐데.”
그렇다! 돈만 많으면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된다! 그러니 8000억으로 모든 문제를 싸그리싹 쓸어 버리겠다는 생각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사재(私財)만 해도 얼마라더라, 추경예산 편성에나 나오는 단위인 줄 알았던 조 단위로 나오는 건희 오빠임에랴, 뭐.
그런데, 친구는 헛소리를 하며 징징대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돈이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 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을 안 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네 의무와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으음. 그 말에 난 약간 풀이 죽었었는데, 건희 오빠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돈이면 모든 의무와 책임이 사라지고,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된다는 자신감의 포스!
‘국민께 사죄를 드리며’ 8000억을 내놓는다면서, 뭘 사죄하겠단 얘기는 없다. 사죄를 한다는 건 잘못이 있어서라는 건데?
하긴, 얘길 안 한다고 모르는 사람이 없긴 하다. 검찰이니 고위층이니 년년이 다달이 봉급 주듯 돈 쥐어주고 있었다는 증거가 뽀록났다.(이것도 성과급제로 주었을까?) 불법증여, 탈세, 탈루로 그 막대한 재산 열심히 움켜쥐었다.(8000억 내놓는 배포는 어쩌다 생기나 보지?)노조 만드려는 노동자를 불법 감시하고 탄압하는 건 항상 하는 짓이다.(삼성의 기술로 유령도 쓸 수 있는 핸드폰을 만들어서?)
이거 모든 국민들이 다 아는 나쁜 짓이다. 그러니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었나 보다. “다 알면서 뭐얼~”
자본주의와 더불어 성립된 근대 민주주의 국가, 부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강변하면서도 ‘법 앞의 평등’만큼은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해왔다. 평등은 부의 평등이 아니라 법앞의 평등이라며 정당화했다.
그런데, 지 알고 내 알고 온 국민이 다 아는 삼성의 나쁜 짓들, 요모조모 뜯어봐도 명명백백 불법이고 증거도 솔찮은데, 수그리슬쩍 빠져나간다. 이게 말이 돼?! 음식물쓰레기 불법 투기한 범법을 저질러놓고 만 하루 동안 가슴 벌렁였던 나 같은 국민의 상식으로선 상상치도 못할 일.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했는지 어쩐지, 심상찮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걸 알았는지 어쨌는지, 돈으로 해결하겠단다. 이심전심, “돈이면 안되는 것 없잖아!!!”
그래. 이심전심이다. 돈이면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된다!
음악을 듣는다. 홀리데이. 어린 시절 무척이나 멋져 보였던 강헌 오빠가 좋아했던 노래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치며 장렬히 산화해 갔던 그, 저세상에선 돈 좀 있으려나?
그를 다룬 영화가 얼마 전 개봉하였고, 범죄자를 미화했느니 어쩌니 논란이 많다.
그러나 나는 강헌 오빠보다 건희 오빠가 훨씬 더 싫다. 둘 다 돈이면 안 되는 것 없다고 말했지만, 그런 세상을 만든 게 바로 삼성과 건희 오빠이기 때문이다. 내가 절대로 생길 리 없는 1억만 있으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라는 정신혼란한 헛소리를 지껄이게 만든 게 그이기 때문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할 인간의 정신조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천하에 포교하는 것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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