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강기명] 성공회대

너희들의 위기

[기고] 진보진영의 위기는 정말 '위기'인가?

작년부터 심심찮게 언론이나 논객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말이 있으니 "진보운동의 위기"가 그것이다. "대안적 정책을 내놓지 못하는 게 문제다.", "대안이 있어도 그것을 정책화 할 정치적 역량이 부재한 것이 문제다." 등등 진단과 처방에 있어서는 서로가 상이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현재의 한국의 진보운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진보의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집회를 할 때 사람들도 별로 안 모이고, 민주화세력은 우경화되고, 노총이나 민주노동당도 빌빌대고, '일반 시민'들의 호감도도 떨어졌다는 게 그들이 주장하는 위기의 핵심에 놓여 있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모든 진보적 정치실험들이 하나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담론을 말하는 대부분의 논자들은 결코 기존의 정치의 틀 밖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위기에 대한 대안을 또 다시 기존 정치 안에서 찾고 있다. 때때로 이들의 주장은 운동이 '잘 되던' 80년대 후반의 기억을 떠올리며 "민주노조의 도덕성을 회복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90년대 초에 불같이 일어났던 시민운동의 경험을 확장해서 "이제는 대안을 제시하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주장은 기존의 정치주체였던 노동계급, 시민계급, 그리고 당과 국가를 어떻게든 복구하자는 것 이상의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와 처방이 이러한 고전적인 정치주체에 대한 분석 안에서만 빙빙 돌기 때문에 '진보진영의 위기' 담론은 결코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히고 만다. 확실히 고전적인 진보 운동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위기가 '너희들의 위기'라는 것을 인식할 때만 그 위기 바깥에 있는 가능성들을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점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파상 공세 속에서 기존의 정치 주체가 아닌 이들이 새롭게 정치화 하고 있는(그리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때 이 '진보의 위기'를 넘어설 동력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002년의 '촛불집회'의 실험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은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자율적이며 급진적인 대중의 정치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기존 운동 안으로만 집어넣으려고 했던 진보진영(그리고 사실 더 적극적이었던 노사모류)의 시도는 결국 촛불집회가 노무현이나 황우석같은 포퓰리스트들의 사조직이 되도록 방치한 셈이 되었다. 결국 그 이후 운동의 동력은 현격히 떨어지고 위기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한국 사회 바깥으로 돌려본다면 새로운 정치 주체들의 도래와 그들의 운동이 가져오고 있는 눈부신 성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운동은 남미의 각종 사회운동들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 볼리비아의 원주민운동, 아르헨티나의 피께떼로(도로점거운동)나 주민평의회 운동 등은 이전의 당이나 노동조합, 무장혁명투쟁운동 등이 갖고 있던 운동의 헤게모니를 급속도로 장악하면서 남미 사회 전체에 대한 코뮤니즘적 공세를 취하고 있다. 최근 남미의 연이은 좌파정권의 수립은 이들의 운동이 낳은 간접적인 성과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운동은 이전의 운동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이러한 운동에는 실업자, 농민, 여성, 학생, 원주민, 빈민 등의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둘째,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다. 셋째, 투쟁은 국가권력 장악이나 선거의 승리 같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고, 자율적인 투쟁의 확산과 강화, 그리고 그 속에서의 참여자들의 정신적이고 조직적인 성장을 지향한다. 넷째, 국가나 정당, 노총과 같은 대의집단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까지 이러한 운동들은 완연히 전지구적인 협력을 창출해내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특히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운동은 인터넷을 통한 지구적 수준의 소통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의 잔인한 억압 속에서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들이 자라날 토양은 얼마든지 마련되어 있다. 아니, 진보진영이 '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들의 저항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작년에는 몇몇 노숙인들이 철거예정인 삼일아파트를 무단 점거하여 그곳에서 자치적인 공동체를 꾸리기도 했고, 예술가들 역시 '오아시스 프로젝트'라는 공간 점거 운동을 몇 년 째 해오고 있다. 또한 한국의 농민운동은 이미 전지구적인 연대를 이루면서 몇 년 째 강력한 투쟁을 벌여오고 있다. 특히 작년의 홍콩 시위에서 보여준 이들의 다양한 투쟁전략들과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농촌의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정치행동의 가능성이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낳는 빈곤의 물결 속에서 심화되어가는 저출산(출산파업!)과 한국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 이제는 포화상태에 다다른 불안정 노동자들, 일정한 주거를 잃어버린 채 PC방을 전전하는 실업자들과 빈민들, 권리를 요구하며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시설장애인들, 누구로부터도 대의 받지 못하는 동성애운동, 장애인운동, 에이즈감염인 운동들은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치 주체성을 사유하도록 추동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을 이를테면 '사회공공성', '양극화 해소' 같은 틀로 가두어서 기존의 시민운동이나 정당운동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진보진영에 대한 세간의 싸늘한 평가는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의 사회운동은 이러한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어떻게 자율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직접행동을 스스로 조직해가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들을 창출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진보운동의 위기'는 지금까지 운동을 주도해왔던 '너희들의 위기'이지 '우리들의 위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위기'담론에 빠져서 기존의 운동의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열려진 새로운 가능성들을 긍정하며 이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와 맞서는 일이다!
덧붙이는 말

김강기명 님은 성공회대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강기명(성공회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