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성폭력"

[기고] 비극적 죽음에서 일상적 성폭력까지

- 2006년 3월 8일, 아흔여덟 번째 세계여성의 날을 열린우리당이 ‘성추행․성폭력 추방의 날’로 선포했다. 선포식과 함께 성추행 사건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최연희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가 진행되면서 나온 구호는 “성추행범에게 전자팔찌를!”이었다.

- 같은 날 뉴스에 강간당할 위험에 저항하던 중국 조선족 유학생이 하숙방에서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강간치상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뒤 집행유해로 풀려난 상태에서 또 다시 강간범죄를 시도한 상습범이었고, 기자는 이 사건과 함께 용산 아동 성폭력 및 살해 유기 사건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

- 2월 17일 용산에서 한 초등학생에게 성폭력을 행사하고 살해한 범인이 검거된 후에 그가 작년 5살짜리 어린아이를 성추행하여 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이어 아동과 청소년들에 대한 성폭력 사건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상습적인 아동성폭력범 군인이 휴가 중에도 범행, '인면수심' 40대, 친구 딸 수차례 성폭행, 인천 자취하는 여고생 상습 성폭행, 11살짜리 남자아이 성추행 살해, 성폭행 당한 여고생 다시 성추행 등등. 언론에서 다룬 성폭력 사건들 중 어떤 것들은 작년에 일어난 것이었다. 언론은 여전히 신문에 실린 모든 성폭력 사건들이 용산 사건을 기점으로 ‘잇달아 발생한다’고 강조하고,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요즘 왜 그러나” 불안해하고 있다.

- 얼마 전 남성교도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여자 재소자가 구치소에서 자살을 기도한 이후, 마찬가지로 같은 교도관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 재소자 혹은 출소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 가해 교도관은 정신질환을 앓아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고, 법무부는 여성재소자가 남성교도관과 면담할 때 여성교도관과 동석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여성 교도관에 의해서도 성추행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한 출소자의 증언이 기사에 실렸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은 마치 성폭력의 천국같다. 생각해보면 틀린 표현도 아니다. 한국에서 ‘신고된’ 연간 성폭력 사건들의 수만 해도 세계 2위를 링크하니 말이다. 혹자는 성폭력 신고를 회피하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신고되지 않은 성폭력 사건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어쩌면 세계 1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사실 마치 성폭력 사건들을 처음 발견한 듯 놀라고 야단법석 떠는 모습은 오히려 어색하기도 하다.

용산에서 한 초등학생이 성추행을 당한 후 살해유기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다음, 세상은 힘없고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가해자가 아동 성폭력으로 형 집행을 유예 받은 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비슷한 아동 성폭력, 상습범에 의한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그 사건 이후 다시 한 번 상기되면서, 사람들은 성폭력, 특히 아동성폭력 가해자에게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형이 가볍게 집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국회에 성폭력 관련 법안 12개가 여전히 계류 중이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여성가족부 장관은 용산 사건의 피해자 장례식이 있었던 2월 22일을 ‘아동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고, 성범죄자 신산공개를 강화하고 ‘성폭력 범죄자 유전자 정보은행’을 만들겠다는 당정합의가 있었다.

물론 비극적인 용산 초등학생의 죽음과 아동성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우리 법에 당연히 분노해야 한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미비했던 성폭력, 특히 아동성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수 있도록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대책을 구상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이 한 때로 끝나지 않도록 다른 성폭력 사건들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신상공개제도에 관한 매건법 또한 상습적인 아동성폭력범에게 한 소녀가 성폭행 후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대안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고 있는 대책은 문제없는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논의의 방향은 적절한가? 이 글 첫머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습들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강력한 처벌과 제재만이 대안인가?

이미 많이 지적했듯이, 그동안 강간 등 성폭력에 대한 법의 처벌은 ‘솜방망이’라 불릴 만했다. 성폭력 가해자가 초범인 경우 관행적으로 집행유예가 선고되어 왔고,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성폭력범죄가 친고죄이기 때문에 피해자나 피해자 부모가 가해자와 합의를 했다면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설사 실형을 선고받는다고 해도 단기형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복역 후 피해자가 아는 사이였던 가해자를 계속 만날 수밖에 없어 고통을 겪는 일도 생긴다. 성폭력 피해자가 그 피해를 법원에서 인정받는 일도 힘들지만, 피해자가 겪은 침해와 고통의 정도가 가해자 처벌에 제대로 반영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솜방망이식 처벌이 성폭력 범죄의 상습적인 특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조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쉽게 형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성폭력 가해자는 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최근 정부나 언론에 의해서 제시된 강력한 처벌과 제제의 방식은 이런 상습성을 막아보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는데, 다음은 용산 아동성폭력살해사건 이후 언론에서 소개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형사적 제재방식들이다.

․전자팔찌
․생물학적 거세 내지 화학적 거세
․야간외출 제한
․음성감독 시스템을 이용한 외출제한 명령제
․성폭력 범죄자 유전자 정보은행
․성폭력 범죄자 얼굴 및 주소 등 특정가능한 신상공개와 취업제한

굳이 성폭력, 특히 아동성폭력이 야간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거세가 (강간이 아닌) 성폭력을 줄이는 데에 과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등 실효성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위의 제재 조치들은 인권침해의 논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가해자 인권 대 피해자 인권이라는 고전적이지만 의미 없는 논쟁을 되풀이 할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해 가해자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성범죄자의 인권이 피해자(혹은 우리의 아이들)의 인권이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란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가해자 인권이 중요한 이유는 보편적인 인권의 견지에서도 그럴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범죄자의 인권을 다루는 사회적 태도가 갖고 있는 함의 때문이다. 범죄자를 이 사회에서 격리하거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범죄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 사회의 보수성하고 깊은 연관을 가진다.

미국의 경우 현재 세계적인 추세와 다르게 사형집행 건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삼진아웃제(동일한 범죄로 3회 이상 걸렸을 때 무조건 가석방없는 종신형을 언도하는 제도) 등의 도입으로 종신형 건수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적 수치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정권 집권 이후에 나타나는데, 문제의 근원에 대해 해결하지 않고 강력한 처벌을 통해 범죄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전체주의적인 보수적 태도를 보여준다.

성폭력 범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수면 위로 드러난 성범죄자들을 보다 오랫동안, 보다 완전히 사회와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강력한 처벌을 도입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지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처벌과 제재를 아무런 제한없이 도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게 된다면 양심수 등 다른 범죄자에 대한 인권침해의 문제 역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가해자 인권 대 피해자 인권이 대립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 뿐이다. 가해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것이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가? 대응관계에 있는 것은 서로의 인권이 아니라, 피해자의 침해당한 인권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 및 피해자에 대한 조치이다. 다시 말해 가해자가 강력한 처벌을 받지 못했다는 지적은, 성폭력 가해자 모두에게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침해당한 인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가해자가 적절하게 처벌받았고 피해자에게 합당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피해자의 침해당한 인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무조건적으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분노한 대중들의 감성에만 부합할 뿐이다. 피해자와 그의 가족은 분노도 느끼지만 상처와 고통 또한 느낀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치료받고 회복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이고, 가해자 처벌 역시 그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 기존의 사법제도에 의한 처벌 뿐 아니라 최근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의 프로그램 등 행정적 방안, 시민공동체의 다양한 참여 등을 함께 고민하여 전사회적인 방향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극적 죽음에서 일상적 성폭력까지

한 어린이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동 성폭력과 성폭력에 대해 당장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크게 일깨워주었다. 그 죽음은 우리 각자에게 또 다른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성폭력 사건들이 모두 용산 성폭력살해사건 이후에 일어난 것처럼, 모든 성폭력들이 상습적인 정신병자나 변태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은 그런 성폭력과는, 그런 성폭력 가해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되는 상황은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한 죽음으로 매몰되는 것이다.

성폭력은, 심지어 아동 성폭력마저도, 어떤 ‘변태’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가까운 사람들, 아는 사람들,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일어나고, 성폭력의 위협은 보이지 않지만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든지 성폭력의 위협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낯선 사람이나 아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 그런 경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밤에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올 것이 뻔한 늦은 약속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 텐트에 배낭 들고 혼자 전국 일주를 해볼까 상상할 때, 사람들로 꽉 찬 전철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혹은 어두운 심야 좌석버스를 타고 어느 좌석에 앉을지 머뭇거릴 때, 여성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성폭력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선택을 하게 된다. 성폭력의 위협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어,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성폭력의 문제를 인식할 때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까지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동성폭력 및 성폭력 재판에 대해서 법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성의 목소리는 3월 8일을 ‘성추행․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한 열린우리당의 집회보다 훨씬 의미있어 보인다. 성폭력 문제를 고민할 때 자신과 공동체가 속한 세세한 일상과 그 행동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면, 성폭력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장임다혜 님은 서울대 법학과에서 법여성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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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란

    우선 우의 글을 쓰신분 진짜 이성적이신것 같습니다.존경스럽네요.많은 분들이 지금 중국의 잘못만 강조하시는데요 그건 잘못된거라고봅니다.우선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절대적으로 우기는건 애국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이번 살해당한 유학생 참 예쁘구 착한 아이였던거 같던데...자기나라 사람들의 생명만 아까운거 아니예요,모두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구 다 귀한 생명이랍니다.전 중국에 사는 조선족인데요 다른 꺼페에 올린 글이랑 보구 너무 놀라구 화나구 ... ...

  • 합리주의자

    세계2위 1위 하는 논거가 불명확하다.
    한국남성이 특별히 문제가 있는 양 왜곡되고 있다.


    형사정책연구원 2002년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강간 및 강제추행 발생건수는
    인구 10만명당 19.8건으로 전년도의 22.2건보다 오히려 줄었다.
    참고로,
    주요국가의 2002년 강간 및 강제추행 발생률을 보면
    미국 33건,영국 86.6건,독일 33.9건,일본 9.3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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