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적 실천은 해방적인가?

[김연민의 푸른산맥처럼] "오늘 하루라도 운동의 관성을 걷어치우고..."

겨울 산에 오른다.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옻나무, 생강나무, 굴참나무 모두 옷을 벗었다. 겨우 몇 잎 남은 시든 나뭇잎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흔들린다. 산등성이에는 겨울바람이 쉬쉬 소리를 내며 지나친다. 나목의 겨울나무는 이 인고의 계절을 지나면 봄을 맞아 연노랑 꽃, 흰 꽃 등을 피워 산을 물들이고 가을에는 빨간 열매를 맺어 산에 사는 뭇 짐승에게 먹이를 제공하리라. 그러나 오늘은 바람이 차고 몸은 아리도록 시리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고 무려 몇 달간의 무위도식 후에 겨우 글을 쓴다.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히 글을 쓸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보다도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섰다. 삶 전체가 세상에 던져지고 세상은 마구잡이로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를 부리고 나를 기만하게 한다. 그런데도 모두 묵묵부답으로 힘든 삶을 이어나간다. 모든 사람을 피로하게 하는 이 세상살이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 본다.

어떠한 실천이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온전한 제자리로 가져 오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의 해방적 실천은 해방적인가? 라고 질문해 본다. ‘해방적 실천’이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해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은 가위 눌러 있고 전망을 잃었다. 이제는 희망을 제작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없이는 희망을 스스로 찾기 어려운 암울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87년 이전의 울산의 노동 운동은 실은 그 존재조차 없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현대 관련 대규모 사업장에는 이렇다할 조직 운동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고 정 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했다. 한국노총 소속의 노동조합이 석유화학 단지에 있었으나 노동운동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미리 소그룹 활동으로 탄탄하게 노동조합을 준비해오던 권용목 등이 현대엔진에 노조를 조직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노동운동은 갑자기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의 노동운동은 동네북 마냥 모두의 놀림감이 되고 자신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비정규 권리 보장 입법 쟁취를 위한 총파업 투쟁’은 문화공연, 개회선언, 민중의례, 내빈소개, 대회사, 연대사 문화공연, 투쟁연설, 상징의식, 결의문 낭독, 가두행진, 마무리 집회, 투쟁연설, 마무리 연설로 예전처럼 진행되었다. 그러나 삶에 지친 시민은 그들의 현실에조차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실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지난날을 모두 망각의 늪으로 보내 버리기에는 이쉬움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은 어느새 단절되고 고립되어 버렸다. 관성처럼 되풀이되는 운동 속에서 누적된 피로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는 쉽지 않다. 오늘 하루라도 운동의 관성을 걷어치우고 가벼운 일탈이라도 해보자. 다시 20년을 바라보면서 그때에는 후회하지 않는 봄을 맞기 위해서 산속에 먼저 핀 작은 꽃과 같이 잔잔한 향기를 가득 담은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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