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 민주주의가 빈사(瀕死)의 기로에 서 있다

[기고] 마침내 민주주의의 위기가!

우리의 공화국, 민주주의가 빈사(瀕死)의 기로에 서 있다.

그리스어 ‘분리되다’(Krinein)에서 유래된 ‘위기’(Crisis)란 말은 본래 회복과 죽음의 분기점이 되는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병세의 변화를 가리키는 의학용어로 사용되었다 한다. 현재 이 위기는 사회과학적 의미로 더 많은 용례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가 일방적 파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바로 새로운 대안을 향한 출발점, 곧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절체절명의 중대국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집단적 결단을 의미하는 정치라 하겠다. 정치는 결국 위기의 순간에 찬연히 그 빛을 발해야 한다.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 상황은 정치적 위기를 향해 마침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인상이다. 이미 사회경제적 위기는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세계 도처에서 감지되었다. 만성적 경제 불황과 저성장으로 표출된 서구 복지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해 자본주의는 고실업, 사회양극화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을 단행했다. 그 외적 표현이 세계화로 지칭되는 전 지구적 시장사회로의 편제라 하겠다.

이제 더 이상 상품세계의 외부는 없다. 다만 악(惡)의 축만이 있을 뿐이다. 그 동안 자본주의 체제는 두 가지 점에서 운이 좋았다. 하나는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의 존재와 몰락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옳건 그르건 그동안 대략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코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하질 않을 것이다.

유신의 서슬 퍼런 폭압에 맞섰던 시인 김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통해 노래했다. “신 새벽에 남몰래 쓴다 / 타는 목마름으로 /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로 끝나는 바로 그 노래. 정치적 폭압과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거친 탁류의 모진 세월을 헤치며 살아온 한국 민중들이 이러한 노래에 가슴 절절해 했던 이유란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었고 정언명령이기도 했지만 군사독재라는 실체가 눈앞에 너무나 분명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해서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째서 민주주의를 원하지’라는 물음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항상 사족과도 같았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사업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민주주의가 그 형체도 없이 갈갈이 찢겨져 나가며, 다수 민중들이 길게는 5년에서 짧게는 4년에 한번씩 표 찍는 기계로 전락해 버린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민주주의를 기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표 찍는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여야 한다. 민중의 삶과 생존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립할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

전대미문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몰고 올 한미FTA는 이 땅에서 농민이라는 종족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한다. 조만간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농후한 소위 ‘비정규직 보호법안’은 이 땅의 청년 및 노동자들에게 2년에 한 번씩 실업체험을 해보라 한다. 하긴 실업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값싼 유전자 조작 미국 농산물과 광우병 소가 있는데. 일단 끼니 걱정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참여정부가 주장하는 사회적 양극화 해소 방안이 아니던가? 공산품과 농산품을 맞바꿔야 잘 살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19세기 영국의 곡물법파동이래 파산에 파산을 거듭해 온 신고전학파 주술의 망령을 목도한다.

이 땅의 노동자․농민의 삶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위기임을 주장하는데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제 우리에게는 오직 ‘최초고용법’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3월식대로, 좌파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 제치는 남미의 민중 풍으로 새로운 사회운동의 신기원을 펼쳐 보이는 일만이 남아있다.
덧붙이는 말

최형익 님은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한미FTA저지 범국본 정책기획단 한국정치분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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