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택] 참세상 논설위원

세상 돌아가는 시간표

[기고] 포스코•한미FTA•미사일•레바논

폭력과 야만

포항건설노조 노동자들의 포스코 본사 점거 농성 투쟁이 일단 끝이 났다. 이미 보도에 의해 충분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번 농성 투쟁은 사실상 노무현 정부의 폭력적 대응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한 것이다. 물론 정부의 대응 못지않게 포스코 자본의 철저한 무시와 배제도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폭력이 되었다. 보수 언론의 보도 태도와 내용 또한 새삼 말 할 필요도 없이 농성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포항건설노동자들은 정부, 자본, 언론 모두의 공모에 의해 투쟁을 하게 된, 아니 투쟁으로 내몰린 원인과 이유, 요구, 해결방안 등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속 시원히 알리지 못한 채 오히려 불법, 경제손실, 지역경제파탄의 원인 제공자로 내팽겨 쳐졌다. 이후 줄줄이 닥칠 구속, 손해배상 등 농성 당시의 고통보다 훨씬 더 가혹한 ‘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분통터질 노릇이다.

한미FTA 2차 협상도 마무리됐다. 여기서도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 협상을 반대하는 투쟁 주체의 뜻과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전투경찰을 동원하여 오로지 힘으로‘만’ 진압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보수 언론은 역시나 ‘물폭탄. 시위폭탄’이라는 선정적 문구로 반대 투쟁을 재난으로 몰고 갔다. 국회는 한미FTA가 뭔지도 모르고 오직 찬성 의사만 가진 의원들로만 ‘특위’를 구성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한미FTA 협상은 아직 진행 중에 있다. 9월에 있을 3차 협상과 그즈음 시기에 예정되어 있는 한미 정상회담이 중대 고비가 될 것이다. 2차 협상이 일부 ‘파행’으로 비친 점이 있긴 하지만 이는 2차 협상 결과 전체를 놓고 볼 때 앞으로의 진행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오직 반대 투쟁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협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의 비밀을 고백하고 나왔다. 투쟁의 성과이다. 그러나 협상에 대한 계속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도 채택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북핵’ 또는 미사일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는 것도, 6자회담을 통한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분위기 조성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북’을 궁지로 몰고 가는 적대정책을 통한 반사이익‘만’을 챙기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안보리 결의안 채택에 동참했다. 이들 역시 제국주의 사이의 힘겨루기에 참여하는 주요 당사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북은 미사일 실험 발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비록 주권 국가의 당연한 군사훈련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 얻고자했던 정치적 성과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북은 좀 더 강도 높은 군사조치를 취할 것인가, 다른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를 사이에 놓고 힘겨운 줄다리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노무현 정부는 국내 상황에서는 철저히 힘으로 응징하는 단호함을 보였던 것과는 정 반대로 국제적으로는 철저히 힘의 열세를, 남북관계에서는 그 나마의 지렛대도 스스로 놓아버리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못지않은 무자비함과 야만성을 레바논 폭격에서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다. 가히 작은 미국, 아니 미국보다 훨씬 더 오만한 미국 행사를 뽐내고 있다. 마치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져 있는 미국의 답답함을 대신해서 분풀이라도 하는 듯 하다. 안보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결의안은 고사하고 의장 성명조차 채택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당하다고 뻔뻔하게 비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 미국은 인도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도 그 어떤 우려도 표하지 않았다.

중동 전체가 제5차 중동전쟁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라크 상황이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고, 이란 문제가 부시의 골치 거리로 남아 있어 미국 내 네오콘들의 입장에서도 결코 나쁜 시나리오가 아니다. 만약 북의 추가적 군사조치가 현실화 되어 중동과 동북아에서 동시에 군사적 긴장이 달아오르면 미국과 일본은 충분히 불장난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단일성과 공통성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각각 다른 4가지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결코 전혀 다르지 않다. 그 모두는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위치만 다를 뿐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라는 단일한 궤도 위를 똑 같이 달리는 무자비한 열차들이다. 그 모두에게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가 품고 있는 폭력성, 야만성, 무차별성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 모두는 외견상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다를지라도 사실은 모두 똑 같은 공동의 기반 위에 서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라는 단일성이 그것이다.

포스코 농성 투쟁, 한미FTA 협상 반대 투쟁,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규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 즉각 중단 요구도 서로 다른 목소리처럼 들린다. 이들 투쟁, 규탄, 요구는 국가라는 공통성, 민족이라는 공통성, 인종이라는 공통성, 종교라는 공통성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다른 목소리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과 인종과 종교의 차이와 관계없이 억압과 탄압을 거부한다는 공통성, 그에 맞서 싸운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억압과 탄압의 주체는 단지 공통성을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라는 단일성에 기초하고 있는 데 반해 그를 거부하는 주체, 그에 맞서 싸우는 주체는 아직 공통성에 머무른 채 단일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억압과 탄압의 주체는, 비록 그들 내부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똑 같은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합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 반해 거부와 투쟁의 주체는,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근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분산성, 고립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차이가 오늘의 세계를 지금의 세계가 되게 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전쟁은 정치의 한 표현 또는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정치는 경제의 집중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경제->정치->전쟁이 매번, 반드시 이와 같은 순서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의 순서도 발생하며,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낳는 조합이 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제, 정치, 전쟁은 결코 서로 떨어진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경제, 정치, 전쟁은 하나의 유기체이다.

포스코 농성 투쟁 투쟁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 즉각 중단 요구와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 보인다. 실제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 그들을 하나로 연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운 지점들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분명 어떤 내적 연관성이 흐르고 있다. 단지 억압과 탄압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라는 공통성을 넘어서 단일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내적 연관성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내적 연관성은 아직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더구나 그들 사이에 그 어떤 소통과 교감도 없다고 할 때, 현실에서는 전혀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 세계는,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포섭, 체제 내화, 배제를 더욱 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포스코 자본은 포항건설노동자를 배제한다. 미국, 일본 제국주의는 북을 배제한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배제한다. 그러나 배제와 포섭은 서로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배제는 포섭을 향하며, 포섭 또한 언제든지 배제로 돌아설 수 있다. 이를 실현, 관철하기 위해 그 어떤 폭력, 야만, 무차별적 행위를 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도덕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운동(축적과 이윤을 위한 경쟁 체제) 자체가 그러한 법칙성을 객관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국가, 민족, 인종, 종교 그 어떤 수단을 들이밀더라도 자본의 그러한 법칙성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오로지 자본이라는 원인 자체를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국가 없는 사회, 민족을 떠난 공동체, 인종과 분리된 친밀함, 종교와 무관한 영적 교감을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공포이다. 자본 없는 생산을 상상하는 것도 그러하다. 시장 없는 교환도 상상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자본이 없다면, 시장이 없다면, 무역이 없다면, 금융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대체 세상과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포와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 질문 없는 답은 없다.

반자본

그렇다. 저항과 투쟁이 갖는 공통성은 그들의 모습, 그들의 형태가 갖는 공통성이다. 도대체 그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맺어주는 구체적인 실체는 무엇일까? 아니 그 구체적인 실체를 무엇으로 규정할 때 그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비로소 연결될 수 있을까? 바로 반자본 또는 반자본주의이다. 포스코•한미FTA•미사일•레바논 모두는 각각의 성격과 특징을 갖고 있지만, 또한 각각에 필요한 구체적 대처가 있어야겠지만 그 모두 반자본(주의)을 향할 때 그들 사이의 내적 연결이 가능하다.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반제, 반전, 반미 투쟁이 곧 반자본(주의) 투쟁은 아니다.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반제, 반전, 반미 투쟁을 통해서 더 좋은 자본주의 만들기, 더 강력한 국가 건설, 더 힘 있는 민족 되기를 목표로 한다면 자본 또는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강하게 할 뿐이다. 따라서 더 좋은 자본주의, 더 강력한 국가 건설, 더 힘 있는 민족을 통해서 자본 또는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설정은 형용모순이다. 자본(주의) 밖에서, 자본에 비껴서서, 자본을 떠나서 공동체끼리, 우리민족끼리, 우리지역끼리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설정도 공상에 불과하다. 공동체, 민족, 지역 속에 이미 자본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한편 다른 대안이 있다면 그 때 반자본 또는 반자본주의를 설정하겠다는 태도도 순서가 바뀐 것이다. 반자본 또는 반자본주의를 먼저 전제할 때만이 비로소 대안을 찾아 나설 수 있다. 투쟁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일상 속에서 그것들의 연속적 과정(축적) 위에서 대안을 찾겠다는 것은 자본에 대한 항복에 다름 아니다. 변혁에 대한 포기와 다르지 않다. 정치적, 전략적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투쟁도, 경험도, 일상도 반자본의 정치적 방향에 의해 배치될 수 있어야 축적도 가능하다.

포스코•한미FTA•미사일•레바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니 이와 유사한 상황이 이미 한참 전부터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앞으로 훨씬 더 열악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마당에 더 무엇을 기다리고, 더 무엇을 숙고하고, 더 무엇을 고려하고, 더 무엇을 망설여야 한단 말인가?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반제, 반전, 반미 투쟁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데도 대중의 상태를 핑계 삼을 수 있을까? 오늘날 고도로 생산력이 증대되고 있는 데도 자본 없는 생산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직접민주주의가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데도 통치를 받아야 할까? 답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다.

중동에서 만약에 제5차 중동전쟁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한국의 노동자 민중투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오로지 한미FTA 협상 반대투쟁의 외길만 걸어도 될까? 만약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군사 행위를 한다면 한국의 노동자 민중은 그러고도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을 향해 연대투쟁을 요청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북의 선군정치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거나 또는 국제역학 상 한(조선)반도에서 그러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어도 되는가? 지금부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더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에 대한 항의와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만들어가야 한다.

포스코•한미FTA•미사일•레바논이 한국의 노동자 민중투쟁에게,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에 던지고 있는 메시지와 시사점을 읽어 내지 못하고는, 그에 대처하는 원칙과 구체적 전술을 밝혀내지 못하고는, 이를 논의하고 제시하고 검증받을 수 있는 주체를 결집시키지 못하고는 운동은 진전할 수 없다. 세상 돌아가는 시간표에 비하면 지금도 한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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