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신은 우리 편이 아닌가 봅니다

페루, 갈라파고스 거쳐 베를린에서 보내온 편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여러분0,
저 김춘이입니다. 지금 베를린에 여름 인턴차 있네요. 한국의 물난리 때문에 또 댐논쟁이 불거졌더군요. 한국도 장마가 끝났으니 많이 덥겠네요. 여기는 무지하게 덥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무 그늘에만 가면 시원하긴 합니다. 사무실과 집이 더워서 그렇지‐‐‐, 왜냐면 선풍기도 없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에겐 그들의 사용이 익숙치 않습니다. 왜냐면 원래 유럽은 그렇게 덥지 않았답니다. 여기 저의 편지를 첨부합니다.


2006년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테스트 – CNN


월드컵 축구 관전후 CNN으로 채널을 돌리니 CNN 긴급뉴스는 북한의 미사일 테스트 발사 테스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월드컵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으로 세계 이목이 집중해있는 사이 북한은 이를 감행했군요. 그것도 미국 독립기념일에. 오늘아침까지 CNN은 온통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이야기였는데 긴급뉴스제목이 바뀌었습니다. CNN에서 인터뷰중인 미국 관리는 한국정부는 북한에 대한 모든 짐을 미국과 일본으로 떠 넘기고 있다고 하네요. 온통 화면은 한반도 지도와 김정일씨의 사진뿐입니다.

안좋은 뉴스로 한반도가 나오니 TV 보고 싶지가 않네요. 그리고 우리의 문제인데 우리 나라 정부의 인터뷰는 거의 없고 중국 일본 미국이 주요인터뷰 대상입니다.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은 월드컵때 한국에 있었는데 서울시내가 월드컵으로 환성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있었을 때 DMZ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더랍니다. 불과 2시간 거리 내의 이곳이 이렇듯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싶어서요. 미국인에게 2시간 운전은 아무 것도 아닌데 그 2시간 거리 내에 서울과 DMZ 지대의 그 다름이 도저히 한 나라안이라고 상상을 할수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베를린속의 원조 전라도 사투리

6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 도착해서 독일교민들과 스위스‐한국전을 관전했습니다. 우리가 지긴했지만 하여간 응원이 보통이 아니어서 웃음이 많이 나오더군요. 2002년 서울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교민분들은 저한테 왜 응원 안하냐고 하고 전 하여간 웃음이 많이 나와서 웃느라고 응원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왔습니다. 저를 베를린 공항에서 맞아주기로 한 분을 찾으려고 두리번 두리번 찾는데 아 30년전에 영암에서 오셨다는 그분은 전라도 원형 사투리로 저를 맞이하시더군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21세기 그것도 베를린공항에서 듣는 1970년대 이전의 전라도 사투리는 시간의 시계를 2006년 7월을 1970년대로 돌려놓기에 충분하더군요. 그 사투리가 얼마나 정겹고 흥겨웠던지 저는 그분의 사투리를 듣자마자 웃음반 울음반이 되었습니다. 정겹기도 하고 어딘가 배운 사람들이 써서는 안될 것 같은 그 촌스러움의 전형 전라도 사투리…. 하여간 그분의 말씀마다마다는 ‘뭐시기’ ‘거시기’가 없이는 문장 성립이 안 되는 구조입니다.

“김양, 거시기 오늘 무지 더워분디 집에 오니라” “거시기 뭐냐 오늘 하도 더워서 나 택시 오늘 안해부렀다” 이런 식입니다. 그분집에 가니 반찬은 완전 옛날 전라도식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은 전라도에서도 그렇게 음식을 먹지 않은데 말이죠. 20년전 저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밥을 먹는데 눈물이 날 지경이더군요.

그 분, 김선생님은 1976년 광부로 오셨고(농민피를 빨아먹는 농협의 구조에 항의하다 밉보여 직장을 쫓겨나게 된 후) 그 분 아내는 간호원으로 오셨는데 그분은 베를린에서 현재 택시운전을 하시고 54세의 그분 아내는 아직도 밤근무를 하시는 간호원입니다. 참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분 말씀에 의하면 당시 그분의 농협 재직 시절, 수해가 나면 농민들의 농협빚에 대한 이자를 탕감하고 원금만 갚으라는 정책이 시행되는데 농협관리들은 이를 농민들한테 알리지 않고 원금에 대한 이자를 다달이 받아 착복을 했다는군요.

이런 게 너무 광범위하고 만연해서 혼자서 깨기는 너무나 역부족이라 힘들었고 농협에서도 그분의 그런 철두철미한 농민을 위한 정신이 두려워 해고조치가 단행되었답니다. 그분이 절 시내구경을 한번 시켜주셨는데 “독일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삶의 질이 엄청 다르다. 그런데도 조국이 무엇이길래 난 이토록 고국을 그리워하는지 모르겠다” “김양 수구초심이라고 알아 ? ” 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더군요. 한국에 역이민 하려고 한국을 몇번 갔는데 너무나 변해버린 한국이어서 잘 살 수 없을 것 같아 독일에 주저앉기로 결정했다고 하시더군요. 돈돈돈 하는 한국사회, 집값 때문에 1억을 쉽게 벌고 잃고 그리고 하루 저녁 술값은 너무도 많은 액수고 이 모든 게 검소하게 사는 독일과 너무 달라 적응이 안되셨답니다.

아이들이 커서 시집장가 갈 나이가 되었는데 그분은 독일에서 살기로 작정한 이상 한국 사돈 만나(베를린 교민 중) 가끔 술도 한잔 하고 한국이야기도 하는게 꿈이었는데 자녀들의 배우자감은 독일인들이어서 그에 대한 서운함은 있으신 듯 했습니다. 사돈분들과 터놓고 한국어로 이야기 할 기회를 잃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배우자감은 제가 보기에도 아주 훌륭하더군요.

  베를린의 민초 김선생님. 광부로 오셨다가 지금은 택시운전을 하시는 그는 내게 배움 그 차제다. 60이 넘은 연세이지만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보와 균형과 독특’의 결정판이다. 오늘도 그는 ‘세상은 하나로만 이루어지면 재미없다’면서 꾸준히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만만치 않은 노력을 기울이신다.

참고로 그분은 저를 김양이라고 호칭합니다. 35년전농협근무시절 그분의 용어가 그러셨을 테이고 저또한 김학생 이렇게 불러달라고 말씀드릴수도 없고 해서 그것도 좋은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양’이라는 그 호칭에 두분 내외분은 한국에 대한 애정, 저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부르십니다. 만나면 서로 반가워서 5‐6시간의 이야기는 금방이고 저도 제가 한 다른 약속을 까먹을 정도이니까요. 얼마나 건강하고 적극적이고 또한 열심히 사시는지 그분들과의 대화는 저에게 배움 그 자체입니다. 한국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빠지지 않으시는 분들이라 ‘균형발전’ ‘코드인사’ ‘지방선거’ ‘남북관계’ 등에 대해 저보다 더 해박하시고 무엇보다 진보적인 역사관과 사회관이 저를 움메 기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전 날아갈 듯 기꺼웠습니다. 우리시대의 진보를 베를린 민초에서 발견하니 말입니다.

그분의 아내되시는 분은 독일에서 간호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독일 사람들이 ‘너 한국에서 자동차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당했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아니 본적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 좀 가르쳐 줄래’ 하고 되물으셨다는군요. 그분들이 오셔서 겪은 심신의 고통,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2006년 7월 23일, 미국교민지 ‘코리언 저널’과 독일 교민지 “우리신문” “교포신문”의 차이

미국 뉴헤븐 한국 식료품점에 가면 ‘코리안저널’이라는게 있는데 한글이 반가워서 들었다가도 저의 경우는 금방 실망하게 되더군요. 대부분의 내용은 옛날 잡지 ‘선데이 서울’을 못 벗어나는 수준이고 그리고 사회/정치형 기사들은 꼭 1960년대식 논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나오는 교민지 ‘우리신문’ ‘교포신문’의 내용이나 사설들은 미국의 코리언 저널과 내용면에서 논조면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독일 교민지는 한국의 사회현상 관련하여 진보와 보수의 입장을 모두 싣고 그러고 나서 우리 한국의 갈길은 무엇 ? 하고 묻고 또한 ‘남북한이 하나다’라는 입장으로 이번 월드컵시 북한 문예단을 초청해 함께 공연도 하고 뉴욕교민회등과 함께 월드컵 승리 공연도 하고 회의도 하고 등등 되도록이면 통합의 입장을 많이 견지하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사설들을 읽고 참으로 감탄해마지 않았었는데 정말 눈물날 정도로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어찌 이토록 평등한 시각을 갖고 멀리서 온 나한테까지 사설로 이런 감동을 주나 싶어서요.

포마드 머리기름에서 살인미수와 간첩으로 몰리기 까지 – 독일이민의 역사

광부와 간호원으로 시작된 독일 교민의 역사. 독일은 광부를 원했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광부를 보내면 우리의 광업이 잘 돌아가지 않는 관계로 광부 모집을 시작했고 그래서 독일광부에 지원한 이들은 1960년대 그 당시의 인텔리들이 지원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였거나 대학교중퇴를 하였거나 혹은 대학교를 나왔거나 어쨌거나 더 넒은 세계를 위한 꿈에 부풀어 있던 분들이 광부지원을 한 거죠. 그런 그들이 독일 비행기트랩을 내릴 때 독일사람들은 너무 놀랬다고 합니다. 내리는 이들은 광부의 모습이 아니라 모두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사람들이었기에‐‐‐.

3년 광부계약이 끝나면 독일에서 공부를 더 한다고 작정하신 분들이 그 광부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거죠. 그래서 실지로 광부출신 교수분들도 있더군요, 한국의 대학에는. 여하간 그러고서 그들이 배치된 곳은 지하 1500 m 이하의 갱도. 김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지옥은 죽어서나 있는 줄 알았는데 살아서 이렇게 지옥을 보는구나”였습니다.

  일부 파독 광부들이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동백림 사건에서 '간첩' 혐의를 받고 강제소환되기도 했다. (국정홍보처 국가기록사진관 소장)

당시 그 분들 수기를 보면 한국인 광부 한분이 독일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걸렸고(그날 바로 풀려났답니다) 이 사실을 안 한국 광부분들이 그분을 강가로 불러내어 ‘조국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강에 투신자살하라’고 요구했답니다. 그분이 위협을 느끼는 순간 독일 경찰이 달려왔고 투신자살을 ‘강요’한 20명의 그분들은 모두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군요. 그리고 당시 광부분들 중에서도 동료들을 간첩이라고 대사관에 밀고한 분들도 있고 그래서 간첩으로 몰리고 등등 한반도의 이데올로기싸움이 이곳 독일 교민 역사 30년에도고스란히 묻어있더군요.

그분들 수기를 읽는데 눈물과 콧물이 주렁주렁해서 거의 많은 밤을 하얗게 새웠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다시 한번 많이 놀랐고 그 끈질긴 생명력이 국수주의로 흘러서는 안 되는데 베를린의 제가 만난 교민분들은 적어도 제가 보기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세계보편적 가치와 잘 조화시켜 열심히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많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독일 지구의 벗(BUND), 베를린 지구의 벗 그리고 우리의 틸만, 베를린 장벽

틸만은 환경연합에 두차례 왔었고 95년부터 활동한 사람들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죠. 그는 한국에 환경 NGO와 하는 교환 프로그램차 한국에 두번 왔었고 그경험이 바탕이 되어 독일에서 사람들이 ‘스시’라고 하면 그는 꼭 ‘김밥’이라고 고쳐주기를 서슴지 않은 독일 지구의 벗 활동가이죠. 어제(7월 22일)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아내가 만들어준 저녁을 먹고 함께 베를린장벽 일대를 걸어다녔습니다. 밤 10시에 집을 나와 자정까지 베를린장벽 일대를 걸어다니고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독일맥주를 들이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저는 새벽 2시 반 전철로 집에 들어왔습니다. 미국과 달리 훌륭한 대중교통이 사람들을 밤의 라이프를 가능하게 만들더군요.

과거의 베를린장벽이 살아있는 곳도 있고 과거의 장벽이 무너져 도로상의 작은 표시로만 구분되는 곳도 있었는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기쁨을 맛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 데 틸만은 50년이내로 우리의 통일을 진단하고 저는 그건 너무 늦다고 하였습니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사진을 보니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독쪽은 나무와 집이 하나도 없는 벌판이고 서독쪽은 숲이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서독으로 넘어가려는 동독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동독쪽은 벌목하고 서독쪽은 동독으로 도망하려는 이들이 없으니굳이 철통 같은 감시를 할 필요가 없었고 더불어 벌목할 이유도 없었다고 틸만이 대답하더군요.

  틸만과 그의 아내 하이커. 틸만은 학생시절 ‘BUND 프라이부그 청년’모임을 주도했고 본 시절의 BUND 연방사무국, 베를린연방사무국을 거쳐 지금은 BUND 베를린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의 아내 하이커와는 프라이부그 청년모임에서 만나 지금까지 변치 않은 사랑을 키워오고 있다.

제가 있는 이곳 연구소 소장에 의하면 독일 통일이 러시아의 갑작스런 붕괴로 갑작스럽게 되었는데 남북한통일이 되려면 중국내부의 시민세력의 성장이 중요하고 중국내부의 뭔가소용돌이가 있어야만 남북 통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레 내다보시더군요.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의 시초가 스스로에 의해서 된 게 아니기 때문에 통일이 되는 것도 우리에 의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럴수록 더 남북한 양쪽의 지혜를 더 모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도 베를린에 와서 한달 일정으로 통일연구를 하겠다고 교민신문에 보니 그렇게 되어있더군요.

24시간 운행하는 전철 때문에 (주말에만) 새벽 2시까지도 길거리며 식당에는 사람들이 엄청 모여있습니다. 집에서 더위 때문에 끙끙대는 것보다 모두 나와서 저녁 바람을 쐬면서 맥주 한 잔 하는 게 이곳 사람들의 생활인듯 했습니다. 이곳은 에어컨디션이 없고 집은 지나치게 좁기 때문입니다. 독일 부엌은 좁아서 식사준비 하기가 어려울 정도. 냉장고도 작고 차도 작고 아무튼 검소가 몸에 밴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거의 모두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일회용컵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는게 예사인데 여기는 여하간 그 둘다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우리처럼 공원에 나와서 바비큐 하는 것을 무지 즐기더군요. 그래서인지 그 늦은 시간에도 맛있는 바비큐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들이 나가서 삼겹살 구워먹고 즐기는 것처럼. 그래서 지구의 벗(BUND) 베를린 사무국도 시민들의 야외 바비큐 관련하여 시민지침내용 등을 베를린 시 당국과 협의중이라고 합니다. 우리들과 너무 비슷하죠.

연방 지구의 벗(bund) 사무국에도 영어로 BBC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활동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하고 현재 연방사무국은 동서독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는데 그 문화적 차이며 일하는 방법의 차이가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책 담당자들은 모두 본 연방사무국 시절 활동가들이 베를린으로 그대로 왔고 행정업무 활동가들은 본에서 베를린으로의 이동이 힘들어 모두 동독 사람들로 채용이 되었는데 서로 말하는 차이, 일하는 방법의 차이가 무지 크다고 하면서 한국도 통일이 되면 이런 게 장난이 아닐거라고 하더군요.

지구의 벗 베를린 사무소의 회원은 15,000명. 지구의 벗 전국 회원수는 400,000명입니다. 회원수로 따지면 우리나라 환경시민단체들의 갈 길은 참으로 멀죠. 회비는 일년 50유로. 결국 한국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훨씬 더 적극적입니다, 재정기여도에서. 우리 회원들이 내는 회비는 1년에 80‐90 유로 가량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기업으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틸만에 의하면 베를린의 ‘길가(길가만, 길가 속은 말고)를 따라 서 있는 나무 수는 400,000 그루, 그중 지난 4년간 지구의 벗 베를린사무국이 심은 나무는 1,000 그루’라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 곳 포츠담을 갔습니다. 베를린에서 전철타고 30‐40분 가면 그 역사의 도시 포츠담인데 참으로 도시는 예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단이 시작된 곳이라는 것 때문에 나오는 슬픔도 어찌할 수 없더군요. 1943 카이로, 1945 얄타, 포츠담 회담을 거쳐 강대국에 의해 우리나라에 신탁통치안이 결정된 곳이기 때문에‐‐‐. 그래서 포츠담의 한곳 한곳이 그냥 보아지지 않았습니다.

권할만한 책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꼬레아 꼬레아니(카를로 로제티)

제가 베를린에서 공지영씨의 소설 ‘우리들이 행복한 시간’과 1890년대 주한 이태리 영사였던 카를로 로제티씨의 ‘코레아 코레아니’를 읽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 책 구하기도 어렵다가 이곳에서 아무튼 이런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께서 꼭 이 책을 읽어보십사 권하고 싶습니다. 전자는 실화 소설이고 너무나 많은 삶의 철학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진정의미있는 책입니다. 누군가 한 권사서 모두 나눠보면 좋을 듯 합니다. 활동가들 모두 돈이 없으니‐‐‐‐. 그리고 카를로 로제티의 그 책은 당시 우리 한국상을 많이 소개하는데 제가 봐도 제가 몰랐던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매우 따뜻합니다, 우리에 대해‐‐‐‐.

‐ 그 당시 그는 우리 한민족에게서 그 어떤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찾아볼수 없었답니다. 눈동자는 초점없고 힘없고 등등.

‐ 고종황제는 밤부엉이어서 주로 업무를 밤에 하셨고 대신들은 해가 지면 퇴청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입청했더군요. 황제가 업무를 저녁이 되면 시작하니‐‐‐.

‐ 한국사람들은 지나치게 안 씻어 이태리 영사의 눈에는 우리가 혼혈인처럼 보였답니다. 그는 일본의 한국지배가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한국을 지배하면서 위생관념을 안준 것은 이상하다고까지 되어있더군요. 그렇게 안씻고 더럽게 있을거면서 왜 흰옷은 입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더군요. 왕이 승하하면 백성들은 3년씩 흰옷을 입어야 하는데 세 분의 왕이 연거푸 돌아가시는 바람에 흰옷을 갑아입을 수가 없었는데 그게 굳어져서 생활이 되었다는 것을 적어놓기도 하였고…

‐ 그렇게 얼굴로는 순해보이는 한민족이 형벌제도는 왜 그렇게 잔인했던지에 대한 의문도 표하고 있더군요. 아무튼 현재 사형제도도 미국 일본과 함께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시행하고 있는 나라인데 그 당시 형벌제도는 제가 봐도 정말 심했더군요. 김옥균씨의 처형과정이며 사람을 처형하고 난 이후의 과정 등등이요.

‐ 그 영사는 또 ‘한국은 그렇게 중국을 바라보고 살았으면서도 정작 왜 중국이 갖고 있는 민주성은 한민족에게 찾아볼수 없는지’라고 했더군요. 그 사람이 보기에도 우리는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누구인가를 알기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권해드립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일본의 침략관련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역사책의 간단한 기술과 달리 잘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어떤 책 욕심도 없는데 이 책은 갖고 싶을정도이더군요. 물론 여러분들께서 이 책을 읽으시면 또 저와 달리 그책이 별거아니라고 판단하실 분도 계실텐데 아뭏튼 저는 좋은 책이라 판단이 들어 꼭 여러분들께 권해드리고 싶네요.

페루‐ 티티카카 호수 그리고 잉카인의 FTA 반대 싸움

베를린 인턴을 떠나오기 전에 페루와 갈라파고스 여행을 떠났드랬습니다. 서주원 전 총장님 등등과 해서요. 저는 학교에서 받은 인턴비용과 아르바이트 한 자금으로 여행계획을 세웠더랬죠. 페루는 생각보다 좀 힘들더었습니다. 그곳 사람들 조차도 수도 리마가 위험하니 리마 내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할 정도고 그리고 정작 잉카의 현장에서는 고산증이 사람을 무지하게 힘들게 하더군요.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가로질러 흐르는 티티카카호수에는 호전적인 잉카족을 피해 호수위에 집을 짓고 사는 우루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용하는 에너지는 태양열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호수 인근 산악지역에서 사는 이들의 에너지도 태양열이었는데 환경면에서도 우리가 더 배울게 많더군요.

사실 이 티티카카 호수를 가는 길은 무지 어려웠습니다. 처음 티티카카행 여행계획이 시위로 어려웠고 저의 티티카카 행은 일행과 일정을 달리하여 저 혼자 따로 이루어진 겁니다.

  티티카카 호수의 떠 있는 섬. 호전적인 잉카인들을 피해 우루족은 600년전 티티카카 호수위에 안착했다. 우루족의 어린이들과 함께.

“잉카의 최고 유적지 쿠스코에서 추운 밤 버스 9시 30분버스를 타고 8시간 걸려 티티카카호수가 있는 푸노에 도착하면 새벽 5시. 너무 추우니 밖에 나오지 말고 6시에 버스 밖으로 나오면 현지 가이드가 너희들을 티티카카 호수로 안내할거다”라는 게 쿠스코 현지 여행사의 말이었습니다.

자다 일어나보니 태양은 밝아오는듯 하고 차는 멈추었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라 저희는‘아 푸노에 도착했나보다’ 했습니다. 차에서 1시간 더 기다리고 밖에 나가보니(사실 버스안이 너무 추워 모두 푹 뒤집어쓰고 잠자는게 최고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 차는 버스터미널에 있는게 아니라 도로상에 있더군요. 꼬리에 꼬리를 문 차들과 함께. 이게 뭔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도로는 잉카인에 의해 점령되어 있고 잉카인들은 맨발인채로 불을 피우고 차를 끊여마시고 있고 관광객들로 보이는 유럽인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더군요.

  FTA 페루농민의 시위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던 도로상의 차량들 그리고 관광객들

  산에서 돌내리기를 하는 페루 농민들

  빨간 플래카드에서 페루농민의 목소리를

스페인어가 안되니 잉카인들과 이야기할 수는 없고 유럽인들 붙잡고 상황을 들으니 어제 저녁부터 시위가 벌어져서 차는 거의 진행을 못했고 현재 우리는 쿠스코에서 겨우 2시간거리에 와 있다는 거였습니다. 총 8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겨우 쿠스코로부터 2시간거리에 와 있다니 ‐‐. 시위의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모르고 그래서 겨우 15차례 정도의 사람한테 물어 들으니 미국‐페루간의 FTA협상반대 페루 전국 농민들의 시위라고 했습니다. 기습도로점거로(전국) 도로가 마비가 된 것이죠. 우리에 비하면 통신도 교통도 훨씬 약할텐데 그런 상황에서도 준비된 시위를 외국인들에게까지 알린 이들의 용감성의 근거는 어린이부터 나이든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서 이 시위에 동참하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추피추에만도 콩 종류가 4000가지가 넘는다는데 미국과의 FTA협상으로 GMO 콩이 미국에서 막무가내 들어오면 이곳 선량한 농민들의 삶은 보나마나 뻔하죠. 그래서 그들의 외침이 이해가 가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Via Campesina (농민의 길)를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들은 길에 바위를 쪼개서 길을 막아두었는데 바리케이드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차들이 진행하지 못하도록 4‐5m 간격으로 돌을 쌓아두었으니 차들이 진행을 못할 밖에요. 저희는 다음날 페루 리마에서 에쿠아도르로 가야하는 관계로 시위의 끝남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티티카카호수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걸어서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간다 였습니다. 시쿠아니라는 소도시는 쿠스코와 차로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니 어쨌거나 쿠스코 가까이 가는게 우리한테는 유리하니까요.

우리는 캐나다그룹과 함께 걷기를 했습니다. 총 3명중 한명은 페루인 그러나 그역시 캐나다에 살고 있어서 스페인어/영어가 다 되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습니다.

모든 짐을 들고 지고 그냥 무작정 걸었습니다. 지나다 잉카인들을 만나면 잉카 현지인들은 시쿠아니까지 걸어서 2시간 걸린다고 하기도 하고 3시간 걸린다고 하기도 하고 4시간 걸린다고 하기도 하고 하여간 모두 말은 다르더군요. 그러나 정작 우리가 걸었던 시간은 7‐8시간이었습니다. 중간중간 마을을 지나다 보면 잉카인들은 마을에 모여 시위에 대한 상황공유, 회의 등을 하고 있고 모두가 꽤 심각한 태도로 라디오에 귀를 귀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우리한테 배고프지 않게 하고 피곤하지 않게 하는 잎이니 씹으면서 가라고 코카잎도 주시고‐‐‐‐. 시위 덕분에 페루 시골길을 7시간이나 걸을 수 있는 행운도 누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페루 시골의 그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나라 시골길처럼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도중 화장실이 없었을때는 우리 모두가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곳 사람들에게 화장실을 물으면 화장실은 없고 모두 강가를 가리킵니다. 시쿠아니에 도착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약 잉카인들이 7‐8시간 걸릴거라고 했으면 처음부터 걸을 엄두를 못냈을텐데 다행히 5시간 안짝으로 말해줘서 감히 걷기를 단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티티카카는 못보았지만 FTA의 심각성과 페루 시골의 아름다움도 만끽할 수 있어서 그것도 좋았습니다. 중간중간에 걷기에 지쳐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널부려져 있다는 표현이 정말 맞습니다.) 여행객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은 또 우리의 그룹이 되어 서로 위로하며 걷기를 단행했습니다. 뜨거운 햇볕과 무거운 침과 친구하며 그리고 페루의 아름다운 시골풍경과 함께 하며.

시쿠아니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고 쿠스코의 우리 여행사에 전화를 해 우리를 데리러 오라고 했고 우리 모두는 그 차를 눈을 씻고 기다렸지만 차는 안 오더군요. 할 수 없이 밤 7시 30분에 재개된 쿠스코행 버스를 탔습니다. 그 버스를 타는 것도 전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쿠스코행을 원했기에 버스가 오면 모두 우루루 몰려가서 모두가 타려하니‐‐‐‐. 7시간의 걷기 도중 캐나다그룹과 우리 한국인 그룹은 거의 형제그룹처럼 되었고 중간에 널부려졌던 그룹(페루인,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등)들도 마치 친형제처럼 되었습니다. 모두가 13명이었는데 ‘우리 13명은 무조건 함께다”이런 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죠. 그래서 버스를 타고서도 다 우리 걷기 멤버가 다 탔는지 확인할 정도였으니 7시간만에 결성된 가상한 동지애였습니다. 사실 이름도 모르는데 서로.

버스를 타서 모두가 엄습하는 피곤함으로 곯아 떨어졌고 도착했겠지 하고 일어나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버스는 진행을 거의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도로상에서 시위가 진행되었고 도로상에서 차가 불태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에쿠아도르행 비행이 불가능하겠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한데 누군가가 후래쉬를 들고 버스안에 올라서는 “이 차안에 한국에서 온 김춘이가 있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래서 ‘나’라고 고개를 들고 일어나니 그녀는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던 여행사 직원 잉그리뜨였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오던 중 차의 진행이 어려웠고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길가에 늘어선 모든 버스에 올라 똑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지 20번째쯤의 버스에서 저를 발견하였던 거죠. 그녀의 프로정신에 탄복했습니다. 정통 잉카 후예인 그녀는 꼭 몽골사람과 한국사람을 섞어둔 듯 합니다. 그녀의 광대뼈는 지금도 안 잊혀집니다. 모두가 반가워서 얼싸안고 걷기 형제들 13명이 모두 짐을 이고 지고 다시 시위현장 저 너머 그녀의 차로 갔습니다. 그렇게 이고 지고 걷는데 밤하늘의 별빛은 쏟아지더군요. 그리고 무사히 쿠스코로 올 수 있었습니다.

  장장 7시간의 대장정을 함께 한 ‘다국적 널부러짐이들’ 우리들의 승리사인은 농민의 길(Via Campesina)이었다.

그날 저녁 느꼈던 감회는 뭐랄까 제가 일상을 통해서 항상 느끼는 것 “인생이 쉽지가 않다, 인생이 만만치 않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뜻하지 않게 풀리는 실마리 때문에 “인생은 재미있기도 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구나” 였습니다.

여기 독일을 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뉴욕공항에서 독일행 비행기 출발은 6월 21일 오후 5시 45분이었고 뉴욕에서 공항버스를 탄 시간은 오후 2 30분. 아주 넉넉하게 많이 잡아도 그랜드 센트럴에서 공항까지 1시간 걸리는 거리,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교통혼란은 지독했고 버스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20분이었습니다. 비행기 타긴 글렀구나 생각하고 비행기 못타지? 하고 데스크에 물으니 대답은 의외로 ‘비행기가 지연되어 밤 10시에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거였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이몽룡이 거지행색중 춘향의 집에 들러 밥알을 보고 했다던 ‘밥아 너 본지 오래구나’ 하고 허겁지겁 먹은 밥보다도 더 꿀맛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때도 버스에서 잘도 흘러가는 시간, 가지도 않는 버스를 보고 ‘참 인생이란게 쉽지 않다’를 절감하고 또 절감했는 데 의외의 연착 대답을 들으니 “이래서 인생은 살 가치가 있나보다”가 단박에 또 절감이 되는 형국이었습니다.

갈라파고스 – 야생동물, 그들의 일상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갈라파고스는 그냥 천국입니다. 우리를 보고 날아가버릴 새들 혹은 동물들을 고려해 땅 색깔과 주변색깔과 비슷한 옷을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곳의 동물들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가도 그들의 새끼보호나 짝짓기 등을 그대로 합니다. 다아윈이 쓴 갈라파고스 여행기를 읽으면 당시 그곳의 거북이를 잡아먹고 이구아나는 매우 추하다고 서술했는데 아무튼 이 동물들이 지천이어서 (이구아나. 바다 사자, 온갖 새들) 그냥 동물의 천국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이구아나와 바다사자 등은 마치 과장 좀 해서 서울의 사람들처럼 많습니다.

큰 바위에는 바위색깔과 같은 이구아나들이 떼로 몰려있습니다. 하도 바위색깔과 같은지라 그것이 이구아나인줄도 모르고 지나다가 무슨 꼬리같은게 있다 싶어 보면 이구아나들이 잔뜩잔뜩 ‐‐‐‐. 우리가 걸어가도 그들은 그들의 일상을 계속하고 오히려 우리가 피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한 이삼일 지나면 그들을 봐도 무심하게까지 됩니다.

우리들 입에서조차 바다사자 그만 좀 보면 안돼 ? 라는 장난스런 말까지 나올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좋았습니다. 그들을 본 신기함에 소리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그들도 일상을 살아가고 있구나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수영을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바다사자랑 펭귄이랑 함께 수영을 하죠. 태초의 삶이 이랬겠지 싶었습니다.

  으럇차챠 바다수영은 날 따라올 자가 없지 에헴!!!

  엄마젖 먹다 말고 나도 사람들 구경한번 해야지 !!!

  바다가까이의 바위에서 거주하며 이끼를 먹고 사는 바다이구아나(marine iguana). 바위인지 이구아나인지 구분이 안간다.

  나도 덥단 말야, 내게도 그늘을!!! 라고 외치는 이는 바로 땅에 사는 이구아나(land iguana).

우리 편이 아닌 신 – 이스라엘과 레바논 전쟁

지금 이스라엘 헤즈볼라간 전쟁이 한창입니다. 이번 남미여행중 가장 많이 만난 이들은 이스라엘 남녀 청년들이었습니다. 남녀 모두 혼자씩 여행하다가 얼마나 이스라엘 여행객이 많은지 그룹을 형성할 정도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마치고 군대에서 3년‐5년을 마치고 나오면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여행을 합니다. 명령체계로부터 굳어진 머리를 씻기 위해. 그리고 대학을 갑니다.

남미대륙을 1년 기간을 잡고 여행하는 그들은 스페인어가 하나도 안된채로 왔다가 7‐8개월 후에는 거의 웬만한 스페인어는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들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관련 이야기를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둘다 어리석다”였습니다. 자식세대에는 이 분쟁이 종결되리라고 그들의 부모는 기대했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그들은 힘들어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지금 레바논을 무차별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곳 독일의 운동가들마저도 이스라엘 레바논간 전쟁 이야기를 하면 그 책임을 먼저 헤즈볼라에게 돌리더군요. 독일은 과거 유태인 학살이라는 원죄가 있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하더군요. 미국의 정책은 “당장 전쟁 중단”이 아니고 유엔 코피아난 사무총장의 정책은 “지금당장 중단”. 그래서 부시도 코피아난을 싫어하나 봅니다(부시와 토니블레어간의 G8정상회담시 내용을 보면).

그러나 코피아난도 먼저 헤즈볼라에게 먼저 책임을 돌리는 것을 보고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저는 실망했습니다.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시민들은 죽어가는데 세계 지도자들의 행동은 너무 늦군요. 빨리 이스라엘로 날아가서 먼저 이스라엘 설득하여 공격그만케 하고 헤즈볼라에게도 공격중단을 설득하면 되는데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 11일째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400여명이 가까워오니 이제서야 사람들은 중동을 방문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사람들에게 인도지원이 가능한 루트는 열어놓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서‐‐‐‐.

죽어가는 시민들을 눈앞에 두고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단지 CNN뉴스를 보면서 전쟁의 무모함을 느끼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다시 일상의 삶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많이 괴롭습니다. 독일어를 못하니 뉴스는 항상 CNN을 틀어놓는데 그때마다 CNN은 죽어나가는 레바논 인들을 보여줍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나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지금 나처럼 그렇게 죽어나가는 시민들과 무관하게 일하고 밥먹고 책읽고 여름휴가 즐기고 베를린장벽 구경하겠지 싶으니 오싹한 느낌이 듭니다.

지금 신은 우리 편이 아닌가 봅니다. 세계의 평화는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들로부터 저렇게 멀어져만 가니 ‐‐‐‐.

우리모두가 노력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으로 전쟁당사자 국민의 무지막지한 고통때문에는 물론이고 세계시민들이 자신들이 전쟁이 난 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자기분노와 죄책감을 느끼기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요‐‐‐.

방금 CNN에서 이라크 바그다드 시장에서 차량폭파소식을 전하는데 그 폭파된 차량을 보니 우리나라 이화 독서실 차량입니다. 우리나라 중고차량이 이라크에 갔나 보네요. 여기저기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간 죽음에 대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쟁이 빨리 종결되기를 바라면서 베를린에서 김춘이가 드렸습니다.
덧붙이는 말

김춘이 님은 환경운동연합 국제부장으로, 민중언론 참세상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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