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호철] 참세상 논설위원

시베리아의 잊혀진 한인 노동자들과 혁명운동

[기고]바이칼과 시베리아, 내몽고지역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흔적

여름 휴가철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여름 여행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바이칼호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같은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 중 자신들이 타고 가는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레일들이 1910년대 망국과 가난을 피해 시베리아까지 흘러온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의 응고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추위와 가난 등 열악한 조건하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가던 이들 중 상당수가 1917년 러시아혁명과 이후 반혁명세력과의 혁명전쟁에 러시아, 중국, 일본, 몽고의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로 지난 7월 중순 바이칼과 시베리아, 내몽고지역에 대한 한 역사 탐사팀에 합류했다가 이 같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됐다.

바이칼호 탐사를 마치고 바이칼의 전진기지라고 볼 수 있는 이르쿠츠크(일제시대 조선공산당과 인연이 많은 도시다)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내린 곳은 바이칼 호를 가운데에 놓고 이르쿠츠크의 정반대, 즉 바이칼호의 동남쪽에 위치한 러시아의 브라이트자치주의 수도인 울란우데. 울란우데는 붉은 강이라는 뜻으로 브라이트족은 몽고계로 DNA 검사결과 한민족과 가장 유사한 DNA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브리아트족에 대해서 울란우데 역에서 만난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시내도보관광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은 레닌의 거대한 두상이었다. 소련동구 몰락후 이제는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는 레닌의 동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에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 가까이 다가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의 두상이라는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러시아가 거대한 나라로 예전에는 황제의 칙령이 변방에 도착하는데 만 일 년이 걸렸고 지금도 시장경제가 완전히 자리잡은 모스코바와 달리 변방은 사회주의의 유제가 상당히 남아 있다는 이르쿠츠크에서 만난 현지 한인교수의 설명이 생각났다. 그런데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자 조각의 대리석 받침대의 아래쪽 대리석 2개가 다른 대리석과 다른 검은 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의아해 옆으로 돌아가자 옆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바퀴를 완전히 돌자 흥미롭게도 받침대와 조각 어디에도 조각에 대해 설명한 글씨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아, 그렇구나. 소련이 몰락한뒤 레닌을 찬양하는 문구를 써 놓았던 하단부의 대리석을 없애고 새 대리석으로 갈아 넣은 것이 분명하구나”라고 나름대로 추리를 해봤다.

  동시베리아 울란우데시의 혁명광장에 서있는 혁명열사비
다른 거리로 들어서자 멀리 탑이 하나 보였다. 그것 역시 혁명관련 유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가이드에게 물어보자 혁명광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쪽에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광장에 서 있는 탑의 뒷면으로 돌아가자 탑의 뒷면에 내려 쓰기로 낯익은 한글이 나타난 것이다. 시베리아 한 가운데에서 한글 탑을 발견하다니. 게다가 “공산주의로 분투하다가 전사한 동무들에게”라는 내용이라니. 흥분을 가라 앉히고 자세히 보니 똑같은 내용을 한글 이외에도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로 써 놓은 것이다. 문제는 이 글이 언제 써넣은 것이냐는 점이다. 글씨가 요즈음 쓰지 않는 고어체여서 상당한 기간이 흐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1945년 이후 소련이 소위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차원에서 세워 놓은 탑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앞면에 보니 러시아어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공산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써 놓고 1920년 11월 7일 이라고 쓰여 있었다. 결국 이 탑이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뒤인 1920년에 만든 것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추모하는 ‘한국인 동무들’ 역시 러시아혁명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의문은 이 한국인들이 상 페트로부르크 등 전국적으로 러시아혁명에 죽은 한국인들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의미하는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이드는 당시 여기에서도 시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뿐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해답은 이어 방문한 브라이트 역사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가자 전문안내원인 아크한야노프 징기스씨가 가이드의 통역을 통해 전시물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여느 박물관처럼 이 박물관도 고대부터 현대의 순으로 전시를 하고 있어 징기스씨도 고대유물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문제의 탑에 있기에 혼자 정반대쪽의 현대사쪽으로 가로질러 갔다. 설명들이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 알 수 없으나 낡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회사진이었다. 게다가 다행히 러시아어 이외에도 영어로도 설명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황량한 소도시에서 데모를 하는 사진인데 설명을 보니 차르를 몰아내기 위해 1917년 2월 이곳 동시베리아에서 시위를 하는 장면이었다. 1917년 혁명당시 이곳 동시베리아에서도 차르를 몰아내기 위한 시위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탑은 이같은 시위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탑일 것이고, 또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곳에 한인들이 살고 있었고 러시아혁명과정에 참여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이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카메라를 꺼내 이 사진을 촬영하자 다른 직원이 달려와 한 장에 50루블이라며 돈을 내라고 성화다. 돈이 아까울 소냐, 돈을 꺼내 지불했다.


얼마 뒤 박물관 안내원이 다른 전시물의 설명을 마치고 이쪽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10년대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몽고인들이 시베리아철도건설을 위해 노동자로 와 이곳에 정착하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중 한인의 수는 약 1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로 러시아혁명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 러시아인, 중국, 일본, 몽고인들과 함께 1917년 동시베리아 지역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모인 노동자, 병사, 농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했고 이후 일본이 백군, 즉 반혁명군을 도와 이 지역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혁명과정에서 모두 10만명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 문제의 탑은 이들을 기리는 것이라고 징그스씨는 설명했다. 이중 희생자중 몇 명이 한인이었느냐는 질문에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혁명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희생이 된 사람만이 아니라 열악한 식량사정 등으로 사망한 사람까지를 포함하면 70%인 7천명이 희생됐다고 대답했다. 답답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10년대 망국과 가난을 피해 우리의 선조들이 이곳 바이칼해 근처의 시베리아까지 이주해 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일본, 중국, 몽고 노동자들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건설에 참여했고, 이중 상당수가 노예 같은 삶에 저항해 러시아혁명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문득 26년 전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1980년 봄 기자로 일하다가 광주학살에 대한 전두환일당의 보도통제에 저항해 신문제작거부운동을 벌리다 언론사를 떠나 유학을 가야했다. 도착한 미국 텍사스 오스틴의 한 헌 책방에서 「야만의 멕시코」라는 낡은 책을 발견했다. 1910년대의 멕시코를 여행한 한 진보적인 미국저널리스트가 멕시코의 야만적 현실을 고발한 글인데 재미있을 것 같아 사가지고 집으로 와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기자가 유카탄반도를 가자 발에 노예처럼 쇠고랑을 맨 동양인이 있어 누구냐고 물어보자 속아서 이곳으로 팔려온 한국인이라고 답했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적인 그 내용에 그 책을 가지고 다음 해 한국에 들어와 한 기자에게 주며 취재해보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이후 나의 귀띔이 단서가 됐는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깽」이 책으로 출간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에피소드처럼 누군가 이들 시베리아 한인 노동자들의 잊혀진 이야기를 추적해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시베리아 열차는 무심하게 탈 수가 없었다.
덧붙이는 말

손호철 님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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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아는거

    1917년 혁명과 러시아 내전에 조선인들이 참여했다는 것.
    그들이 적군 편에서 함께 싸웠다는 것.
    상식 아닌가?

  • 69

    이미 책으로도 출간된 고려인 여성혁명가 올씨다.
    너무도 극적인 그의 삶을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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