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시인이기를 꿈꾸며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4) - 행복하지만 불행한 시인 김명환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편집자 주




1984년, 그해 겨울엔 눈이 참 많이 왔었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밤 나
는 내가 처음으로 시를 발표한 사화집 『시여 무기여』 출판기념회에 가서 술을 퍼마셨다. 같이 시인이 된 친구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고통과 기쁨과 절망과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술만 마셔댔다.

3찬가, 4찬가 술집을 바꾸러 가는 길에서 나는 탈출했다. ‘25시’에서 안소니 퀸이 탈출하던 것처럼 뒷걸음을 치다 줄행랑을 놓았다.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눈이 끝없이 쏟아졌다. 시는 노동자가 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시 같은 건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울고 있었다.

시인이 있어야 할 곳과, 해야 할 행동과, 써야 할 글들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던 나는 몇 년 동안 농촌, 광산촌, 공단을 돌아다니며 농민, 노동자들과 소모임을 했다. 주제를 정해 토론을 하고 토론 결과를 시의 형식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돌려 읽으며 고쳐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그것을 유인물로 만들어 지역에 배포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시가 되고 유인물이 되는 놀랍고도 신기한 일들이 지속됐고, 그 유인물들은 지역에서 호평을 받았다.

1988년 겨울, 나는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 준비팀에 합류했다. 몇 년 동안 내가 해왔던 것처럼, 많은 문인들이 투쟁 현장에 파견되어 작품을 생산하고 선전활동과 문예지원활동을 하는 것을 나는 꿈 꿨다. 문인들과 학습을 하고, 작품을 기획 창작하고, 임단투 지원활동, 지역 문학소모임 지원활동, 문화선전 연대 사업 등 빛나는 활동들을 벌여나갔다.

1991년 겨울, 쏘비에트연합의 해체와 함께 나의 문예활동도 종언을 고했다.




십 년만 더 젊었더라면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했을 거라던
백발이 성성한 이기형 선생님이
새로 나온 시집을 주고 갔다
고요한 돈강 개정판 교정을 보다
엉거주춤 시집을 받은 나는
일흔다섯 노인네의 시를 읽으며
내 나이를 생각했다
고요한 돈강은 말없이 흐르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고통과 희망과 분노를 싣고
말없이 흐르고 십 년이 아니라 사십 년도 더 젊은
서른세 살이 팽개치고 나온 현장은 아득하기만 한데
일흔다섯이나 먹은 노인네가
역사의 회한과 칼빛 매서운 희망을 노래한다
운동이고 나발이고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교정을 보는 고요한 돈강은 말없이 흐르고
역사와 역사의 강은 말없이 흐르는데
일흔다섯 살 젊은이의 시집을 읽는
서른세 살 노인네는 부끄러웠다.

- 졸시 ‘고요한 돈강’ 전문




내가 다시 노동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것은 문예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문학작품을 쓰기 위해서도 아니다. 시인이 있어야 할 곳이 꼭 노동현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단지 부끄러웠다. 빛나게 달려오던 내 젊은 날의 꿈이 부끄러웠고, 그 꿈꾸던 시인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십 년이 넘게 현장생활을 하며 나는 운동조직이나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들면 선전일을 자청해서 맡아 짧은 기간 활동했다.

나는 운이 좋은 시인이기도 하지만 운이 나쁜 시인이기도 하다. 민주화투쟁과 혁명운동과 신자유주의반대투쟁의 언저리에서 나는 선전일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빛나는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나는 혁명을 노래해야 할 시인이었지만
도둑처럼 다가올 새벽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빛살로 날아오르는 노래 한 곡 부르지 못하고
산길을 서성이며 젊은 날을 보냈다
한번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산을 내려가야 할 때가 되면
아주 낮고 쓸쓸한 휘파람을 불며
저녁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오래 산길을 걸어왔다
모두가 떠나간 외로운 안개 숲에서
나는 전향을 꿈꾼다. 눈물 속에 타오르는
붉은 태양을 노래하기 위해
내 젊은 벗들처럼 산을 오르고 싶다.

- 졸시 ‘망실공비를 위하여 2’ 전문



하지만 나는 시인이고,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기를 꿈꾸는 사람이다.


덧붙이는 말

김명환 시인은 철도노동자다. 철도에서 펴내는 선전물 곳곳에는 그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시인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노동해방문학> 창간에 참여했고, <시여 무기여>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색한 휴식>을 갈무리에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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