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기 위해 싸웠고, 거기에 농업이 있었다

[가마타 사토시의 산리즈카 40년](5) - 이시이 츠네지 씨에게 듣는다(下)

부부의 힘으로 개척한 농지

이시이츠네지 씨는 4,5번 체포된 경험이 있는 청년행동단의 멤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까지 소개해 온 시무라쇼지, 코이즈미히데마사, 야나가와히데오 씨와는 다른 느낌을 풍긴다. 이것이야말로 운동의 퇴조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앞으로의 어떤 방향을 제시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잠정활주로에서 날아올라가는 여객기. 왼쪽 아래의 건물은 공동출하장

산리즈카 투쟁의 초기에는 모두가 참가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청년행동단이라고 불려지기 전부터 청년단이란 것이 중심이 되어서 반대운동을 해왔었으니까요. 결국 누군가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필요했으니까요. 처음에는 분노 때문에 모두들 가열차게 움직였지만, 조금 생각해보니까 이주해버리는 편이 득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결국 그 쪽으로 다들 가게 된 거지요. 내가 자주 들은 말이 있는데 [꼭 공항 건설에 찬성해서 (땅을) 파는 것이 아니다. 우리집 경제 사정을 생각하면 역시 팔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밭떼기가 있어도 나도 같이 투쟁할 수 있는데] 라는 거였어요.

그런 사람들은 몇 정보(마지기) 정도를 경작하고 있었습니까?

1정보 전후입니다. 여기가 역시 갈림길이었지요.

1정보가 분기점이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역시 더 분투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웃음) 반대운동을 계속 해오면서 [당신은 복 받은 편이다] 란 말을 자주 들었지요. [당신들은 반대 운동을 할 수도 있는 형편이니까] 라는 식으로요. 처음부터 연대운동을 온 사람들로부터도 [당신들은 결국 쁘띠부르조아의 투쟁 아닌가. 안 되면 팔아버리면 돈이 되니까] 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연대해 주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쁘띠부루조아의 투쟁이 아니라 인민의 투쟁이지요. 정부의 횡포에 대항해서 저항했던 것이니까요. 그런 저항이 없으면 이 세상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버지 이시이 다케시 씨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다케시 씨 대에 처음으로 이곳에 오셨지요?

그렇습니다.

일대에 다 이루어버리고 그게 허리로 온 걸까요? 젊을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다들 그렇게 합니다.

아버지 세대에서는 몇인 가족으로 시작했습니까?

부부가 둘이서 했어요.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렇죠. 여긴 대밭이나 소나무 숲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계는 전혀 사용하지 않않을 테지요

그렇죠. [쟁이 한자루로 일궜다]고 했으니까요.

롯까쇼촌(현재 핵 재처리 시설로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의 개척도 똑같습니다. 여기는 전후 개척지쟎아요. 긴급개척이라고 했지요. 전후의 긴급개척. 그것도 국책이라고 불렸지요. 전부 국책이네요. 전후개척, 실크콤비나이트, 그리고 공항건설도

거기에 전쟁도 있습니다. 붉은 종이 한장으로 소집되어서 말이죠. 여기에 백성으로 들어와 겨우 먹고 사는가 싶으니 이번에는 공항이라니.

이시이 다케시 씨는 농부의 아들이었지요. 근엄했지만 일만 아는 매우 성실한 분이셨지요

일이 서툰 사람은 아니어요. 일 잘하는 사람이라 역시 백성으로 남았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결국 아버님께서는 투쟁의 전선에서 즐겁게 싸운 분이었는데요. 그 분에게 있어서 투쟁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유언이나 뭐 그런 것 없었습니까?

유언? (웃음)

즐거웠다 라든가

아니요, 아무말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말이지요, 역시 모두 평범한 인간입니다. 역시 좀 더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좀 더 살고 싶었다. .. 78세였었지요? 이 지역에서는 빠른 편인가요. 아츠타 씨는 좀 더 오래 사셨지요. 투쟁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음 부자지간의 대화란 게 그렇게 많지 않은 법입니다. 도리어 다른 분들이 훨씬 더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겁니다.

공단이나 운송성은 수없이 사과문을 제출

지금은 이렇게 비행기가 뜨고, 굉음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 글쎄요.. 뭐라고 할까..시끄럽다고 생각하지요(웃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 상황은 그저 시끄러울 뿐이지요. 시마무라쇼지 씨는 지금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저는 [열심히 싸우는 게 능사는 아니다] 라고 하지요. 그러면 쇼지 씨도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라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그렇지요. 그 후 이야기가 서로 좀처럼 진전되지 않아요.

결국 잠정적이라는 형태로 최종적으로 비행기가 뜨고 만 것 아닙니까. 잠정적이라고 하는 시점까지는, 역시 나 자신이 노력함으로 인해서 공항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 자신감들이 있었던 겁니다. 한 명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도 실제 모두가 해내었던 일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번 북측연장이라고 하는 시점에서는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던지 없던지 간에 그냥 결정되어 버리고 만 상황이 되었죠. 이제 운동은 끝난 거 아닌가, 그렇게 보려고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하는 거요. 제 기분은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의 공항 현황도 총리가 바뀔 때마다 몇 번이나 사과장이며 뭐며 잔뜩 날라옵니다. 국토건설성으로 바뀌기 전의 운수성 때도, 당국이 사과만 하면 공항은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었어요. 우리들은 엄청나게 바보취급을 받아온 셈이지요. 그런 등등을 생각하면 화나는 일 투성이입니다.

반대의 논리도 역시 낡은 논리였지요. 나는 [공항폐쇄 요구선언의 모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공항의 개항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실제로는 공항이 지어진 현실에서 다시 운동을 일으켜 가야만 했던 위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의 운동이 지금까지의 운동에서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반대]하러 왔기 때문에, 만들어진 후에도 계속 반대만 하는 것이고, 계속 반대해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반대와 찬성만이 아니라 다른 논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의 하나가 [원탁회의]였는데, 나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츠네지 씨는 원탁회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원탁회의 때에는 아직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국가가 도피처를 만들고 있쟎나하는게 내 생각이었거든요. 요약하면 어떻게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줄까를 계속해서 생각했었요. 그러니까 대화에 의해서 공항을 만들자는 말은 이야기가 잘 되면 공항을 안 만들 수도 있는 거쟎아요. 상당히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야기지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나는 어째튼 최후의 국가의 도피처를 원탁에 의해서 만들 수 있을꺼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았어요.

그래서 활주로 하나로 족하지 않느냐는 운동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던 거군요. 다른 곳에도 국제 공항은 있으니까요. 당시에는 나리타 공항에만 5개의 활주로를 만들려고 했었는데 3개로 축소된 거고, 다른 지역에도 국제 공항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니까 한 개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는, 즉 폐항에서 축소로 다시 한번 맞서볼 수단이 있었던 거네요

응 그러게요. 그 시대였다면 말이지요. 그 때 그 심포지엄을 했던 때에는 실제로 운수성 내부에서도 아직 잠정적이라는 단어를 생각치 못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운동면에서 조금만 별도의 전개방식을 펼쳤더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다른 수단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국토교통성 내의 사람들도 끌어들인다든가 하는 것도 가능했었을 터이고.

  이시이츠네지

어떻게 반대의 논리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도쿠시마현 요시노강의 반대운동은 건설성 사람들이랑 자주 토론을 해왔지요. 찬성파와 반대파가 함께 집회를 갖기도 했었지요. 점점 논쟁을 해가면서 결국 논리로는 더 이상 상대편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지요. 산리즈카의 투쟁의 경험도 참고가 되었기에 그렇게 가능했을 터지만요

그렇지요. 다른 곳들은 잘 이용하고 있어요.

보세요, 어차피 현재 26년 동안 지금의 활주로 한 개로 계속 버터왔쟎아요

여기도 최근의 일이지만, 반대파 중에서도 집을 방음으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소음을 참으면서 공항이 폐쇄될때까지 방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하기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런 논리란 게 옳다면 인정할 수 있지만, 통하지 않쟎아요. 지고 있는 상태닌까. 비행기는 뜨는데, 참으면서, 그것이야말로 방음이 되어 버린 상태가 된 거쟎아요.

몸 생각하면 난 방음하는 편이 좋은 것 같은데요. 방음해도 그들의 조건에 굴한 거라고는 생각치 않아요. 밤낮으로 이런 소음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소음 소송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인권문제거든요.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밭 주변에 맘대로 공항을 만들어놨으니까.

소음 보상을 받으면 비행기가 뜨는 걸 인정하는 것이 된다라고 말을 하지요. 보상이 받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으로 그러면 아무 소리 못하고 계속 참고 있으란 소리인가 라는 말도 있어요.

그건 제대로 논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되겠네요. 모두들 무서워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거네요. 모두가 이야기해서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이제부터 나 같은 절대 반대파(웃음)에게도 방음 공사를 하라는 것도 웃긴다든가 하는 얘기도 있으니까요. 그런걸 전부 털어놓고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는 이야기를 모두가 함께 해 나갈 수 밖에 없네요

다만, 뭐랄까. 모두들 반대 운동을 해 오면서 공항건설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고,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는 떠버렸거든. 그래서 그 이후에 열심히 싸우는 것들은 다 오기로 하는 것 같은 그런 부분이 있어요. 물론, 오기로라도 싸워서 결국 내 세대에서, 내가 죽기 전까지는 싸워가겠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그런게 완전히 성립하는 게 아니쟎아요.

그렇네요

내가 최근에 생각하는 건 수많은 반대운동을 해 왔지만 지금은 저렇게 붕붕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고,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성도 있쟎아요? 옛날에 토무라(잇사쿠) 씨가 [투쟁의 일상화] 던가 [투쟁의 생활화] 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나와 모두들 그런 생각으로 투쟁을 해 왔던 겁니다. 그런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 하면 투쟁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서 태어난 거거든요. 그게 마치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것 때문에 열심히 싸워 온 셈이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나이를 먹으면서 역시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생명의 존귀함이라든가 건강이라든가 그런 것. 그러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반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투쟁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발상에서 조금은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이곳에서 집회를 갖고 있지만, 원탁회의 심포지움 이후로는 운동과는 약간 선을 긋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운동에서 조금은 선을 긋고, 나는 투쟁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나는 열심히 노력한다라고. 거기에 바로 농업이 있고, 투쟁이 있고 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토지를 판다, 팔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역시 이곳은 제대로 된 곳이 아니다라고 하는 게 결론에 이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열심히 하는 것도 제대로 된 행동이 아니게 되는 것이고. 자 그렇다고, 내일 땅을 팔자라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고민하는 것이고.

  카마타사토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산다

처음 시작이 이곳이었던 당사자들인 백성과는 달리, 신좌익을 포함한 지원자들은 투쟁의 지원으로 왔었지요. 투쟁이 없어졌으니까 지원은 모두 끝났다고 사라져버렸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요. 그렇지 않았다는 건, [원파크] 나 유기농법으로 또 다른 인간 관계를 만들어 왔으니까요. 그 인간 관계를 만들어 가는 가운데서 지원자들 간에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 이야기할 수 도 있었는데, 나 자신 꿔온 자루와 같은 느낌으로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식이 되버렸어요. 그래서 그 후로는 이곳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만으로 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되버렸어요. 다른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당시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좀처럼 함께 생각해낼 수 없었던 거지요. 좀 더 모두를 포함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투쟁지원 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농업문제만도 아니고 공항 문제만도 아닌 공항 문제, 농업 문제 등 전부를 포함한 형태로, 바로 이곳에서 백성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겠지요. 백성의 힘만으로 공항에 제동을 걸려고했고, 우리들 지원세력이 구체적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에 계속 시간이 흘러버렸던 거지요. 지원을 위해 여기에 실제 남은 사람들, 하야시씨라든가 히라노씨 등, 그리고 안내해주신 야마자키 야스시씨 등은 구체적인 실천을 해 왔지만요.

뭐, 지원이 없어진 것도, 공항에 반대하는 백성이 없어지는 것도 결국은 똑같은 거지요.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논리로는 모두 다 계속되지 않는다는거죠. 다들 제각각의 생활이 있쟎아요. 역시 일시적으로는 그런 생활을 희생할 수 있지만, 다시 말하면, 산리즈카에 모두가 왔던 것은 생활을 희생시키고 직장에다는 비밀로 하고 그리고 안 잡히면 다행이었지만 잡힌 사람들은 그걸로 해고당해서 생활이 될까 말까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쟎아요.

상당수가 해고 당했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직장에서 쫒겨났지만 사형당한 건 아니니까

응 그렇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로 해고 당한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해고시키는 쪽이 문제가 있는거지. 나도 일도 거의 하지 않고 노농합숙소에는 늘 왔었지요. 재미있었으니 왔던 거거든요(웃음). 결국, 미이라 잡기로 시작한 게 자신이 미이라가 되어버려서 쓸 수 없게 되버렸지만

그렇지요. 즐겁긴 했었지요

-즐거웠어요. 매일 매일 상황이 변해가고 운동도 고조되고 있었구. 살아있는 보람이 있었어요. 죽거나 살해당한 사람들은 안됐지만

정말로, 죽거나 상처로 하반신 불구가 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평생 휠체어를 타게 된 사람들도 많았죠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지금은 더 이상 모습을 안보이니까 잘 모른다구요. 사실은 이런 부분을 우리들이 가장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되는건데. 지금 편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더 말이지요.

[번역] - 이영채
덧붙이는 말

노동정보 703호(2006년9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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