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알프레드 D. 수자,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가 있다. 자세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사랑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시구 뒤에 생략된 의미를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물론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반복해 본 사람이라면, 결국 사랑에 지친 사람이라면 그 공감대는 더욱 더 클 것이다.
삶의 경험은, 특히 상처받고 실패해 본 흔적은 삶의 열정을 자기 검열한다. 누구나 불타는 열정 뒤에 싸늘하게 밀려 올 삶의 고통과 회의로부터 자신을 본능적으로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상처는 인간의 가장 열정적이고 내밀한 행위인 “사랑”마저도 불신과 냉소에 그늘지게 한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조차 관성과 타협이라는 식어버린 감정의 길로 끊임없이 유혹한다.
어느새 한미FTA 4차 본 협상이 다가왔다. 한미FTA의 향후 진로를 결정적으로 판가름할 중요한 협상이다. 아니 한미FTA가 한미FTA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둘러 싼 문제라는 점에서, 이번 협상은 우리의 삶과 미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이다.
하지만 협상을 코 앞에 둔 지금 한미FTA 저지 투쟁의 열기는 그리 높지 않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반복되고 있는 협상저지 투쟁은 어느새 사람들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북한발 핵 열풍'은 한미FTA의 4차 본 협상은 물론 한미FTA 맹신론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미FTA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을 준비하며, 문득 앞의 시구가 생각났다. 한미FTA 저지 투쟁은 물론이고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투쟁의 기억들, 아니 투쟁의 상처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투쟁의 결의를 강조한다 할지라도, 지난 시간 동안 우리의 삶에서 반복되어 온 투쟁의 상처는 투쟁의 열정을 자기 검열한다. 투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내면화된 투쟁의 상처들은 새로운 투쟁의 열정을 불신과 냉소로 그늘지게 한다. 투쟁의 상처는 운동이라는 지극히 자율적인 행위마저 관성과 타협이라는 식어버린 감정의 길로 유혹한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두려움처럼... 귀찮아져버린 연애처럼...
우리가 투쟁에 대한 스스로의 열정을 자기 검열하는 동안, 이번 한미FTA 4차 본 협상은 “죽음의 협상판”을 더욱 더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미 미국은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 재개도 부족해서 “뼛조각”까지 수입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2차 본 협상부터 쟁점으로 부상한 의약품 분야 역시 지적재산권과 연계하여 “변칙적 퍼주기”를 지속할 것이 분명하다. “쌀만은 지킨다”는 한국 정부의 노골적인 사기극 속에서 농산물에 대한 개방 폭은 급격하게 확대될 것이다. 허접한 협상전략 속에서 개성공간 카드는 이제 말 부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아직 쟁점조차 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을 크게 위협할 투자, 금융서비스, 시청각미디어, 공공서비스 등이 빠른 속도로 “물 건너“갈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개별 협상의 문제를 넘어, 현재 확대되고 있는 한반도 핵 위기와 미국의 군사패권 속에서 한미FTA 협상 자체가 그 졸속성과 종속성을 더욱 더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만 곁에 있어준다면...” 따위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지배권력 내에 팽배하고, 이러한 태도가 협상의 기본 흐름인 한미간의 비대칭성, 불평등성을 심화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FTA 4차 본 협상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감 속에서 한미FTA를 통째로 건네주고 남한 사회의 종속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이번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에 집중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미FTA 저지 투쟁을 매개로 준비되고 있는 11월 민중 총궐기의 관점에서도 이번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은 그 의미가 크다. 우리는 11월 민중 총궐기가 몇몇 대중조직들의 달력 사업만으로 성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1월 민중 총궐기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이번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을 시작으로 지속적이고 다양한 투쟁들이 축적되고 확산돼야 한다.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은 11월 민중 총궐기의 출발점인 동시에 최소한의 충분조건인 셈이다.
이번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은 단순한 협상 시기 반대 운동의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협상장 봉쇄 투쟁을 통해 한미FTA 저지 투쟁의 전국적 확산을 위한 계기점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한미FTA 4차 본 협상 저지 투쟁을 시작하며 우리 모두에게 주문을 외워보자.
“투쟁하라, 한번도 투쟁해보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 속 깊숙하게 자리 잡은 투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투쟁에 열정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새로운 투쟁에 대한 냉소적인 자기 검열을 떨쳐낼 수 있도록. 투쟁의 상처를 통해 자리 잡은 투쟁의 관성과 습관을 떨쳐낼 수 있도록. 아니, 투쟁의 환상을 버리는 동시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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