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해방의 길 위에서 문학을 한다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6) -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소설가 이인휘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편집자 주



1. 문학에 대한 단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해 수많은 평론가와 소설가, 그리고 시인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소신을 밝혀왔다. 나는 그들의 소신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문학이란 오랜 세월을 거쳐 규정된 중요한 점과 의의가 있지만, 문학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소신 그 자체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이다.

문학은 쓰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눠질 수가 있다. 오락성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고, 도덕적 경향에 맞춰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고, 순수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사람도 있고, 신비주의, 혹은 허무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모두가 나름의 진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존중한다. 다만 그것들이 상업성을 위해서만 치달아 문학의 중요한 기능인 인간에 대한 환기, 삶에 대한 환기를 오히려 방해한다면 나도 모르게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문학이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문학이란 거창하게 말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단순하게 포장하지 말고 말 해보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문인이라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매달리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짜식, 생긴 대로 놀고 있네.” 라는 말이 있다.

문학 역시 작가의 성향에 따라 구분되어 지는 건 당연할 것이다. 산동네에 살았던 사람이 부자들의 세계를 그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의 세계를 그린다면 아마도 작가는 산동네의 애환을 몸에 담고 그려내려고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작가는 산동네에 살면서 부자들의 세계를 동경하고 그들의 삶을 철저하게 쫓아다닌 사람일 것이다. 동시에 문학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도 분명할 것이다.

그것은 산동네에서 자란 작가가 SF 세계나 오락성만을 강조하는 문학에 빠져 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 진다. 아마도 그 작가는 산동네에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증오하며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허구의 미와 부의 축척에 눈을 돌리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컸을 거라고 여겨진다.

나는 문학이란 재미와 감동이 어우러져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믿는다. 재미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우리 딸이 박장대소를 할 때 나는 무슨 말인지도 알 수가 없어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것을 보면 재미도 시대에 따라서 소재와 말장난을 따로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아무튼 재미에도 슬픈 재미가 있고, 웃기는 재미가 있고, 재치 있는 재미가 있고, 고통의 재미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전체 속에서 그 재미를 찾아내어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갈 때 진정한 재미를 독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재미 속에서 독자들이 책을 덮을 무렵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울림이 감동이다. 감동 역시 여러 형태의 모습을 띠고 있을 것이다. 진실이 진실로 통한다고, 독자들이 감동을 받을 때는 이미 책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 있을 때일 것이다. 독자는 책 속의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그 진실의 끝에서 희망과 허무, 비극과 희극의 종말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든지, 진짜를 가짜로 만들고, 가짜를 진짜처럼 느끼게 해주지 못하는 이야기에 흥미도 못 느끼고 감동도 못 받는다. 나는 기쁨과 슬픔, 분노와 수치를 일깨우는 이야기를 현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듣고 본다.

그래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에 나는 귀를 기울인다. 그 곳에서 재미와 감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 속에서 어떻게 재미와 감동을 어떻게 끌어올려 한 이야기 안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게 어려운 일이다. 작가 개인이 겪은 처절한 이야기조차도 담아내기 어려운 판에 어떻게 타인들의 삶을 보면서 재미와 감동을 책 속으로 옮겨낼 것인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다만 이제까지 글을 쓰면서 이제야 그나마 깨우치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와 깊어졌냐는 물음이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예기치 않았던 이야기까지, 몸에서 줄줄 흘러나올 때,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책 속으로 옮겨낼 수 있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이 경우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세계 속에 자신이 서 있으면서 온갖 것들을 진실처럼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에 있던 사물들도 자신이 보았던 것처럼, 주변에 서성거리는 사람들도 자신이 보았던 사람들처럼,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때, 글은 말문을 열고 튀어 나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세계에서 이야기를 끌어올린다.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현재의 내 방식이다. 이런 판단 속에 갇혀 글을 쓰게 되면 글이 편협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직 내 수준이 거기까지라는 것을 절감한다. 폭넓은 철학과 지식과 삶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면 글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데, 아직 너무나 많이 여러 점들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 점들을 풀어헤치기 위해 고민을 하지만, 여전히 고민은 고민으로 끝나고 있다.

2. 내가 그 동안 써 온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소설을 내 방식대로 써 온 사람이다. 처음엔 여러 가지 사건과 사람에 대해 쓰다가 문득 소설이 써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다른 작가들의 글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설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을 흉내 내서 소설을 써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을 겪은 후배를 만나면서, 그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장편을 시작한 것이다.

그냥 이렇게 써 보면 안 될까, 싶어서 이야기의 주제와 소재를 갖고 사람과 사건을 엮어가며 줄거리를 엮어봤다. 그리고 문단에 먼저 등단한 친구에게 보여주고, 무작정 소설을 시작한 것이다.

많은 것들이 부족했다. 문장은 물론, 구성까지 엉망이었고, 묘사의 맛도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나는 문학의 넓은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활화산]을 쓰고 나오자, 문단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줬다. 아마도 시대의 흐름 탓일 것이다. 당시에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안재성의 [파업]이 나오자 평론가들은 노동문학이란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 분류해 놓고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91년 소련 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노동운동은 물론, 출판운동을 비롯한 문학계도 많이 흔들리고, 혼란을 겪게 됐다. 사회과학 출판사들은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노동문학을 일으켜 주던 세력들도 서서히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노동문학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갔으며, 성과물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돌아보면 [활화산]이 참 부족한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문학적 역량이 현저히 부족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또한 뼈저리게 느끼는 다른 지적은 참으로 기계적 발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글을 쓸 때. 흔히 말하던 운동에 대한 복무라는 마음으로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사고의 틀이 갇혀 있었기에 그 소설 역시 갇혀 있던 테두리 안에서 연출된 갑갑하고 일방적인 주장이 담겨 있던 소설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최초의 노동 장편소설이란 이름을 달고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던 [파업]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후 나는 두 편의 장편소설을 더 썼다. [문밖의 사람들] [그 아침은 다시오지 않는다]

하지만 [문밖의 사람들] 역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깊이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미시안적이가를 극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보고 겪었던 운동의 현실은 있었으나, 그 현실의 본질과 그 현실을 극복하는 복잡한 구조를 나는 너무도 단순하게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리해 버린 것이다.

세상은 얼마나 복잡하고, 사람은 얼마나 기기묘묘한지를 뒷전에 둔 채 나는 운동의 한 측면을 극대화시켜 세상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며 얄팍한 ‘사랑’의 말로 근원적인 제시만 가볍게 던져놓은 것이다.

[그 아침은 다시오지 않는다]라는 소설은 그 지점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그 시절 소설은 안 팔리고, 먹고살기에는 바쁘다보니 경제적이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많이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글을 쓸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던 가운데 나는 남성이 쓴 여성주의 소설을 써 볼 것을 권유받았고, 고민 끝에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돈을 벌자. 그래서 최소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려 글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이중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보자!”

하지만 나는 스스로 껴안은 위안이 결국 나를 망치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는 것을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며 깨우칠 수 있었다.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말자!

마음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나는 위험수위에 다다를 만큼 마음이 황폐해져 스스로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 몰아넣고, 벼랑 아래도 떨어뜨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그 길이 내가 새롭게 사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으로 돌아가 [삶이보이는 창]을 만들었다. 8년 가까이 그 길 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문학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그것 역시 두려움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후 [내 생의 적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내놨다. 그 소설은 내가 겪은 세월의 한 측면이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내 얘기를 소설 속에서 진지하게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그 소설에서는 참 많은 부분 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쓰면서 여러 번 울기도 했는데, 그 울음을 통해 나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한을 어디엔가 쌓아놓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쓰는 시간은 짧았지만 결과물로 내 놓는 시간은 2년 가까이 걸렸다. 그 소설을 써 놓고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여전히 문장이 불안하다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여전히 나는 내가 겪어온 운동권 세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의 밀도 역시 아직은 충분히 깊지 못하다는 것과 철학적 역사적 통찰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극복해 낼 수 있는 문제라고 여긴다. 문장은 훈련과 더불어 삶이 깊어지면 더 진국이 되어 나올 것이고, 운동권의 틀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운동권에서 느꼈던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곳에 문을 열면 나는 더 많은 빛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소설의 밀도 역시 세상의 사람과 사물을 보는 눈을 좀더 진지하게 가져가면서 여러 가지 부족한 지식과 공부를 통해 사상의 폭을 넓힌다면 그 깊이도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다. 내가 이 말을 장황하고 오만하게 늘어놓은 것은 나는 나와 같은 성향의 문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토대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라는 것을 자신감을 갖고 드러내보고 싶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하늘 저 끝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야기는 우리 현실 안에 있다. 삶이 깊어지고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 진다면 문학은 그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3. 문학을 나누는 행위에 대하여


문학을 나누는 행위는 문학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의미를 두 가지로 좁혀 말하고 싶다. 첫 번째는 문학의 평가를 통해 문학의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고, 두 번째는 어떤 경향을 띠고 있는 문학을 하는 주체들이 상대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학적 경향의 주체들과 맞서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분류되는 것이 순수와 참여다. 그리고 순수와 참여도 그 내용과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카프, 사회참여, 분단문학, 민족문학, 통일문학, 민중문학, 노동문학 등등의 이름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것들을 보면 그 시대적 흐름과 그 문학의 규정을 통해 문학 평론을 하고 문학사적 의미와 목적을 표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작가들은 자신들이 어떤 분류에 속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더불어 문학은 문학일 뿐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갖고 있다. 다만 자신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자신이 겪은 삶의 토대와 상상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경향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해석과 분류의 의미가 어떤 의미를 갖으며, 좋고 나쁜지에 대한 판단은 일단 접어두자.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현재 문학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언제부터인지 문학이 시대와 더불어 분류되고, 문학이 문학의 진정성을 놓고 나눠지던 것이 현실에 와서는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충분히 검토하지 못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요즘은 그런 분류의 의미보다는 상업적이냐, 아니냐는 의미를 더 크게 두면서 문학 권력자들이 분류를 하고 그 밑에 문학 평론가들이 자신도 모르게 일부 기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영상의 발달, 시대적 변화, 젊은이들의 의식구조, 출판도 살아남아야 한다, 글로벌 출판 등등의 말들이 그 위기라는 말끝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언어들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들이 있고, 중요한 점들도 있겠지만 작금에 많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의 속사정은 문학 서적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안 팔리는가. 사실 진짜 고민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고민의 내용이 문학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판매에 중점을 둔 사람들에게 팔리지 않으면 안 만들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더불어 문학 서적으로 장사할 수 없으면 다른 장르를 가지고 장사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문학 서적을 끊임없이 내고 싶어 하는 출판사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진짜 문학의 위기는 읽을 만한 작품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문학이 위기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팔리지 않는다고 푸념을 해대는 것이다. 작가들의 전적인 책임이다. 솔직히 내 작품, 네 작품을 따지지 말고, 얼마나 좋은 작품을 우리가 내 놓았는가 부끄럽게 되돌아 볼 일 아닌가. 시대적 반향과 유통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어떤 문학을 해야 되는가. 혹은 우리 문학 작품이 무슨 문제를 갖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는가. 도대체 문학 작품은 어떻게 나와야 하는가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동문학만 따로 떨어뜨려서 보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구시대적 발상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급격히 변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 문제 중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문체와 글 엮는 방식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노동과 노동운동과 변혁운동 등이 새롭게 변화되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문학도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바꿔야 될 것처럼 말하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문학을 넘어선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인간해방이라는 큰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고도 말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문학은 여전히 무기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 말하라면 나는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문학을 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노동현실과 노동운동 진영 속에서 많은 것들을 겪었기 때문에 내 삶의 토대가 거기에 있어서 그 속에서의 삶과 사람과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다.

더불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모습들에 대한 소망과 실망과 분노를 통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노동해방 더 나아가서는 인간해방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로 되살아질지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 길을 가면서 문학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들과 같이 얘기하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서로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서로의 문학을 빛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그 문학의 분류가 노동문학이라고 규정짓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 노동운동이 세상을 구해줄 유일한 운동이 아닌 것처럼, 문학이 노동운동과 결부된 의미를 가지는 노동문학이라고 우리의 문학 행위를 규정짓는 것은 스스로 이 넓은 세상과 형형색색의 사람들과 결별을 하는 행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지고 넓어질 때, 문학도 사람을 살리는 행위도 좀더 빛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것들이 깊어질 때, 분명 문학의 길도 운동의 길도 새롭게 그 모습을 아름답게 가꿔갈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향성은 있겠지만 문학은 문학을 하는 작가의 자기 세계다. 그 세계를 드러내고, 독자와 소통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길 위에서 경향성이 비슷한 작가들끼리 서로의 진심을 내비치면서, 서로의 삶에 활력을 주고, 서로의 작품 세계에 힘을 실어준다면 그것은 분명 서로의 문학을 진일보시켜 줄 수 있는 자리매김이 되고, 삶의 재미를 윤택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문학잡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문학자들의 이해관계에 묶여 문학을 분류해 내는 행위가 위험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이때 문학에 대한 진정성을 지닌 같은 부류의 경향성을 갖고 있는 작가들이 모여 새로운 모색을 하면서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행위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4. 문학의 진정성을 살리면서 독자들과 소통할 방식은 없는 것인가.


문학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작가의 몫이다. 우리는 다만 서로의 작품을 애정을 갖고 관심을 기울이면서 상대방 작가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따뜻한 분석과 비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독자들에게 내놓고 독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끊임없이 정진시켜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순수, 혹은 다른 작품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두자.

그러면 적극적으로 우리 사회, 혹은 우리 세계 속에 관여하고 싶은 경향을 가진 작가들만의 문제로 축소시켜 보자. 이 말을 민중 지향성이라고 해도 좋고, 우리의 삶터와 세계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향성이라고 해도 좋다.

또한 노동해방이라는 말에 초점을 두고 있어도 좋다. 나는 이 세 가지 지향이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폭 넓게 적극적으로 우리 사회와 이 세계에 관여하고 싶은 작가들의 경향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말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와 마음이 맞는 독자만이 아니라, 전 국민적, 혹은 세계적 의미의 독자와 교감하고 싶고 교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은 좋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하루종일 우리의 의식을 갉아대는 자본의 광고 속에서, 생존마저 힘든 약탈과 침략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체재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켜낸다는 것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와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고, 광고와 판매를 위해 조직된 글들이 횡횡하고, 판매시장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그 논리와 배척되는 책들이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실로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책들이 자본의 권력이 숨 쉬는 출판사에서 출판되지 못하면 쉽게 그 운명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들은 또한 그런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못해 얼마나 안달을 하는가.)

이렇게 자본이 목줄을 쥐는 출판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론, 더욱 소통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나는 있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노동시장이다. 그 시장은 틈새시장일 뿐만 아니라, 아주 큰 시장이다. 우리의 대상을 1차적으로 민주노총 한국노총 조합원이라고 할 때 그 인원수만 해도 1백만이 훨씬 넘는다. 그 중에 반만 잡아도 오십만 명이고, 그 중에 또 절반만 잡아도 25만 명이다.

책을 안 읽는다고 말하지 말자. 책을 안 읽기로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그렇다. 나는 이곳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다른 문학판들이 쉽게 껴들 수 없는 곳이다.

동시에 민중지향적 문화예술이 소통을 통해 문화예술을 살찌우고, 읽는 독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

그럼 이곳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깊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만 하고 싶다.

틈새시장이란 굉장한 것이다. 둑에 물구멍이 나다보면 커다란 구멍이 뚫려 둑을 무너뜨릴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러한 소통의 힘으로 우리의 작품을 더욱 넓혀갈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작품을 판단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영화 이야기 하듯 그 작품을 얘기하면서 그들이 다른 독자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입맛이 있는 작품이 있겠지만 정말 좋은 작품은 경향성을 떠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초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작품이다. 상업주의 문학에 기웃거리지 말고 자기 문학의 깊이와 세계를 창출하자. 분명 그러한 작품은 쉽게 폐기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을 상실하고, 문학을 죽이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리고 한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의 세계가 용도 폐기되는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하자.

나는 민중지향적 문학이, 이 세계의 파괴에 맞서서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문학이, 더 깊어져야 하고,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문학의 먼 미래를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광고와 약탈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현재적 상태만 바라보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여러 분야의 문학상 심사를 보면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붙박여 사는 이 땅과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표현의 방식이 구세대라고 말하는 작가들과 다른 점이 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본질적 의미 역시 한쪽 측면에서 유구히 흘러가고 있는 점도 유의해서 봐야 할 것이다.
문학은 세상 물줄기의 따라잡기가 아니다. 문학은 작가 개인이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끝없는 고행의 길일 것이다.

체게바라는 꿈이 하늘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내려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세상 가는 길 꿈이라도 크게 꾸면서 살다가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말

소설가 이인휘는 장편소설 '활화산', '문 밖의 사람들',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내 생의 적들',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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