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문학은 끝나지 않았다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7) - 공사장 철근으로 시를 쓰는 김해화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편집자 주



1981년 나는 순천시 주암면 광천교 PC빔 현장에서 철근을 메어 나르는 일을 하면서 첫 노동을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낫과 괭이, 삽, 지게질을 배웠는데, 우리 땅 한 평 없이 소작을 하는 형편에 농사일 역시 노동과 다를 바 없었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과자공장, 봉제인형공장, 조선소, 인쇄소, 양계장을 떠돌던 시절 역시 노동일의 연속이었다.

노동의 시작

그런데도 1981년의 PC빔 현장을 내 노동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노동자라고 깨달은 것이 그때 부터였고, 그 노동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온 까닭이다. 물론 내 문학도 1981년에 시작한 공사장 노동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공사장 노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을 만났다. 별명이 흘러흘러삼십년 이라고 했다. 주름진 삶의 흔적이 선명한 구릿빛 얼굴에 회갑이 지났는데도 눈빛은 젊은이들보다도 빛났다. 꼭 다문 입술 때문에 차가워 보이기도 했지만 말수가 적었을 뿐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 바닥에서 30년이나 버텨내셨어요?”
“지금은 좋아진 거야, 살다보면 십년 이십년은 훌쩍 지나가버려.”

살다보니 정말 10년, 20년이 훌쩍 지나가고 나도 흘러흘러 30년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세월이 참 빠르기는 하다.

공사장에서 노동을 시작하기 전 내 삶의 주된 관심은 농촌이었다. 서울, 울산, 부산 같은 도시들의 공장을 떠돌면서도 나는 기회만 닿으면 고향으로 달려가고는 했는데, 농사를 짓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내 시도 농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땅을 빌려 지은 배추농사가 망해 빚쟁이가 되어 땅 한 평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참으로 허황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온전한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뒤로 내 삶과 시는 노동으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너는 여기 앉은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현장을 떠날 놈이다.”
관상을 볼 줄 안다는 현장소장이 술자리에서 내게 말했다.
“갈 데가 있으면 가야지요. 이 바닥이 뭐가 좋다고 오래 남아있겠어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갈 데가 없었다. 갈 데가 없어서 여전히 공사장 노동자로 남아있는 이들이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을까? 흘러흘러30년이 아니라 흘러흘러40년, 흘러흘러50년도 적지 않으리라.

가장 먼저 현장을 떠날 놈

25년이 흘렀다. 그 세월 속에서 노동자 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3권의 시집을 내고, 노동현장과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들꽃사진을 곁들여 꽃편지라는 이상한(?) 책을 펴냈다. 그러고 나서 오래 붙들고 있던 사진기를 내려놓고 다시 객지의 공사장을 떠도는 떠돌이 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얼마나 더 가면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끝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 길 위에 내 문학이 서있다.

구로노동자문학회의 어떤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 술을 밤새 마신 우리들은 다음 날 늦은 아침 겸 해장을 하러 구로동 어느 감자탕 집에 들어가 술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박영근이 갑자기 사랑에 대해 물었다.

“형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은 함께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나란히 손을 잡고 갈 수도 있지만, 앞뒤로 한 참 떨어져 갈 수도 있고 마치 남남처럼 길 이쪽저쪽으로 나뉘어 갈 수도 있겠지. 다만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한 길을 가는 것,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길 위의 사랑이라……”

박영근이 한숨처럼 이 말을 내 뱉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눈물을 흘렸다.
박영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고 나는 그때 일이 생각나 철근을 세우다가 한참을 울었다.
박영근의 길과 나의 길이 무엇이 다를 것인가-

박영근 시인과 나

1981년 광천교 공사가 끝나고 나서 지하철에 쓰일 PC빔을 제작하기 위해 잠실 현장에 짐을 싣고 도착한 우리는 허허벌판에 합판 몇 장을 대충 얽어 하늘을 가리고 첫 밤을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 낡은 목제와 합판들을 이용해 공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들이 생활할 임시 숙소를 짓는 것으로 내 떠돌이 노동을 시작했다.

씻을 물도 없어서 웅덩이에 고인 빗물로 대충 손을 씻고 한참 떨어진 벽돌공장 옆 비닐하우스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숙소로 기어들어가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수첩에 써내려간 이야기들은 내 시가 아니라 시커먼 얼굴을 마주하고 술잔을 나누면서 들려준 동료들의 삶이고, 희망이고, 절망이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씌어진 100여 쪽의 작은 메모들을 자르고 깁고 해서 나는 첫 번째 시집 인부수첩을 엮었다. 시가 아니라 나와 내 동료들의 삶이었다.

시여 무기여

1984년 「시여 무기여」이후에 나는 노동문학이라는 단어와 만나고 자유실천문인협회를 만났다. 박영근을 만나고 김명환을 만나고 김남일을 만났다. 그 동안에도 나의 떠돌이 노동은 전국 각지로 이어졌다.

부산, 대구, 예천, 안동, 홍천, 대전, 등지를 떠돌면서 몇 차례 파업을 주도한 끝에 빨갱이로 몰려 PC빔 현장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된 나는 고향의 댐 공사장으로 숨어들었다. PC빔 현장과 토목 현장이 교류가 별로 없는 덕분에 무사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임금과 노동조건 때문에 다시 몇 차례 파업을 주도하고 쫓겨나 1987년 겨울, 경남 창원의 아파트 현장으로 옮겨 가야했다.

내가 노동자라는 자각을 일깨워줬던 문학, 가슴 속에 노동자계급의 사상으로 기둥을 세우면서 나는 내 문학에 대해 더 치열할 것을 요구했고, 치열해진 문학은 나에게 더 치열한 삶을 요구한 결과였다.

내가 옮겨 간 창원은 자본가들에 맞선 노동자 투쟁의 폭풍 속이었다. 그 폭풍 속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나는 다양한 문화연대를 통해 노동자들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로 결합하지 못하고 노동문학을 하는 문화운동가로 밖에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아픔이었지만, 나는 마창노련, 마창노동자문학회, 마창민예총, 경남작가회의 등 단체와 13년 동안 최선을 다해 연대했다. 그것이 노동자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는 길이었고 시인으로서 내가 쓴 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 경남 마산에 있는 카톨릭 여성회관 마당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김명환을 만났다. 구소련 붕괴와 노동해방문학의 폐간 등으로 침체된 노동자문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그동안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노동자문학 동지들과 함께 문학 동인을 결성하기로 했다.

'일과시'를 만들다

동인 결성에는 김명환, 손상렬, 조태진, 서정홍, 김용만, 김명환, 서해남, 김해화가 뜻을 같이 해서 동인 이름을 「일과시」로 정했다. 그리고 1993년 첫 동인지 「햇살은 누구에게나 따스히 내리지 않았다」를 「과학과 사상」에서 펴냈다.
두 번째 동인지부터 이한주가 합류를 했고 이후, 송경동, 오도엽, 문동만, 김해자, 문영규, 손현수 등이 합류를 해서 지금까지 8권의 동인지를 펴냈다.

그 동안에도 침체를 거듭해 오던 노동자문학은 결국, 2006년 지역노동자문학회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던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오프라인 상에서 해산하는 사태까지 지켜보고 말았다. 일과시 동인 역시 2005년 1월 어렵게 8번째 동인지를 펴내고 난 뒤 제대로 모임 한번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나에게, 일과시 동인들에게, 노동자문학이 존재하고 있기나 한 것인가?

일과시 동인들을 한 번 훑고 넘어가자. 김기홍은 아내와 헤어진 뒤 전남 순천에서 공사장 노동일을 하며 혼자서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김용만은 부산에 살면서 간판공장에서, 김명환과 이한주는 서울에서 철도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손상렬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조태진과 오도엽은 기자로 일한다. 문동만은 승강기 수리기사로 일하고, 김해자는 작가회의 사무차장, 송경동은 하도 많은 행사와 단체에 관계하고 있어서 어디 서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서정홍은 창원에서 여전히 농민단체 일을 하는 모양이고, 김해화는 일을 찾아 다시 떠돌이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문영규, 서해남, 손현수는 일과시를 떠났다.

처음 일과시를 결성하던 때에 비해 사는 일이 더 어려워지거나 힘들어진 동인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동인에 대해, 문학에 대해 무관심해진 것은 사는 일이 힘들어서도 아닐 것이고 시간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노동자문학이, 일과시라는 동인의 비중이 삶에서 점점 가벼워져 가는 탓이 아닐까?

나는 동인 활동을 하면서 내 삶과 너무 다른 세상의 흐름에 맞춰야 하는 것이 힘겨웠다. 공사장 노동이 휴일이나 공휴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비오는 날이나 현장 사정에 맞춰 아무 날이나 쉬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일하는 것이 아직도 보편적 상황인데, 모든 모임이나 행사가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맞춰져있으니 비오는 날도 공치고 행사나 모임 있는 날도 공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혼식 같은 데는 아예 참석할 엄두도 못내 사람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노동자 문학에 관련된 모임이나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석을 하곤 했는데 충분히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면서 솔직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나도 점점 느슨해지고 행사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그날 일을 해서 버는 임금을 비교해 보게 되고 발길을 돌리는 일이 잦아졌다.

일과시 동인은 그런 동인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동인 모임을 온라인 모임으로 대신하기 위해 무척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온라인 모임도, 오프라인 모임도 다 함께 이루어지 않아 지금은 동인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빠져있다.

동인들이 나태하거나 게으른 것은 아니다. 동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고 그 일은 전체 변혁운동진영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동인들은 우리들이 노동자라는 것, 노동자로서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문학을 하는 노동자 문학가라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자 문학가들은 어떤 조직의 입이나 도구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입이며 도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이 곧 문학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문학을 시작했고 문학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꿈을 키워왔다. 그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꿈은 유효하다

발목이 부서져 3년 동안 병원살이를 했다. 언제나 서서 보아야 했던 세상을 누워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누워있는 동안에 IMF가 휩쓸고 가고 내가 일하던 노동현장은 몇 년을 뒷걸음질 쳐 캄캄해졌다.

병원을 나와서도 부서진 발목은 온전해지지 않았다. 달릴 수 없었고 축구공이나 돌멩이를 걷어 찰 수 도 없었다. 천천히 걷고 비켜가는 것을 배웠다. 오래 바라볼 수 있고 바로 가면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13년 동안 치열하게 서서 견디던 창원을 떠나 순천으로 옮긴 나는 천천히 캄캄한 공사장으로 돌아왔다. 동지도 없고 동료도 없는 낯선 도시의 추운 공사장에 서있는 것처럼 나는 일과시 동인들 속에서 춥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동자문학은 끝났다. 라고 마침표를 찍으려는 것인가?

끝나지 않았다

노동자 문학은 끝나지 않는다. 노동자 문학은 날마다 새로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세계화의 질서 속에서 더욱 교묘하고 다양해진 거대자본의 착취와 수탈이 존재하는 한, 자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 문학은 스스로 살아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에 뿌리 내린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더 날카로워지면서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노동자 문학을 시작해야만 한다. 일과시 동인들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결론도 내려 본적이 없었으므로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다. 어딘가에 가서 닿아야 하고, 결론을 찾아야 하고, 우리는 그곳에 집을 짓거나 씨를 뿌리거나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거나 해야 한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것이다. 나는 일과시 동인들 속에서 그 봄을 기다릴 것이다. 일과시 동인들 속에서 나는 여전히 비조직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전남 승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해화 시인은 공사장을 떠돌며 시를 쓴다. '시여 무기여'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인부수첩' '우리들의 사랑가' '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가 있으며, 꽃사진과 시가 함께 있는 '김해화의 꽃편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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