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 쉬운 길을 생각하지 말자"

[노동운동,어깨를펴고](2) - 산별과 지역(1)

왜 ‘지금’ 산별노조인가?

새 달력에 아직 신선한 잉크 냄새가 가시지도 않았지만, 2007년의 일정도 노동운동에 안팎으로 힘든 과제들을 던질 것이 틀림없다. 지난 해 말 전격 통과된 비정규법과 노사관계법을 가지고 자본과 정권은 더 노동운동을 더 강하게 몰아붙일 것이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계속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노동운동은 이러한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한 외부의 공격에 대한 대응 외에, 노동운동 내부에서 2007년 가장 뜨겁게 진행될 일정은 산별노조 건설일 것이다. 오래동안 한국 노조의 숙원이었던 산별노조 건설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일정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사실 기업별 노조의 폐해가 너무 명확했으므로 민주노조운동의 초기부터 산별노조 건설을 과제로 삼았으며, 각 부문에서 소산별 등 산별노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10여 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업별 노조로 활동해온 관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특히 기업별 노조로도 비교적 성공을 거둔 대기업 노조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드디어 공공과 금속 등에서 대기업 노조를 포함하는 산별노조 건설 일정이 구체화되어 올해 실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공공부문의 산별노조는 지난해 말 공공서비스노조와 운수노조가 출범함으로써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지난 12월 26일 운수노조의 출범과 동시에 공공연맹과 합쳐 통합연맹을 결정하기로 한 일정이 무산된 것은 아쉽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여전히 산별노조의 원칙과 시급성에 대해서 서로 동의되지 않은 지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산별노조인가’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왜 산별노조인가’는 다들 아는 얘기다. 무엇보다도 노조의 힘이란 포괄하고 있는 노동자의 숫자와 단결에서 나오는데, 산별노조는 더 많은 노동자를 하나의 조직으로 포괄할 수 있는 범위다. 또 기업별 노조의 한계는 역사적으로 깊이 경험하였다. 기업별 교섭 범위를 넘어선 정치정책적 사안들에 대해 노조가 무능력할 수밖에 없었고 조합원의 관심과 의식 형성을 이끌어내기도 어려웠다. 또한 성공적인 대기업의 노조와 그렇지 못한 노조 또는 미조직 노동자와의 격차가 커졌으며, 이는 다시 노동자계급이 단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10여 년 전부터 반복해서 얘기되어 왔지만, 지금 현실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오랜 논의 끝에 지금에서야 노조 활동가들이 이 지점들을 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벌써부터 이미 산별노조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바로 지금’ 더 이상 산별노조 건설을 미룰 수 없는 시급한 현실적 상황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공세로 인해 기업별 노조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노동시장 유연화로 노동자의 삶은 매우 불안정해졌으며 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는데, 이들의 조건은 기존의 노조 형태로는 포괄·조직되기가 쉽지 않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노조로 조직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되, 기존의 법과 제도, 교섭체계, 조직 관행 등은 이들이 노조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비정규직이 다수가 되면서 노조 조직화 및 세력화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조직률이 떨어지거나, 또는 조직률 자체는 유지되더라도 노조가 힘을 행사할 여지는 점점 적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몇 정규직 대노조들은 안간힘을 써서 어느 정도의 조직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바닥이 드러날 일시적 저지선일 뿐이다. 정규직 대노조는 대다수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들의 망망대해에 점점이 박힌 섬들처럼 고립된 상태일 뿐더러,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의 불안정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섬조차도 계속 침식되어 쓸려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즉, 현재의 대노조들이 일시적으로 자기 조합원들을 보호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를 통해 자본은 노조의 입지를 계속 흔들고 위협하면서 목을 죄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현실은 결국 기존의 조직 및 활동 방식으로는 노조의 힘을 강화하기는커녕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치닫고 있는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을 미룰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별노조에서 지역의 의미

이러한 기준에서 보았을 때 산별노조의 조직에서 지역 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첫째, 지역 체계는 업종 체계보다 더 다양한 조건의 노동자들을 포괄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노조 활동에서 더 쉽지 않은 조건일 수도 있다. 업종은 비슷한 노동과정과 조건을 갖기 때문에 자본 및 정부를 상대하여 요구사안을 설정하기도 비교적 쉽고 그러한 직접적 이해관계를 통해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낼 수 있다. 그에 비해 조건이 다양한 노동자들을 지역적 조직체계로 묶고 참여하게 만드는 것은 직접적인 이해관계보다 훨씬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기업별 노조의 폐해를 지적하고 산별노조를 대안으로 보았을 때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기업별 노조는 비교적 동질적인 조건 하에서 특정한 요구사안을 설정하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통해 조합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용이한 조직형태다. 그러나 그것이 몇몇 대기업 노조의 성공에는 기여했으나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이라는 측면서는 오히려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쉬운 길을 택할 것이냐, 어렵더라도 더 높은 수준의 계급적 연대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냐. 산별노조를 추진하는 이유와 기준을 상기해 보면 답은 명백한 것이다.

둘째, 지역은 노동자간 연대활동과 공동투쟁의 거점이다. 교섭에 관해서라면 기업별 또는 업종별 조직 체계가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말한 바와 같이 비슷한 조건에 근거하여 요구안을 설정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노동자들끼리 연대활동을 하고 공동투쟁을 하기에는 실제 생활의 근거지인 지역체계가 더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교섭이 아니라 투쟁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는가. 당연히 산별노조에서 교섭은 중앙교섭을 상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중앙교섭을 추진하는 이유는 기존 노조들의 통합으로 덩치를 부풀림으로써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신자유주의 공세가 점점 강화되는 현 시점에서 중앙교섭이라고 해서 더 많은 실리를 얻어내리란 보장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중앙교섭은 기업별, 업종별, 조직/미조직, 정규/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심화되는 노동자간 격차와 분할을 막아야만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를 다시 세울 수 있다.

특히 공공부문은 중앙교섭의 상대가 분명한 편이다. 공공부문은 주로 정부의 정책 및 (특히) 예산 배분이 결정적인 부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의 통제 및 지원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하위 기업 또는 업종 교섭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중앙교섭을 통해 공공부문 전반의 정책을 다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섭을 뒷받침하는 것이 노조의 힘인데, 노조의 힘이란 기본적으로 밑에서부터의 단결과 투쟁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의 기반 조직에서는 중앙교섭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일상적인 연대와 공동투쟁이 조직체계와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셋째, 공공부문은 사회기반서비스나 공공서비스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영역들은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기초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부문 노조는 노동자로서의 요구사안을 설정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사회정책을 다룰 수밖에 없다. 즉 공공부문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 대표와 전체 국민(또는 노동자계급)을 위한 사회공공성 요구를 결합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투쟁과 교섭의 의제로 삼기 위해서도 지역 조직이 효율적이다. 지자체 또는 지역 단위로 결정·제공되는 공공서비스가 적지 않기 때문에 지역적 활동으로 이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개입이라는 것은 지자체와 더불어 지역 코포라티즘을 형성한다는 의미라기보다(이를 원천적으로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지역의 사회운동 단체들과 연대하여 주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상수도 민간위탁을 반대하는 지자체 노동자의 투쟁은 고용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생존권 투쟁이기도 하지만, 생활의 기반인 물을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주민의 공공적 권리 확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이러한 운동에 관심을 갖는 지역주민단체들과 연대할 수 있다. 노조가 밑에서부터 사회운동적 의제와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하는데, 공공부문 노조는 그것을 실현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쉬운 길을 생각하지 말자!

공공연맹의 논의 과정에서도 이러한 지역의 중요성은 인식되었지만, 지역 조직 체계를 목표로 하되 당분간 지역과 업종 체계를 병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동안 업종 중심이었던 활동 체계를 금방 해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다양하게 분할된 노동자들간의 계급적 단결을 이루는 것은, 동일한 조건을 공유하고 직접적 이해관계에서 참여가 동기지워질 수 있는 기업별 또는 업종별 노조의 방식보다 더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은 산별노조 ‘전환 이후’가 아니라 ‘건설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산별노조란 기존 노조들의 조직형태가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 노조 조직에 포괄되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기존 노조들은 새로운 산별노조 속에 융해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기존 노조들의 역사와 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동안 쌓아온 힘과 경험과 역량으로 새로 건설되는 산별노조를 받쳐줄 골격을 형성해야 한다.

기존의 노조들에게 “기득권을 버려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노조의 이른바 ‘기득권’이라는 것은 어차피 사실상 길게 유지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로 몇몇 큰 노조들이 애써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유지한다 할지라도, 앞서 말했듯이 이는 고립된 섬과 같은 형국이라 계속 유지되기 어렵고 제살 깎아먹기 식의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지금 당장’ 산별노조 건설이 시급히 추진되는 것임을 인식할 때 산별노조 건설의 원칙을 재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노조들이 전환·통합하는 것이라면 인력·자원의 집중이나 정책 역량의 강화와 같은 것은 이루어질 수 있겠으나, 산별노조 건설의 기준은 그것이 아니다.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다양한 노동자들을 함께 묶어 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의 이 과정은 분명히 지난한 의식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른 쉬운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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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장귀연 님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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