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 조직민주주의 복원해야

[노동운동,어깨를펴고](9) - 민주노조운동의 혁신

한때 "혁신이란 원래 껍질을 벗겨 새롭게 한다는 뜻"이라는 얘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정확한 풀이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혁신이 그만큼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혹시 파충류의 허물벗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뱀의 허물벗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데, 겉가죽의 탄력이 커가는 몸집을 감당할 수 없게 될 때마다 허물을 벗는다고 한다. 이렇게 보자면 혁신에는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따라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정책을 생산하거나 계획을 수정하는 일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커다란 변화가 수반되고, 그 효과가 거시적이라는 점도 새겨둘 만하다.

민주노총 임원선거가 한창이다. 세 후보 모두 혁신을 주요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가운데 그 동안 뜨거운 쟁점이었던 총연맹 임원·대의원 직선제 도입에 세 후보가 뜻을 모은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로써 직선제 도입 가능성은 크게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도변경에는 대체로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혁신을 이루는 데 조직 내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고 있다. 이 점에서 나머지 영역에서는 후보들이 내놓은 혁신과제가 엇갈리거나 방법론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정책공약 형식으로 제시된 혁신과제들은 이번에 탄생하는 새 집행부 임기 중에 현실화되는 것이므로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꾸준히 토론하고 의견을 모아나간다면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혁신과제 나열보다 중요한 것은 혁신의 현실화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혁신은 주요이슈에서 빠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혁신이란 자주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효과가 거시적이라면 대략 1년 반마다 혁신이 강력히 제기된 것은 뭔가 이상하다. 이는 그 동안 시도된 혁신사업이 모두 실패했음을 반증하는 역설이 아닐까. 실제로 이갑용 집행부의 임원직선제 도입 추진을 비롯해 역대집행부의 혁신작업은 대부분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런 추세라면 이번 선거에서 제기된 혁신과제 또한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혁신과제를 나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이고, 조직내 의지를 모아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고, 혁신에 다가가는 원칙이나 관점이 적절했는지 먼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세 후보진영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겠지만 선거홍보물이나 언론보도 내용은 과제를 중심으로 제시된 탓에 맥락이 잘 짚이지 않는다. 지난 10여년에 걸쳐 혁신의 '실패'를 지켜본 상근자로서 드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무엇보다 '혁신'이란 이름에 걸맞는 환골탈태, 대전환이 절실하다. 사업수행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차원을 넘어 총체적 변화를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에 혁신이 요구되는 것은 조직의 성장에 조응해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조직이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분적, 분절적 변화가 아닌 제도와 관행, 의식 등 모든 영역에서 확 뜯어고친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선 '실험정신'도 요구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전조율했을 리 없는 두 후보진영의 캐치프레이즈가 '다시 세우자', '재창립'으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민주노총의 현재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내포하는 것이고, 다른 한 후보진영 또한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양해야 할 현재의 핵심적 난맥상은 무엇인가.

조직 민주주의 위축이 정파대립 불렀다

우선은 흐트러진 조직질서를 정상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본다. 모든 후보가 공유하는 '현재에 대한 강한 부정'은 이같은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으리라. 언제부턴가 민주노총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4기 집행부 들어 '사회적 교섭'을 둘러싸고 대의원대회가 파행을 겪으면서 민주노총의 의사결정과 사업집행은 궤도를 벗어난 바 있고, 여전히 그 후유증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원인을 '정파대립'에서 찾는 진단이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정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고, 어느 정도 대립적 관계에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전에는 문제되지 않던 게 하필 이 때부턴가.

책임소재를 규명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실질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인 정파대립이 정상적인 조직운영에 부담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러나 정녕 그것이 핵심요인이라면 '정파간 협의기구'가 조직을 이끌도록 하는 게 정답일 수 있다. 문제는 아무도 이를 해결책으로 인정하지 않으리란 점이다.

사실은 거꾸로다. 조직운영 상의 어떤 난맥상이 정파대립을 극단으로 몰아간 것이다. 여기서 조직운영의 난맥상이란 다름 아닌 조직 민주주의의 위축이다. 언제부턴가 조직내 이견을 조율하고 의지를 모으기보다는 쉽게 절차적 정당성 확보로 치닫는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회의규칙'에 따라 결정된 사항을 성실히 수행하는 규율과 기풍의 문제로 변질된다. 그런데 그런 규율이 성립하려면 '다수결의 원리'만으론 부족하다. 투쟁조직이기도 한 노동조합은 단결(행동통일)이 생명이고, 그것을 담보하려면 충분한 토론기회(비판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고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매달리니 조직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이다.

비단 정파대립 격화만이 아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고질적 병폐인 '결정 따로 집행 따로' 현상, 거수기 노릇하는 대의원들, 정략적이고 변칙적인 회의 운영 등도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의 위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력화된 비판이 더 이상 '집행부 흔들기'나 '반대를 위한 반대'로 쉽게 매도돼선 안 된다고 본다. 오히려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대의원대회 기능 조정해 장기적 혁신 도전

조직 민주주의의 복원이야말로 구체적 혁신으로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바닥 다지기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중요한 혁신과제라도 기본이 갖춰지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성'에 지나지 않는다. 세 후보진영은 정책공약을 통해 다양한 혁신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기본적 인식에 동의한다면 이들의 최대공약수가 아니라 합집합이라도 혁신과제로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비록 실험성이 강하더라도 거시적 안목에서 미래지향적 도전에 나서보자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대의원대회 기능조정을 제안한다. 어차피 대의원 직선제를 도입키로 뜻을 모았다면 이참에 임기를 3년으로 늘리고, 핵심기능 또한 '3년간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 바꿔보자는 것이다. 현재 대의원대회는 너무 자주 소집될 뿐 아니라 다루는 의제 또한 10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관행과 선례를 쌓은 조직치고는 '뻔한'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선거를 빼고는 회의 참석 유인이 갈수록 줄어들고, 늘 정족수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상황이 이리 되면 충분한 토론을 제약함으로써 최고의결기구를 '통과기구'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는 다시 회의참석 의지를 꺾어 회의성립을 위협한다. 악순환인 셈이다.

그래서다. 회기를 3~5일로 늘려 충분한 시간적 여유 속에 사업을 심의·의결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는 연간사업계획을 형식적으로 심의해 통과시키는 체제가 지속될 경우 근시안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젠 최소한 3년 앞을 내다보는 청사진을 바탕으로 장기적 전망 속에 사업을 펼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끝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정파대립의 문제다. 정파는 애초 조직내 논의·결정구조를 반영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존재로 그 자체로 불건전하거나 민주주의를 해치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 나타나고 있는 극단적 대립양상이 민주노총 위기극복과 조직발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만큼은 부인키 어렵다. 반면 이들의 조직내 영향력 또한 절대적인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 불리는 세 정파세력은 적어도 한 번씩은 민주노총을 주도(집행)한 바 있고, 이번 선거에서도 3파전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의 민주노총 위기가 있게 한 책임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정파 경쟁, '논쟁의 정치' 펴자

극단적 대립양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소한의 신뢰회복이 필요하다. 대립구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파괴적이어서는 곤란하다. 건강한 '내부정치'를 회복해야 하는데 이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경쟁을 펼치는 것이다. 배타적인 '동원의 정치', '쪽수의 정치'에서 '논쟁의 정치'를 되살리는 게 핵심이라고 본다. 최종적 방침을 놓고 사활을 건 공방만 벌일 게 아니라 노선과 정책에 대해 일상적으로 상호작용하고 대중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논쟁의 정치는 폐쇄적 공간이 아닌 열린 마당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논쟁을 위한 민주노총 차원의 미디어가 필요하다. 현재 가동되는 온-오프라인 매체의 일정 부분을 소통공간으로 제공하고, 필요하다면 소통을 주요임무를 하는 새로운 매체를 창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소통의 주체를 정파 조직원으로만 국한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곤란하다. 이 과정에서 정파세력이 단순한 권력추구 집단이 아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노동운동의 소중한 자산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대중적 신뢰를 쌓아야 할 것이다.

사실 기고를 청탁받고 적잖이 망설였다. 현직 사무총국 간부가 선거이슈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혀도 괜찮을까 하는 고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민주노총 상근자 신분으로는 마지막으로 쓰는 글이라는 점에서 그 만한 '자유'쯤은 누릴 수 있지 않나 싶었다. 나아가 창립 때부터 10년 넘게 민주노총을 지켜보았고, 조직발전을 고심해온 한 상근자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부디 민주노총 혁신의 쓸모 있는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기획] "노동운동, 어깨를 펴고"

1회차(1월10일) 시론 : 노동운동의 의제설정 과제
2회차(1월10일) 산별과 지역(1)
3회차(1월11일) 비정규법안과 로드맵 이후 대응
4회차(1월12일) 산별과 지역(2)
5회차(1월15일) 민주노총 연대운동 짚어보기
6회차(1월16일) 사회연대전략 어떻게 할까
7회차(1월17일) 연금 개악 대응은
8회차(1월18일) 노사정위원회와 사회적 교섭 전술이 남긴 것
9회차(1월19일) 민주노조운동의 혁신
10회차(1월22일) 현장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현장을
덧붙이는 말

차남호 님은 민주노총 정책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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