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가 가지는 의미인 집단적 회합의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우리는 예술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기록처럼 예술은 선사시대 경제활동을 위한 마술 내지 주술, 종교적 제의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게 보편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기원은 집회가 의미하는 바로 그 ‘집단적 회합’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술이나 제의는 예술의 기원으로 문헌에 기록되지만 집회에 대해 이제는 누구도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다. 보통 예술은 심미의 대상으로 불리며, 집회는 일상의 방해꾼 정도로 치부된다. 왜일까.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예술은 사회와 분리되는 과정을 밟아왔고(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보다 더), 그 과정에서 예술은 박물관이나 오페라극장에서나 볼 수 있는 미적 상품 정도로 치부되는 역사적 과정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는 사회 분화와 전문가주의 그리고 삶의 방식인 문화를 예술로만 좁혀왔던 주류적 신화에 의해 예술은 예술가만의 전유물로만 인식, 허용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현재 집회는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민중에 의해’ 조직되기 때문이다. 콘서트, 축제, 선거유세, 예배, 학교조회, 학술대회, 회사모임, 팬 사인회 등 대부분의 집회는 허용되지만, 허용되는 집회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연장인 그것뿐이다. 즉, 집회의 분화과정 속에서 모든 집회는 자신의 시공간을 조직하여 왔고 허용됐지만 유독 ‘저항하는 민중’에 의한 집회는 문화적 억압 아래 직접적이면서도 교묘한 탄압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문화적으로 민중에게 용인되지 않는 건 집회만이 아니다. 민중에 의한 문화적 과정은 설 자리를 잃어왔는데, 허버트 쉴러가 ‘문화(株):공공의사표현의 사유화’에서 분석했듯 표현의 자유의 확대는 자본의 영역이었지 민중의 그것이 아니다. 현재적 의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적 장 중의 하나인 인터넷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잠식되어온 과정을 우리 모두 목격했듯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만을 위한 문화적 질서를 강제했다. 신학철의 ‘모내기’, 장산곶매의 ‘파업전야’, 최근에는 이마리오의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처럼 국가권력을 통해 직접적으로는 검열, 삭제했고 보다 구조적으로는 국가보안법, 청소년보호법, 인터넷실명제, 등급제, 토지수용제, 집회신고제 등 ‘장’ 자체를 폐쇄, 왜곡했으며, 궁극적으로 내용에 관해선 상업광고, 멀티플렉스, 테마파크, 기업도시 등 자본주의적 욕망을 생산해왔다.
그렇다면 과연 집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돼 왔을까. 집회시위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건 공간의 정치이다. 공간의 정치는 최근 논란이 됐던 ‘민중 충돌’이 발생하는 근원을 해명한다. 뒤르켐이 공간은 권력을 반영한다고도 했지만 현대의 도시공간은 집회시위를 구조적으로 훼방하는 질서로 구축돼 왔다. 이를테면, 지난해 평택촛불문화제가 열렸던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공유지는 문화제를 거부하는 동아일보사에 의해 조악한 화분들로 점령당했다. 일정한 거점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는 개발주의에 의한 공유지 도난 및 과밀, 자동차중심의 교통정책으로 인하여 집회시위는 참여한 민중에게도, 그 빡빡한 거리를 스치는 민중에게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혹은 충돌하게 하는 구조적 원인을 낳는다.
또한 신고제를 통한 탄압이다. 집회를 자율적인 문화적 과정으로 본다면 국가에 신고할 이유가 없다. 이는 현행 영상물등급분류제도에 문화운동단체들이 비판하는 맥락과 일치하는데, 영상물 제작자는 유통하고자 하는 일정한 대상에 대해 영상물 내용정보를 사전에 안내하고 유통하면 된다. 하지만 현행 영상물등급분류제도는 대부분의 영상물에 대하여 등급분류를 받지 않으면 불법화 한다. 지난해 말 서울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이 시위 일환으로 경찰청 앞에서 상영하고자 했던 독립영화감독 정일권의 ‘대추리전쟁’은 등급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영자체가 불허됐는데 기간 문화운동의 성과로 등급보류제가 폐지됐지만 여전히 영상물등급분류제는 구조적인 표현의 자유 유린을 낳고 있다. 집회 탄압도 마찬가지다. 시청 앞 차도는 광장으로 변했지만 신고제에 의해 운동사회의 정치적 집회는 대부분 불허되었으며, 집회 훼방을 위한 집회신고가 남발하고 있고, 최근 남대문경찰서는 삼성사측의 집회신고를 우선적으로 받아 삼성에스원노동자연대의 집회를 탄압하기도 했다.
또한 수십년간 지속돼온 미디어조작을 통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주목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프로파간더를 자처하는 보수언론은 “집회의 원인과 요구에 대한 심층적 분석보다는 결과와 현상을 선정적으로 선동하여 문제의 본질을 왜곡”(문화연대 성명)하며, 불편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경찰의 공작을 지면화하여 집회 자유 유린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동한다. 또한 교통방송을 보라. 교통방송의 ‘속도’ 중심의 나레이션은 모순을 일상의 불편으로 치환하여, 모순이 해결된 일상이 아닌 탈각된 일상을 ‘자연스럽게’ 꿈꾸게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찰의 집회 가위질과 검열까지 이뤄지고 있다. 집회뿐만 아니라 기자회견까지 경찰은 경찰버스로 포장하여 일반의 시선을 통제한다. 특히 지난해 경찰청은 집회시위현장조치 강화지시를 통해 기자회견이나 문화제까지 엄격 관리한다거나 차벽 낙서, 훼손에 대해서는 ‘의지를 가지고’ 사법조치를 강화한다고 밝힌 바 있으며, 지난해 10월 25일 민주당 이상열 의원 등은 집회시위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기물 착용을 불법화하는 일명 복장단속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검열을 가하는 셈이다.
그러나 집회는 이렇게 글을 쓰고 공유하고자 한다면 공유할 수 있어야 하듯 집단의 문화적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집회는 정치민주주의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의사표현’ 행위라는 점에 주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표현과 그 방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문화이다. 주술이나 제의가 그 당시에 필요한 의사표현 행위로서 이뤄졌듯 인간이 소위 사회적 동물로서 규정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사회 자체가 조직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는 의사표현 행위를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의사표현 행위는 기본적인 인간 종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집회는 도서관에 가는 것, 영화를 찍어 상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축제와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영화는 극장까지 만들어 상영할 수 있도록 하고, 하이페스티벌과 같은 소위 동원형 축제는 세금으로 지원까지 받는데 집단적 주체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집회는 왜 통제와 탄압을 받아야 하는가? 일방의 의사를 제한하는 것은 그 일방을 통제하고자 하는 문화적 검열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런 문화적 억압 때문에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집단적 회합은 정치적 관점은 생략된 동원형 축제 부류만 남아있지 않는가!
따라서 추락한 집회의 의미와 권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집회를 민중의 기본적인 문화적 권리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집회가 민중의 기본적인 문화적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면 과연 집회는 어떠한 제도 개혁과 지향을 가져야 할까.
신고제 폐지, 도시 환경의 공유지 보장, 언론 개혁, 집회 검열 폐지 등 과제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집회를 어떤 식으로 조직할 것인가일 것이다. 나는 집회가 문화적 과정이라면 민중들의 삶의 욕망과 방식이 표현될 수 있는 과정, 민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과정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본다. 문화는 애초 어원이 ‘경작하다’이듯 그리고 ‘문화들’에 의한 문화이듯 ‘다양한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더욱 증폭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집회는 공분은 있으되 모습은 검고, 우울하다. 지배계급에 의해 유린된 민중생존권이 그만큼 비참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다수의 집회에서는 그 비참함이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민중의 민중적 욕망 혹은 희망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과 소통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민중적 욕망을 드러내고 소통하는 과정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을까. 좀 길지만 자메이카 출신 문화연구가인 스튜어트 홀의 논의를 참조하면 그는, 영국 ‘뉴레프트 리뷰’ 창간호에서 “우리가 이 잡지에서 영화나 10대문화를 논의하는 것은, 최신 유행에 맞춰 우리가 시대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논의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적 저항의 문제와 직결된다. … 사회주의 운동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대한 직접적 감각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지금 스튜어트 홀)라고 한 바 있는데, 집회시위의 자유가 문화권의 문제라면, 집회시위 자유 확보 투쟁과 함께 우리는 이제 보다 ‘창조적 저항’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를 한 시대의 감성구조라고도 하지만, 동시대 민중들의 갈망을 문화적으로 드러내고 감성을 가로지르는 의사표현이 필요하다. 지배권력이 해왔던 ‘문화적 억압’ 만큼의 ‘문화적 저항’은 문화적 권리인 집회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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