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아가리에 날고기 넣듯"

[김연민의 푸른산맥처럼] 한미FTA, 그 우울한 게임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협상 기술이 필요하다. 정부나 기업의 협상 전문가가 아니라도 협상의 심리학이나 협상의 핵심전략 정도는 알아두어야 약삭빠른 장사꾼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하물며 국가의 운명을 거머쥐고 강대국과 벌이는 협상은 그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최근 한반도에서 미국을 상대로 담판을 벌이는 두 협상은 협상의 교과서에 실릴 만큼 훌륭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 하나는 북한이 핵무기를 거머쥐고 미국과 벌이는 벼랑 끝 협상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이 “집착”하는 자유무역협정 즉 FTA라는 것이다. 협상의 심리학이나 전략이라는 측면에 제한하여 말한다면, 협상 관련 서적을 조금만 뒤적여 보아도 하나는 협상의 본보기가 될만한 사례이고 하나는 협상의 기본원칙조차 무시한 가을바람에 새털 격인 이상한 게임임을 알 수 있다.

이 협상의 게임을 느긋하게 즐기기에는 속이 편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협상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봄을 가져 올지도 모를 북한이 벌이는 협상은 현재 진행 중이고 ‘선진국 도약의 발판’이 되게 할 수도 있다는 한-미 FTA는 8차 협상을 마치고, 3월 19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리는 고위급 회담만 남겨두었다. 북한의 협상은 초반전으로 협상 게임의 전 과정을 분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한-미 FTA협상은 고위급 회담만 남겨두었으므로 지금이 바로 이 협상을 분석하고 학습하여 그 결과를 고위급 회담에 반영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성공적인 협상은 심리전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유능한 협상자는 협상 테이블에서 승리하는 동시에 상대도 승리했다는 지속적인 느낌을 들게 해 주어야 한다. 서투른 협상가는 상대가 졌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협상에서 많은 양보를 하면 상대방은 기뻐하기보다 ‘저주’한다. 사람은 어떤 합의에 이를 때마다 좀 더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하게 마련이다 즉 “승자의 저주”가 존재한다. 미국은 “승자의 저주”로 지금 괴로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너무 쉽게 양보해 버린다면 협상자들은 그들을 사랑스럽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보기보다 멍청이나 봉으로 간주해 버린다. 흥정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협상 전문가는 ‘협상의 성사 여부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라고 당부한다. 양보와 관련하여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양보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한미 FTA는 한국이 ‘섣달에 장가들고 정월에 아들 재촉하듯’ 서둘렀다. 그것은 협상을 요청하며 먼저 미국이 요구한 ‘협상을 위한 4대 선결 조건’을 들어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미 FTA 협상 4대 선결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약값 재평가 제도 개정안을 취소하고 미국의 압력에 '약값 인하'도 중단하였다. 둘째,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한국 정부는 2006년 1월 26일 축소를 발표하였다. 셋째, 광우병 파동 때 금지된 쇠고기를 2006년 1월 13일 다시 수입하였다. 넷째,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 강화 방침을 취소하며 2005년 11월 6일부터 수입차 적용을 2년간 미루기로 했다. 이는 협상전문가가 이야기하는 “좋은 출발을 위해서 유인책을 제공하라”라는 의미를 잘못 받아들인 대표적 오류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의 협상전문가들은 우리가 협상을 위한 4대 선결조건을 받아들이자, 한-미 FTA에서 추가적인 조정의 여지가 상당히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협상은 자신의 의지에 대한 테스트이자, 아무리 단편적인 가치라도 놓칠 수 없는 전투이다’. 협상에서 한쪽이 어떤 틀 속에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가 에 따라 상대방은 어떤 행동을 할 것 인지를 결심하게 된다.

협상의 핵심전략은 먼저 ‘협상을 통한 합의안에 대한 최선의 대안’(BANT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즉 협상이 실패 했을 때 한쪽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따라 협상력이 정해진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핵무기”라는 강력한 대안을 마련해 두었지만, 우리는 한-미 FTA 협상을 하기 전에 정부, 정치권, 및 언론에서 이를 만들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협상에서는 협상 실패 시 강력한 대안을 가지지 못하면 협상을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협상을 수용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한-미 FTA협상에서 우리가 가진 ‘협상 실패 시 최선의 대안’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를 비밀이라고 생각한다면 협상의 기본도 모르는 것이다.

어떤 협상이든 유보가격, 즉 협상 포기 한계선을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 그런데 한-미 FTA 협상은 ‘협상 가능영역’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양보를 계속하는 정황으로 볼 때 유보가격 조차 정해두지 않고 협상을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협상에서 필요한 제일의 덕목은 인내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범 아가리에 날고기 넣듯” 준비도 없이 협상을 시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인내심마저 갖지 못하고, 유보가격조차 포기하며 조바심을 낸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협상을 계속하면서 지속적인 평가와 준비, 즉 학습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어 있어야 한다. 평가는 협상과정에서 중요한 요소이므로 협상가가 활용하는 전술의 일부로 삼아야 한다. ‘상대방이 내 의도대로 게임을 하고 있는가’, ‘누구의 관점이 협상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 보아야 한다. 8차에 이르는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겸허하게 듣고 평가하는 과정은 없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게임을 숙달하는 기본이다”라고 협상 전문가가 말한다.

이번 한-미 FTA 협상에 들어간 외교관들은 협상의 체결을 위해 지나친 몰두와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자신감과 몰두는 협상과 같이 어렵고 불확실한 모험을 감행할 때 용기를 준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감과 몰두는 무모한 짓을 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경력관리에 가장 도움이 되는 집단을 위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아가 패배를 견딜 수 없어 하고, 협상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으며, 협상체결에 대한 강한 욕구가 경제적 분별력을 압도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했다. 자신에게 그러한 반성 능력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었어야 했다.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협상자에게는 불패신화가 존재하며, 리더들이 모순된 증거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며, 구성원들이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는 집단사고의 징후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한-미 FTA 협상은 국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한 이해 관계의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를 먼저 요구해야 했다.

한-미 FTA 협상은 거래와 관계를 혼동하여 협상이 진행 되었다. 협상은 상호승리 (win-win) 게임인 통합적 협상과 상호경쟁(win- lose) 게임인 배분적 협상이 있다. 한-미 FTA 협상은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우선시 되는 협상이라기보다는 거래를 위한 배분적 협상이다. 그런데 외교통상부는 한국의 미국에 대한 관계를 고려해서인지 줄곧 양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배분적 협상에서 거래를 통해 상대방이 크게 당하면 불신과 정보공유 거부의 악순환이 야기된다. 오히려 협상을 통해 관계를 강화하려면 섣부른 양보를 피해야 했다. 국민이 한국의 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국가로 미국을 지목하는 것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미국의 지나친 요구와 정부의 무분별한 양보가 낳은 결과일 수 있다.

미국은 이번 협상에서 협상의 기법을 충분히 활용했다. 주저하는 협상자로 4대 선결조건을 요구했으며, 무역촉진권한 만료시기인 3월 말이라는 시간 압박전술과 의회에 보고하고 협의하는 상위권한 이용전략을 충분히 활용했다. 반면 한국은 총체적 전략, 전술의 부재를 보여 주었다. 국회와 협상과정을 협의하지 않았으며, 의회에 체결의사를 통보할 의무도 지지 않으며, 의회의 체결 동의 시한조차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 협상은 협상의 기본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은 채 진행되어, 이미 너무나 많이 양보한 것을 되돌려 놓을 수 없기에 이제는 이 협상을 철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이 협상이 체결된다면 이는 다음 정권 때 반드시 청문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한-미 FTA 협상은 ‘투자자 국가 소송제”의 “제외해야” 에서 “할 수도 있다” 등 있을 수도 없는 후퇴를 거듭함으로써 선진국으로 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경제 몰락의 발판이 될 것이다. 현 정권뿐만 아니라 국회도 책임을 내버린 반성을 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기득권 세력의 협상에 대한 찬성만을 홍보할 것이 아니라 반대자의 목소리도 실어 그것이 충격과 놀라움이라는 플린칭(flinching) 효과를 내게 하여 협상에 힘을 실어 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미국은 그들이 요구한대로 순순히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며, 한국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미 FTA 협상은 우울한 게임이다.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명승부의 게임이 아니라 협상의 기본 원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은 허술한 게임이다. 정말 프로게이머가 필요한 시대이다.
덧붙이는 말

김연민 님은 울산대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이 글은 한겨레 한토마와 동시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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