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의 현재는 우리의 10년 뒤?
알다시피 1980년대에 중남미 국가들은 소위 IMF의 신자유주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0년뒤인 1990년대에는 NAFTA가 체결되면서 중남미에 FTA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10년 뒤인 2000년대에의 중남미는 어떤가? 외신을 통해 나타나듯이 수많은 나라들에서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지향의 정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쿠바가 외로이 지키고 있던 사회주의 지향의 좌파정권은 베네수엘라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볼리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 등 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우리가 사는 곳은 어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IMF가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후, 10년 뒤인 2007년 현재 한미FTA가 추진되고 있다. 그렇다면 10년 뒤인 2017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도 비슷하다. 중남미와 이곳은 10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남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혁의 불길은 어쩌면 10년 뒤의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IMF와 FTA를 통해 만들어지는 세상, 그것은 미 제국주의가 강요하는 착취와 억압이 전면화 되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이 중남미에서는 10년 먼저 일어난 것이다. 변혁의 ‘객관적 조건’은 이렇게 성숙되어 간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 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주체역량’이 준비되지 않고서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IMF와 FTA가 만든 세상, 그것이 ‘구름(객관적 조건)’이라면 삶속에서 변혁을 실천하는 주체들의 준비정도는 ‘응결핵(주체역량)’이다. 구름과 응결핵이 만나야 비로소 비(변혁)가 내린다. 이것은 사회과학적 진리이다.
주체역량과 투쟁, 그리고 지도력
중남미에서 현재 대통령 선거 승리를 통해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있는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이 나라들에서는 거의 항쟁 수준의 대중투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미 제국주의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이 마찬가지이지만, 유독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에서 대통령 선거 승리를 통한 제헌의회 소집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주체역량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세 나라에서 항쟁수준의 대중투쟁이 공통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은 바로 주체역량 형성에 있어서 핵심은 ‘투쟁’이라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투쟁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은 ‘주체역량’ 뿐만이 아니다. 바로 ‘지도력’이다. ‘객관적 조건’의 필연적 결과로서 형성되는 근로대중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고통이 세상을 바꾸는 일치단결된 힘으로 결집되는 것은 ‘지도력’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력은 투쟁과정을 통해 검증되고 형성된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치단결된 힘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지도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 라파엘 꼬레아(에콰도르)와 같은 인물들은 바로 이 ‘지도력’의 구심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주권, 그리고 제헌의회
진보진영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라고 협소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약간은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맘씨 좋은 양반이 자기가 부리는 종놈(?)들에게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해주면 그것이 ‘사회주의’인가? 삼성 이건희가 사원들에게 사내 복지 차원으로 직원들의 의료비와 교육비 전액을 지원해주면 그것이 ‘사회주의’인가? 절대 아니다. 본디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근로대중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사회의 주인, 그리고 역사의 주체로서 우뚝 서게 되는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그 누구한테 자비를 바라고 사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닌 것이다.
근로대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가 제기된다. 바로 ‘국가주권’의 문제와 ‘생산수단’의 문제이다. 계급사회에서는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이 항상 지배계급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이용해서 근로대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왔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민중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헌의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존의 국가기구를 일거에 청산하고 새로운 헌법에 의거해 새로이 국가기구를 구성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바로 제헌의회인 것이다. (이론과 실천, 2007년 4월호 ‘개헌논의와 베네수엘라 제헌의회의 교훈’ 참고) 새로이 구성한 국가기구는 민중들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변혁운동의 지도자들로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주권’은 지배계급의 손에서 민중의 손으로 넘어오게 된다.
브라질의 룰라 정권이 그 많은 기대를 받고도 개혁을 한걸음도 전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게 된 주요한 이유중 하나가 바로 ‘국가주권’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룰라의 PT당은 의회에서 20% 정도만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개혁적 법안 추진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브라질의 룰라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국가주권’을 민중의 통제하에 두기 위한 기획 자체가 부재했던 것이다.
지도력의 부재, 어떻게 단결할 것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변혁과정에서 ‘주체역량’과 ‘지도력’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객관전 조건’이 형성되도라도 주체역량과 지도력이 부재하다면 낡은 세상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은 불가능하다.
최근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 내에서는 소위 ‘민중경선제’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진보와 변혁을 실천하는 세력들이 고립분산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로 뭉쳐야 한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제기된다. 바로 ‘지도력’이다. 필자는 일부에서 제기하는 ‘민중경선제’의 진정성을 이해하면서도 진보와 변혁운동 세력을 묶어세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중들은 대통령 후보의 선출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 표를 받는 것만으로 그 세력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한 표를 준다고 지지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그리고, 실상 당의 대통령 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원들의 변혁에 대한 의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당원들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원칙적으로 올바르다. 문제는 오히려 ‘민중경선제’가 아니라 ‘당’ 그 자체에 있다.
민주노동당이 실천과 투쟁과정에서 민중들의 신뢰를 얻었다면 그것은 당의 ‘지도력’으로 된다. 실천과 투쟁과정을 통해 형성된 지도력은 중요한 시기에 단결의 구심으로서 역할을 한다. 지금의 문제는 당의 ‘지도력’이 부재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지도력’도 부재하고 ‘원칙’도 없는 가운데 소위 통합을 통해 정권을 창출했다가 완전히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사례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노무현’ 정권이 바로 그 사례이다.
필자는 현 시기에 당에 선차적으로 나서는 문제는 지도력의 복원을 위해 ‘당’을 제대로 세우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국 ‘재창당’의 문제로만 해결될 수 있다. 진정성 있는 당원이라면 현재 당이 보여주고 있는 의회주의에 경도된 모습에 매우 우려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근로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의회’의 달콤함에 가까워지고 있는 당의 모습은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재창당’을 통해 당을 좀 더 ‘변혁적’이면서, 좀 더 ‘대중적’으로 환골탈태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가 바로서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도력’이 형성될 것이며 어떻게 변혁을 수행할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새로운 공화국 건설을 위한 기획과 운동이 필요하다
근로대중이 주인이 되고, 갈라진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세상은 지금까지의 공화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이 건설하려는 세상은 지금의 모순덩어리 공화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공화국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국가기구를 완전히 해체하고 민중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중남미의 ‘제헌의회’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례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동지들은 등따시고 배부르게 해주겠다는 식의 공약은 얘기하고 있지만, 변혁의 핵심과제인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겠다는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변혁의 핵심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소위 ‘등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는 사민주의식 해법조차도 제대로 해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신자유주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서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경제문제는 사실은 정치의 문제이고 결국은 권력의 문제이다. 권력을 부르주아 지배계급에 그래도 두고 떡고물을 떼어서 ‘등따시고 배부르게’ 해주겠다는 사민주의 방식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중남미의 ‘제헌의회’ 사례는 ‘국가주권’ 문제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국유화’ 사례는 ‘생산수단’ 문제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변혁을 수행할 ‘집권전략’을 내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준비된 집권전략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새로운 공화국 건설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고 대중적 운동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정리하자면, 우리에게 현재시점에서 주요한 과제는 ‘재창당’을 통한 주체의 준비와 ‘집권전략’을 통한 새로운 공화국 건설 운동이다. 이러한 치열한 고민이 없이 관성적으로 기계적으로 치르는 대선과 총선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선거라는 것은 변혁과 집권의 하위개념이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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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님은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