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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의 지식인에서 지식인 지배계급으로

[특별기획 : X맨은 바로 너!](6) - 우리 사회의 지식인

지식인 환상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끼여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해야하는 운명의 소유자.”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진리가 아니다. 사실 그런 운명은 몇몇 지식인의 자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가진 지식인들도 그리 많지 않다.

최근의 담론들을 살펴보면 지식인들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끼어있기는커녕 두 계급 ― 대부분은 지배계급 ― 으로 빠르게 해소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식이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던 시대에서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 되는 시대로 변하면서, 지식인 역시 권력과 자본의 옹호자에서 곧바로 권력자나 자본가로 전화하고 있다.

신은 죽었으나 그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고 했던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라던 인텔리겐치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환상이 여전하다. 다시 말해 지식인은 자신들의 이해에 충실한데 대중들은 여전히 그것을 우리 모두의 이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지식인에 대한 환상이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지식인 시대를 허용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국익’이니 ‘글로벌스탠다드’니 하는 전칭(全稱) 용어들은 사실상 특수 이해를 표현한다. 즉 ‘모두’가 살기 위해 ‘부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하지만, 지난 십여 년의 경험은 그 ‘모두’가 일부 집단이며, 다수는 희생이 불가피한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처럼 보편이 특수이고 특수가 보편인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과학이고 과학이 이데올로기다. 즉 보편적 지식과 지식인이 그 자체로 당파성을 띠게 된다.

환상 속의 지식인

현재 우리의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깝다. ‘시장개방과 자유화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킨다’, ‘탈규제와 사유화(민영화)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등의 말 앞에는 ‘나는 믿는다’는 한 문장이 생략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주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현실에 비추어 검증하지 않고, 현실을 자기 믿음에 맞추어 검증한다. 자신들의 교과서 안으로 현실을 강제로 끼워넣는 것이다.

2002년까지 4년간 영국의 무역과 산업 담당 각료였던 바이어스(S. Byers)는 <가디언>(2003년 5월 19일자)에 독특한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내가 틀렸다. 시장 자유화 정책은 가난한 자들을 상처 입힌다.' 그는 '자유화(liberalisation)'가 모두의 복리를 증진시킬 것이라는 신념, 지금도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을 지배하는 그 신념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고백했다. 그는 “에어컨 나오는 각료 사무실을 떠나” 직접 대중들을 만난 게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직접 본 현실은 자유화가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결국에 빈곤층을 구제할 것이라는 신념과는 정반대였다.

불행히도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이런 관료나 지식인들은 아주 희귀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며칠 전 대부업체의 폭리를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재경부 관료는 대부업체의 이자율 상한선이 너무 높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자율을 낮추면 자금 공급이 줄어 결국 돈을 써야하는 서민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그러면서 그는 이자율이 낮추면 공급이 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부업체들이 사상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고 높은 금리를 탐내서 외국 자본까지 국내 사채시장에 뛰어드는 판에, 그리고 원금의 몇 배까지 불어난 채무 때문에 목숨을 끊는 서민들이 양산되는 판에 한가하게 수요공급이론이나 들먹이는 그는 틀림없이 ‘에어컨 나오는 각료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Walden Bello)는 권력과 정책에 대한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좌파 이론의 사회적 영향력은 1960-70년대를 정점으로 퇴보했고, 포스트모던 계열의 급진 이론들도 오직 대학 안에서만 급진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알고 보면 대학의 연구실에서 주조해낸 이데올로기이다. 진보 이론은 대학 안으로 말려들고 있지만 보수 이론은 대학 바깥으로 펼쳐지고 있다. 주류 지식인들은 대학과 기업, 정부를 오가며 현실을 자신이 구상한 대로 직접 디자인하려 한다.

신자유주의가 이처럼 득세하게 된 것도 시카고 학파로 상징되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레이건과 대처 정부 하에서 대단한 정치적 성취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 세계를 자신들이 이론적으로 상상한 세계로 개조할 실질적 권력을 획득했다. 현재 세계는 그들 진리에 대한 증명이라기보다는 그들 권력에 대한 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론이 현실을 반영하는 시대가 아니라 현실이 이론을 반영하는 시대인 것이다.

지식인의 당파성

이른바 ‘시카고의 아이들(Chicago Boys)’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원래 ‘시카고의 아이들’은 2-30명 정도의 칠레 경제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 시카고 대학에서 강도 높은 경제 교육 프로그램(일명 ‘칠레 프로젝트’)을 이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에서 배운 대로 칠레 경제를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제 ‘시카고의 아이들’은 미국에서 주류 경제학을 공부하고, 미국식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각국의 경제학자 및 경제 관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엥겔스는 기독교라는 ‘전복당’이 로마를 정복한 비결을 ‘군대와 싸우기 전에 군인들을 모두 기독교도로 만들어 버린 것’에서 찾았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정복한 비결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사회를 보면 이 점은 더 분명하다. 재작년 <시사저널>과 서울대 인터넷 뉴스 <스누나우>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 사회대 교수의 86%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매체에 회자되어 지금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지만, 재작년 미국의 고등교육 전문 잡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은 미국 내 박사학위 소지자의 출신 학부조사 결과 서울대가 전체 2위를 차지했다는 놀라운 뉴스를 전하기도 했다. 서울대가 미국 박사 학위자 수에서 미국 유수의 대학들을 제친 것이다.

대학교수만이 아니다. 지난 주 경향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국책연구기관인 KDI 연구원들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주류경제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고, 역대 KDI 원장들 모두는 사실상 미국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물론 기업 연구소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신장섭과 장하준이 미국의 신규 경제학 박사들의 이름을 조사한 결과, 1987-1995년 사이 약 10%인 8백 명 가량이 한국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단순 환산하면 매년 8-90명의 미국 경제학 박사들이 한국에 상륙하고, 대학과 정부, 기업의 요직을 차지한다. 사실상 대학과 정부, 기업의 주류 지식인들은 인식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활발한 자리바꿈도 일어나고 있다. 교수가 경제 관료로, 정부나 기업의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자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달에 펴낸 <대한민국정책지식생태계> ― 지식생태계의 구성은 자본의 진정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 에 따르면, 정치사회적 주제와 달리 경제 분야에서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전체 논의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가령 국민연금제도 개선 문제의 경우 KDI, 경총,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에서 연구자들이 논의를 제기하면 그 바탕위에서 나머지 지식인들이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점차 정부와 기업,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이 디자인한 세계 위에서 구축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은 특정한 나라에서 특정한 이념으로 무장한 동종의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이 충원되는 계급적 기반도 매우 협소해지고 있다. 고급 고등교육 기관은 고소득층 자녀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원이 2004년 발표한 서울대 신입생 가계조사 자료를 보면, 1985년 고소득층 자녀와 비고소득층 자녀의 1.3대 1이었으나 그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2002년에는 17대 1에 육박했다. 35명 정도의 정원을 가진 과라면 33명 정도가 고소득층 자녀인 셈이다.

권력의 지식에서 지식의 권력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계급적 독점이 한국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계층이 지배계급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리고 지식정보화 사회로 나아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될 것이다. 글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지식인은 점차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그이기를 멈추고 통치계급 자체로 전화되고 있다.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주류 지식인과 통치계급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지식인 자신이 이제는 이해의 당사자이다. 그들 이론의 과학성은 이제 그들 자신의 권력과 부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

지식 투쟁이 계급 투쟁이 되어가는 시대. 한동안 계층 이동의 통로였던 교육이 계급 재생산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는 보고서들이 여러 나라에서 나오고 있다. 교육이 바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중요한 접근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에 기대는 투쟁의 시대는 끝나고, 지식인 없는 지식 투쟁의 시간이 오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계급 독점을 깨고 그것을 대중에게 순환시키는 정보 운동, 교육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덧붙이는 말

고병권 님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태그

지식인 , 지식인 자체의 당파성 , 지식의 권력 , 지배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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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차윤서

    "지식과 정보의 계급 독점을 깨고 그것을 대중에게 순환시키는 정보 운동, 교육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마지막 말이 제게 힘을 줍니다. 고맙습니다.

  • 민식

    글을 읽다보니 토대의 차이가 상부구조의 격차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씁쓸한 사회의 모습입니다. 특히나 17:1이라는 수치는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군요.

  • 참민중

    글 잘 읽었습니다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선전과 해석에 환멸을 느낍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양분된 의식구조입니다 이상한 건 피지배계급들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같은 피지배층들을 공격한다는 것이죠 얼마 후 있을 금속노조 총파업과 그 전에 있은 현대차 파업을 두고 피지배계급이 주류언론(신자유주의파 지식인들의 집단)의 말만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정없이 욕한다는 것이죠 강남 서초의 부동산 부자들을 대변한 언론들의 말인 세금폭탄과 재벌을 그대로 반영한 귀족노조 그리고 폭력시위 길거리 정체 등이 이런 현상들이죠 앞으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많이 노력해 주십시요 저도 옆에서 말 없이 돕겠습니다

  • 랍비

    잘 읽었습니다. 뭔가 답답했던 부분이 조금씩 열리네요.

  • 지철

    지식과 정보는 권력이다. - 미셀퓨코..

  • ???

    필자는 글의 전반부에서 (주류) 지식의 당파성에 대해 말하다가 결론을 “지식과 정보의 계급 독점을 깨고 그것을 대중에게 순환시키는 정보 운동, 교육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라는 주장으로 끝내고 있다.
    이 주장(지식의 민주화)의 전제인즉, 보편적(혹은 실용적) 지식이 존재하고 이를 지배 계급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데, 이는 글의 전반부에서 지식 자체가 지배 계급의 이해에 맞게 주조되고 있다는 지식의 당파성에 관한 필자의 언급과 배치된다. 즉 지식을 정의하는 축이 당파성(지식은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에서 보편성(보편타당한 지식이 가능하다)으로 옮겨가고 있다.
    오히려 전반부에 이어 일관적일 수 있는 주장은 “부르주아 지식인에 맞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프롤레타리아 지식인이 요구되고 있다”가 아닐까?
    고병권은 프롤레타리아 지식인이기보다는 계급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 zol

    ??? 님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깨라는 요구가 보편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깸으로써 보편지식의 환상과 폭력을 깨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독점과 민주주의가 반대되고 민주주의와 보편이 통한다는 님의 통념과 고병권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오히려 독점이 보편환상을 낳고, 민주주의가 특이적(singular) 지식의 생산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지요(예전 그의 어떤 글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적 있습니다.) 그리고 당파성 이야기는 곧바로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지식인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고병권은 그런 지식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현재는 그런 환상이 착취 근거가 오히려 되고 있다는) 주장이고... 오히려 '지식인 없는 지식 투쟁'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듯합니다. 지난 주 경향신문에도 '대중지성'에 대해 말하며 그런 이이기를 폈더군요. 님의 단순 도식: "지식 독점 깨기 -> 지식 민주화-> 보편지식"은 논지를 잘못 이해한 것처럼 보이네요.

  • 무식한놈

    그럼
    고병권은 지식인인가, 무지랭이인가?
    아니면, 어떤 지식인인가?
    지배계급의 지식인이 아니면 지식인 지배계급?

  • ???

    지식인 없는 지식투쟁이라... 배웠다는 사람들은 가끔 제 정신이 아닌 듯한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이해하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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