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하경] 소설가

가슴으로 쓴 글

[기고] '소금꽃 나무' 서평

첫 인연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건 1989년 겨울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해 여름>을 쓰기 위해 창원 통일중공업 노조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마산창원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해서, 때마침 부산지법에 있던 강금실 씨(전 법무장관)가 혼자 기거한다는 얘기를 듣고 염치 불구하고 찾아가, 그의 아파트 방 한 칸에 눌러앉아 식객노릇을 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그 아파트는 부산의 서쪽 끝 사상 시외버스터미널과 가까운 동네에 있었고, 사상에서 마산까지는 5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버스 타고 부산과 마산을 왔다갔다하며 자료도 수집하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다.

인터뷰가 없는 날은 가끔 부노련(부산노동조합총연합)의 행사도 기웃거리고 자료도 얻고 했는데, 그때 거기서 처음 <조공노동자신문>을 봤고, 신문을 만든 이가 중학교를 중퇴한, 그것도 여성 용접공 김진숙이란 사실에 깜짝 놀라서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 달려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을 다 읽은 다음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돼. 학출이 대신 썼거나, 최소한 뒤에서 코치를 했거나, 아님 학출한테 글쓰기 훈련을 빡쎄게 받았거나....그렇다고 생각했다. 글을 써본 사람들은 쉽게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어려운 얘기를 어렵게 쓰는 게 쉬운 얘기를 쉽게 쓰기보다 더 힘들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그냥 말하듯 술술술 힘 안 들이고 쓰면서도 노동자의 생활과 생각을, 안 봐도 비디오처럼, 안 들어도 오디오처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듯,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면, 최소한 선수가 돼야 한다고, 글쓰기의 고수가 되야 한다고,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더욱이 새해 첫 논설치고는 파격적이었다. 다른 일간신문은 물론 다른 노동자신문과도 달랐다. 흔히 연두사설에는 보통 때보다 더 힘이 들어간다. 신문의 논지를 더욱 뚜렷이, 새해의 목표나 전망을 강하게 드러내야 하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잔뜩 권위를 부풀리면서 여간 폼을 잡는 게 아니다. 감동이 목적이 아니라 가르침이 목적이기 때문에 관념어 추상어가 난무하는 건 물론이고, 첫째 둘째 셋째 등등 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딱딱한 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는 판에 박은 듯한 천편일률적인 관념어 추상어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지금도 그때 읽은 글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자세한 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짐작된다. ... 늙은 노동자가 새끼줄에 꿴 연탄 두 장을 들고 힘겹게 산동네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노동자들이 그나마 하루 연탄 두 장씩이나마 떨어뜨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추운 겨울 가난한 노동자가 연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한 해가 되어야하지 않겠냐....고 끝난 걸로 기억된다.

그의 글은 처음부터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분칠한 얼굴과 콧소리로 가장하는 싸구려 유혹과도 달랐고, 거창한 거대담론으로 기를 죽이듯 압박하는 당위성과도 달랐다. 아주 작고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조용조용 시작되는 그의 글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한 발짝 두 발짝 들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어느 새 아무렇지도 않게 가난한 노동자의 일상에 뒤섞여 함께 밥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떠들다 잠이 들게 한다.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한숨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그들의 얼굴에 깊이 팬 주름살 하나하나를 가만히 더듬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콧마루는 시큰해지고 눈앞은 뿌옇게 흐려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낀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쥐기도 한다. 단결! 투쟁! 올 상반기 투쟁의 목표! 투쟁의 전망! 이런 단어나 느낌표조차 하나 없이도 몸과 마음은 결기로 단단해지고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엄청난 변화다. 이런 변화야말로 진정 깊은 감동이고 강한 설득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염화시중의 미소

솔직히 말해 충격 그 자체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노동자 김진숙의 글이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혼자 몰래 삭이고 또 삭이던 치명적 약점 하나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 바로 지식인 콤플렉스였다. 김진숙의 글을 계기로 폭발하고 만 것이다. 구미호처럼 아홉 번 둔갑을 해도 노동자가 될 수 없다는 그 절망감. 지식인도 노동소설을 쓸 수 있다고 겨우 버티고 있던 얄팍한 사명감과 당위성이 한방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애진작에 노동소설을 쓰겠다고 떠들고 다니며 똥 폼을 잡은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러웠는지, 취재와 인터뷰만으로 소설을 쓸 수 있다던 호언장담이 얼마나 허황된 욕심이고 오만이었는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대로 보따리 싸서 서울로 올라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해 여름>을 끝까지 완성한 것 역시 그의 글 덕분이었다. 그의 글이 나를 아프게도 했지만, 동시에 그 아픔이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글을 써서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써야 감동을 줄 수 있는지도 몰랐다. 김진숙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써온 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김진숙의 글이 감동적인 건 단지 그가 노동자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보다 노동자를 사랑하고 노동자의 삶에 대해 항상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아픔과 슬픔과 두려움이 뭔지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잘 헤아리고 따뜻하게 보듬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짜 감동적인 글을 쓰려면 노동자와 노동자의 삶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지면 되었다. 그 관심과 사랑이 진정이기만 하면 되었다. 한마디로 가슴으로 쓰면 되는 것이었다. 가슴으로 쓰는 글이 진정한 감동을 주는 글이었다. 그때서야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 바로 이거야! 가슴으로 쓰는 글!

나도 한번 그런 글을 써보고 싶었다. 가슴으로 쓰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노동자냐 지식인이냐의 구분은 핑계일 뿐이었다. 손끝 글재주만으로 쓰느냐? 머리로 쓰느냐? 가슴으로 쓰느냐? 감동은 이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노동자가 썼냐 지식인이 썼냐의 차이에서 감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 감동적인 글을 쓰려면 가슴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인간과 삶을 가슴으로 사랑하며 살아왔기에, 그로 인해 누구보다 상처와 아픔을 많이 겪었기에, 그래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오만이고 욕심인 줄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 때는 그나마도 없었으면 버티지도 살아가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나도 가슴으로 글을 써보리라.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그의 글이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다가와 나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지식인이 노동소설을 쓸 수 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 미소를 떠올린다.

그 길로 나는 짐을 싸들고 다시 서울에서 마산으로 이사를 내려오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지역노동자들과 살을 부대끼며 함께 울고 웃고 살아가면서 <그해 여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노협 창립과 동시에 상층 지도부 대부분이 구속 수배로 공백 상태가 되었다. 울산에서는 골리앗투쟁이 벌어지고 창원에서도 통일중공업 노조 이영일 열사가 분신하는 등으로 전노협 차원의 총파업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밖으로 뛰쳐나가 투쟁대열에 동참해야 하나 아니면 안에 틀어박혀 소설을 마저 끝내야 하나, 두 갈래 갈림길 앞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할 때마다 <조공노동자신문>을 떠올렸다. 그 신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투쟁동참과 글쓰기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피가 튀고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투쟁하는 것과 똑같이, 투쟁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글을 쓴다면, 그런 글은 투쟁과 똑같다고, 하나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깨달음의 힘으로 나는 부족하나마 <그해 여름>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영도 앞바다도 울었다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뒤 인사차 부산을 찾았을 때가 1990년 말인지 1990년 초인지는 모르겠다. 겨울인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박창수 위원장이 강제 연행된 게 1991년 2월 10일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였으니까 아마도 그 이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부산에 내려가 강금실씨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부노련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회의실에는 부산지역 노조간부들이 송곳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했다. 한 겨울인데도 뜨거운 열기가 후끈후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연단에는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지역적 공동파업이나 공동대응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던 걸로 추측된다. 그 회의실 맨 앞자리에 김진숙씨가 앉아있었다. 처음 얼굴을 본 게 그날이지 싶다. 무척 앳되 보였고, 열기 때문인지 볼이 발그레 상기되었고, 그 때문에 얼굴 전체가 복숭아처럼 발그레 빛났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박창수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김진숙을 만났다.

그날 한진중공업 맞은 편 언덕받이 산동네는 까마귀떼가 덮친 것처럼 사람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이른 아침부터 박창수 열사의 운구를 배웅하기 위해 할머니 아줌마 아이들이 몰려나와, 길을 메웠고, 장독대와 담장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지붕 위까지 올라앉아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생떼 같은 지아비와 애비를 잃은 젊은 아내와 어린 두 남매를 바라보면서, 하나같이 발갛게 부어오른 그들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굵은 뼈마디가 불거진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검고 주름진 얼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장례식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늦게서야 시작되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유명 인사들의 추도사가 지루하게 흘러가자 모두들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마이크가 터질듯 쩌렁쩌렁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저마다 누고? 하면서 목을 길게 빼밀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부산시민들이 김진숙의 이름을 알게 된 계기가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박창수 열사여! 당신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봅니다.”

김진숙이 한 번씩 목 놓아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영도 앞 바다가 쩌렁쩌렁 울렸고, 흐느낌은 오열로 변했다. 장례식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운구 행렬이 영도다리를 지나 시청 앞으로 향했다.

“창수야, 일어나라. 일어나서 싸워라!”

온 부산이 다 일어나 울부짖는 듯 메아리치던 이 목소리, 이 목소가 <소금꽃나무>를 읽는 지금도 귓전을 울린다. 새삼 그때처럼 눈물이 또 흘러내린다.

1992년 나는 다시 서울에서 마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누가 <연대와 실천>에 글 쓸 사람을 물어보기에 김진숙을 적극 추천했고, 정확한 날짜는 가물가물하지만 그 즈음 정식으로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눈 것 같다. 김진숙은 잦은 수배와 구속으로, 나는 서울과 마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노라고 매번 어긋나기만 했었다. 그런데 첫 만남인데도 흥분도 설렘도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아마 그동안 많은 글을 읽어서 잘 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마치 아주 오래 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여겨져 그랬는지도 모른다.

완벽주의자 = 지독한 노력파

‘김진숙이 만난 사람들’(1994년 12월~ 1995년 5월)은 꽤 인기가 있어서 나도 그랬지만 그를 좋아하는 애독자가 참 많았다. 그런데 갑가기 그가 구속되는 바람에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석방된 뒤에도 그의 글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그는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어찌나 큰지 진짜 감옥보다 더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보다 글쓰기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성격을 알기에 서운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를 글 감옥에서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진숙은 완벽한 글쓰기로 꽤 정평이 나있다. 강의안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 정도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교육이나 연설을 의뢰했을 때 그에게 수락을 받기가 쉽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강의할 자신이 없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에 승낙하면 거의 백 프로 절대적으로 신뢰해도 좋다.

이런 유명세에는 ‘지독한 노력파’라는 또 다른 별칭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는 항상 강의안이나 연설문 하나를 준비하는데도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 사전에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핵심 주제나 전달할 내용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건 물론 수많은 예를 찾아내 들어주며 쉬운 말로 정리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완벽한 강의안이나 연설문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의 강의안이나 연설문은 그 자체가 잘 쓰여진 하나의 작품에 비유되기도 한다.

<소금꽃나무>에 실린 글 중에는 강의안이나 집회장에서 한 연설문을 그대로 옮긴 것도 있다. 김진숙에게는 말과 글이 하나기에, 새롭게 고치거나 바꿀 이유가 없을 정도로 말과 일치하기에, 강의안이 연설문이 곧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고전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김진숙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건,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뜬 건 2003년 한진중공업노조 김주익 열사 추모사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교육과 강의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조합원도 많을 테고, 이래저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부산역광장에서 낭독한 김주익 열사의 추모사가 인터넷으로 퍼져나간 뒤부터 그 이름이 전국적 지명도를 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글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119쪽~123쪽)를 손꼽을 것 같다.

이 글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잊혀 질 그런 글이 아니다. 아마도 노동문학의 고전으로 남아 영원히 우리 가슴에 기억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콧마루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전의 반열에 올려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열사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같은 글 123쪽)

노동자가 가혹한 운명을 지고 살아가야하는 이 비극의 땅을 이 한마디로 절절하게 표현한 문장을 나는 어디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그냥 그렇게 살 걸 그랬습니다....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걸 그랬습니다.....감지덕지 살 걸 그랬습니다.” (같은 글 120쪽~121쪽)

지면상 생략했지만 말 줄임표(....) 안에 들어간 내용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차라리 노예로, 짐승처럼, 벌레처럼 살았다면 최소한 이 젊은 열사들의 죽음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겠냐는 반어법 앞에서 회한과 허탈감이 밀려온다.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냐는 그의 절규를 들으면서는 비수로 후벼 파는듯 가슴이 저며온다. 이런 추모사를 들으며 어떻게 카메라 렌즈가 눈물로 얼룩지고 부산역 광장이 눈물바다로 변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고스란히 되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리던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글 123쪽)

이 마지막 살 떨리는 문장을 읽으면서 태연히 배를 깔고 엎드려 책장을 넘길 배짱이 나는 없다. 이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게 된다. 하긴 이 책은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벌러덩 누워서 술렁술렁 읽을 수 있는 책이 분명 아니다. 불편한 책이다. 읽다보면 왠지 벌을 서거나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든다. 한마디 한마디 아픈 데만 골라 콕콕 찔러댄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반박하거나 핑계대거나 도망갈 수가 없다. 김진숙의 글이라서 그럴 것이다.

사실 이런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김진숙이기에 쓸 수 있다. 아니 김진숙만이 쓸 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이유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바치는 추모사

그런데 말이다. 나는 그의 추모사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탁월한지, 얼마나 감동적인지를 말하면서도 자꾸만 속이 거북하다. 마음에 안 든다. 칭찬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죽은 자를 기리는 글을 잘 썼다고 추켜세운단 말인가.

반대로 생각해보면 김진숙의 추모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만큼 열사가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줄줄이 이어진 열사들의 죽음이 김진숙으로 하여금 억장 무너지는 슬픔과 치 떨리는 분노에 찬 추모사를 쓰게 한 것이다. 결국 그 추모사는 수많은 열사들에 의해 만들어낸 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잘 썼다고, 감동적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칭찬할 수 있나. 아무리 잘 써도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함부로 칭찬도 할 수 없는 글, 그것이 바로 추모사다.

추모사는 쓰기 힘들다. 꺼린다. 좋은 일도 아니고 죽은 사람 일에 나서는 데, 그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뽀다구가 나는 일도 아니다. 아무리 잘 써봤자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하다. 고인을 잘 알아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게 추모사다. 그래서 대부분 형식적인 요식절차로 때우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에는 김진숙이 쓴 열사들의 추모사가 6편이나 등장한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추모사를 도맡았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김진숙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왜 그렇게 힘든 추모사를 많이 썼냐는 것이다. 단지 마음이 약해서,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닐 것이다.

추모사는 무엇보다도 다른 글과 달리 슬픔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슬픔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김진숙은 누구보다 슬픔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 책에는 남달리 굴곡이 많았던 그의 가족사와 개인적 삶이 나온다. 아울러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얼마나 그의 가슴이 따뜻한 넓은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눈과 귀를 가진 운동가도 드물지만, 남녀노소, 지역과 업종,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과 장애인 소수자까지 두루두루 포용하는 가슴이 넓은 운동가, 진심으로 따뜻한 가슴으로 동지를 안아주는 운동가는 더 드물다. 그 흔치않은 운동가 중 한사람이 바로 김진숙이다.

그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중년 남성노동자들을 어린애처럼 꺼이꺼이 울게도 만들고, 젊은 조합원들이 배꼽을 잡고 웃게도 하고, 여리고 예쁘기만 한 아가씨들을 거친 싸움꾼으로 변모시키기도 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타고난 심령술사다. 그 심령술로 사람들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글을 쓰니 어찌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의 추모사는 열사의 영혼이 그의 입을 대신 빌려 한을 토해내는 것처럼 들린다. 천도제를 관장하는 스님이나, 살풀이굿 씻김굿을 인도하는 무당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이런 때다. 죽은 영혼들의 한을 굽이굽이 풀어주고 못다 이룬 갈망을 달래주는 솜씨가 딱 그 짝이다. 죽은 자의 혼령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한과 욕망까지도 다 풀어주고 달래준다. 한이 무엇이고 욕망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 한을 풀어주고 욕망을 달래주는가. 이런 것들을 속속들이 잘 알지 않으면 제관이 될 수 없다. 그의 추모사가 한 편의 감동적인 시요, 산문으로 변하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촌천살인의 한 문장에 담긴 책 한권 삶의 무게

나는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다. 아껴두었다가 필요할 때 인용도 하고 다른 곳에 퍼 나르기도 한다. 그런데 <소금꽃 나무>를 읽으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번 밑줄을 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밑줄 칠 문장이 하도 많다보니 책 한권 전체가 밑줄 천지가 될 것 같았다. 그의 문장은 펄떡펄떡 살아 날뛰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수두룩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점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책 한편을 압축한 것 같은 경구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긴 시간도, 아무리 넓은 공간도, 아무리 많은 사람도, 아무리 처절한 삶도, 한마디 문장으로 표현하는 비범한 재주가 있다. 아마도 돈벌이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가 쓴 한 문장 한 대목만 뽑아 늘려서 책 한권을 너끈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았다.

문장 하나로 삶의 한 세대를 드러내는 걸 보면 놀랍기만 하다. 가출해서 여기저기 공장을 떠돌던 김진숙의 십대 정서가 한 문장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줄만 써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 (<그 시절의 이력서> 중에서 40쪽)

그런가하면 얼마나 짓밟혔으면, 얼마나 무서웠으면....하는, 한 문장이 백 마디 설명보다 더 또렷하게 각인되는 문장도 있다.

“자면서도 ‘잘못했으예.’ 잠꼬대를 하며 흐느끼던 영숙이, 미순이, 상남이들.” (<그 시절의 이력서> 중에서 43쪽)

오늘의 그가 태어난 삶의 전환점으로 추측되는 대목도 나온다. 공부에 목말라 찾아간 근로야학에서 처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던 그 대목이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시절의 복직>중에서 47쪽)

그런가하면 <20년만의 복직>에서는 20년 해고자 생활을 동거동락하던 두 형들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복직이 된다. 그제서야 김진숙은 20여년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부채감에 대해 털어놓는다.

“단지 나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말하면 그 형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내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9할은 사실 ‘부채감’이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그러면 어디 가서 뭔 일을 하고 살더라도 필시 응징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이제 와 말이지만 떠나고 싶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제는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시시때때였는지. 그래서 내가 막 못되게 굴어도, 고랑을 파고도 남았을 상처들을 주었음에도 날 한 번 세우지 않던 그들의 둔함이, 쇠심줄 같던 늑수긋함이 권태기처럼 지긋지긋했던 날들이 또 얼마나 많았는지, 제발 내일 아침에는 저들 중 누구 하나라도 안 나타나기를,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 취중이라도 선언해주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차마 먼저 가겠단 말은 못하고 그걸 빌미로라도 그만 떠나고 싶을 만큼 고단했던 날들.” (<20년만의 복직>중에서 16쪽)

마침내 20년만에 복직되어 출근하던 날, 세 사람은 회사 정문 앞에 나란히 선다. 그러다 두 사람은 들어가고 한 사람은 밖에 남겨진다. 김진숙은 자신이 비로소 그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부채감을 내려놓았다고 안도하면서도 그 부채감이 복직한 형들에게 고스란히 되지우게 될까 걱정한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그들에 대한 부채감도 20년 아니 40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덧붙이는 대목에서는 피붙이보다 더한 동지애에 울컥 감동이 치받친다.

해고자 생활 20여년을 버텨낸 힘을 ‘부채감’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것 같은 해고자 생활 20여년을 몇 문장으로 다 표현하는 이 사람,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삶의 전면적 진실

고달픈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할 때도 김진숙은 길게, 어렵게, 진지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짧고 쉽고 가볍게 얘기한다. 가볍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무리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해학과 낙관으로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학과 낙관은 김진숙 글의 트레이드 마크다. 흔히 이런 걸 노동자만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삶의 전면적 진실이라고 말이다.

<동네사람들아!>(24쪽~32쪽)를 예로 들어보자. 이 글은 1986년 처음 대공분실에 끌려가 살인적인 고문에 시달리던 때의 얘기다. 그 시절의 살벌한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주머니에서 나온 사탕 한 알에 대해 이렇게 허허실실 풀어놓는다.

“어버이날 회사 여직원회에서 나눠준 사탕 한 알을 아끼노라 안 먹고 넣고 다녔던 건데 아끼면 똥 된다더니 그 사탕도 나도 그렇게 됐다.” (같은 글 24쪽)

여기에 “독극물 묻었는지 조사해 봐.” 라는 한마디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엽기적으로 치닫는다. 그런데도 김진숙은 제3자 얘기를 하듯이 이죽거리며 태연하게 이어간다.

“사탕 한 알의 운명은 졸지에 반공전시관이나 전쟁박물관 같은데 보면 반드시 전시돼있는 남파 간첩들의 필수품인 독극물 앰프의 품위로 격상돼 버렸고, 그걸 소지한 나는 남파 간첩의 예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처우를 유감없이 당하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취방을 발칵 뒤집으며 수색한 끝에 그들이 찾아낸 건 ‘갈까 말까’ 네 글자만 적혀 있는 달랑 쪽지 한 장이었다. 몸이 아파서 일요일에 특근을 하러 갈까 말까망설이며 긁적이던 네 글자는 남파간첩이 북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는 낙서로 둔갑한다. 기가 막히고 허탈하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하는 소리와 함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렇듯 그의 글은 살벌하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소름이 돋는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특히 가족사나 개인의 삶을 이야기를 할 때 더 심하다.

<부고없는 죽음>(243쪽~246쪽)은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남동생이 노숙자 신세로 처연하게 객사한 이야기다. 마침 설날이라서 온 가족이 다 모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설날이라서 문상객이 하나도 없었던 건 불운이었다. 같은 설날이 이렇듯 행운과 불운을 함께 품는다.

빈소에는 큰 언니의 곡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큰언니의 가게 차부상회(<차부상회 문근부>(197쪽~199쪽) 참조)는 한 번도 문을 닫은 적 없어서, 그날도 아들이 가게를 맡아 보고 있다.

“잊고 있었다는 듯 큰언니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가게를 보던 조카가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묻는 전화가 오면 “큰 거? 짝은 거?” 묻고는 “짝은 건 820원”대답하고는 다시 우는 사이....셋째 언니네 식구들이 도착했다.” (<부고없는 죽음>244쪽)

콩트 한 장면이 연상된다. 웃으면 실례인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팍’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동생의 돌연사라는 기박한 운명과 구멍가게라는 엄연한 현실이 한 문장 속에서 나란히 목을 내밀고 있다. 슬픔과 웃음이 함께 어우러져있다. 이것이 김진숙이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삶의 전면적 진실이다. 그의 글에서는 웃기기만 하는 삶이나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삶은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지하고 심각했다가도 웃음이 나는가하면, 웃다가도 진지하고 심각해지는 것이야말로 삶의 전면적 진실이다. 이런 점에서 <소금꽃 나무>는 삶의 전면적 진실을 말하는 책이다.

처음 <조공노동자신문>을 읽었을 때 나는 김진숙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세상이 그의 진가를 몰라주는 게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이제 늦은 감은 있지만 내 예감이 적중하여 이렇게 <소금꽃 나무>가 출간된 걸 볼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책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아파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책은 쉽게 빨리 읽었지만 여운은 쉽게 빨리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주 오래오래 나를 불편하게하고 아프게 할 것만 같다.
덧붙이는 말

김하경 님은 소설가로, 이 글은 '황해문화' 가을호에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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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도, 서평도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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