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FTA를 계기로 본 한국사회 성격

[특별기획 : FTA체제가 열린다](5) - 한미FTA와 미국 제국주의 & 한국의 재벌과 국가

한국 정부가 지난 9월 7일 한미FTA협상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한미FTA는 이제 국회비준 절차만을 남겨놓고 있고, 한국 정부는 더 나아가서 한.EU, 한.캐나다 FTA를 조속히 채결하기 위한 협상에 사활을 걸고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한미FTA는 한국의 정부와 보수언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거나 ‘제3의 건국’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1997년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을 잇는 대대적인 ‘제2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것이고, 지금도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는 사회전체의 안전을 위협할 수준으로 극에 달할 것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한미FTA를 추진해 왔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10년간 한국 자본주의와 사회의 성격은 급격하게 변화해 왔고, 비정규직 확산,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청년실업 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제 앞으로 10년간 한국 자본주의와 사회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문제는 한미FTA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에 달려 있는데, 한미FTA의 성격은 다시 1990년대 후반부터 추구되어 온 한국의 정부와 재벌의 FTA 전략과 이런 전략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한미FTA 이후 한국사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외정책, 한국 정부와 재벌의 FTA 전략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미국 부시정부의 제국주의적 통상정책과 한미FTA

1990년대 이후 미국 정부의 대외통상 전략은 점차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지고 있는 자국의 제조업, 여전히 정부 보조금에 기초하여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농업, 지적재산권을 기반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의약품과 소위 문화 산업, 그리고 과대하게 비대화되고 있는 서비스 산업 등의 산업적인 경쟁력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미국 행정부의 통상정책은 크게는 농업과 서비스산업 개방, 투자자 보호, 지적재산권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미국 행정부는 전통적으로 WTO라는 다자간 무역협정을 목표로 하면서 적절히 양자간 FTA를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해 왔는데, 미국 행정부의 통상정책은 미 의회에서 부여하는 신속처리권한 또는 무역촉진권한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이 권한 없이는 행정부가 다자간 협정뿐만 아니라 양자간 FTA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도 나타났는데, 당시 미 정부는 1997년 10월 1일 미 의회의 환심을 사서 신속처리권한을 얻기 위해 한국 자동차에 대해 ‘슈퍼 301조’를 발동한다.

1997년의 클린턴 행정부가 신속처리권한을 얻는 데 실패한 이후, 2001년 집권한 부시정권은 이 권한을 무역촉진권한으로 이름을 바꾸어 더욱 노골적으로 확보하려 시도한다. 그 배경으로는 IT 산업의 투자 붐이 2000년 하반기부터 붕괴되기 시작되면서 소위 ‘신경제’의 신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과, 1999년 시에틀 각료회의 무산 이후에 WTO 다자간 협상이 파경직전에 직면해 있었다는 점, 그리고 9.11 사건 이전부터 부시정권의 외교정책이 클린턴 정권보다도 훨씬 ‘일방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방향으로 급격히 선회한 점을 들 수 있다.

부시정권은 출범 직후 미국 자동차 업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토의정서(온실가스를 감축하는 국제협약)에서 탈퇴하고, 2001년 일명 ‘버드 수정법’(수입품에 부과한 반덤핑.상계관세 수입금을 자국의 피해업체들에게 재분배함)을 통과시키며, 2002년 3월 유럽과 일본산 철강에 대해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하고, WTO 다자간 협정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농업보조금을 확대시키는 ‘신농업법’을 통과시키는 등 WTO 협약을 위배되는 조치들을 취한다. 그리고 9.11 사태 이후 팽배한 ‘애국주의’를 이용하여, 2002년 7월 미 하원의 찬성 215대 반대 212의 근소한 표차로 간신히 ‘무역촉진권한’ 법안은 통과시킨다.

제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의회의 환심을 사는 것으로써 무역촉진권한을 획득한 부시정권은 세 가지 차원의 전략을 구사하는데, 첫째 칠레, 싱가포르 등과 같이 미국과의 FTA에 적극적인 국가들과 중미, 모로코와, 호주, 남아공 등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는 국가들과의 FTA를 체결하고, 둘째 미주 전체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영원히 묶어 두려는 전미주 FTA(FTAA)에 전념하면서, 셋째 2001년 11월 WTO 각료회의에서 채택되었지만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도하개발의제(DDA)를 실현시키려 한다. 하지만 부시정권의 전략은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다.

9.11이라는 험악한 분위기에서 합의된 도하개발의제는 단지 차후에 논의할 의제를 정한 것에 불과했는데, 본격적인 협상이었던 2003년 9월 칸쿤 WTO 각료회의에서는 이미 미국이 대폭 증액시켰던 농산물 보조금을 둘러싸고 한편으로 미국 등의 선진국과 다른 한편으로 농산물 수출국과 빈곤한 개도국 간에 격돌이 일어났고, 결국 ‘싱가포르 이슈’(투자, 경쟁정책, 정부조달 투명성과 무역원활화)를 핑계로 개도국들과 최빈개도국이 협상을 거부하면서 회담이 결렬된다. 2005년 12월 홍콩 각료회의까지도 미국과 EU는 농산물 보조금을 축소시키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고, 홍콩 각료회의도 미국과 EU가 서로를 비방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된다.

2003년 칸쿤 각료회의가 결렬된 이후 부시정권은 개도국의 저항에 부딪치면서 WTO를 통한 다자간협정에 한계를 느꼈고, 지역 또는 양자 간 FTA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미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FTAA는 미국의 반덤핑법 수정과 농업보조금 철폐를 요구하는 브라질 등의 요구에 봉착해서 2003년 말에 이르면 거의 무산되게 된다. 이렇게 사면초가에 처한 부시정권이 선택한 돌파구가 바로 한미FTA이다.

미행정부는 2004년 중반까지는 다자간협정과 FTAA에 집중하면서 한미FTA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5월 웬디 커틀러 당시 한국담당 대표보가 미국과의 FTA에 대한 한국의 의향을 타진하고, 당시 미무역대표부 대표 로버트 죌릭은 6월 24일 한국의 농업보조금 축소와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전제로 한국과의 협상 용의를 밝힌다. 또한 4년 9월 부임한 크리스토퍼 힐 당시 주한미 대사는 한국의 ‘시장지향적인 농업정책’을 전제로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이 일본에 우선하는 첫 대상이 될 것”이라면서, ‘한국인의 비자면제 조기성사’라는 미끼를 던진다.

이에 부응하여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2004년 10월 25일 미국으로 날아가 죌릭과 회담을 갖고, 다음날 반기문 당시 외통부 장관은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과 비자면제 협정 체결안에 대해 논의한다. 같은 날 김현종은 무역협회와 미국기업연구소 주최의 세미나에서 농업부문이 “한국 정부의 무역자유화 정책에 있어서 예외가 될 수 없고”, “한국은 시장경제 논리에 부합하는 농업정책을 적극 추진 중”이라며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한다. 이후 미무역대표부는 농업만이 아니라, 1990년대부터 자신들이 줄기차게 한국정부에게 요구했던 쟁점들, 즉 이후에 ‘4대 선결요건’으로 알려진 스크린 쿼터제, 쇠고기 수입재개, 자동차와 의약품 통상문제 등에서의 양보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여 관철시켰고, 한국 정부는 그 대가로 2006년 2월부터 미국과 한미FTA를 협상할 수 있는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결국, 한편으로 국내적으로 무역촉진권한을 얻기 위해 반덤핑 조치와 농업보조금 확대 같은 보호주의 정책을 쓸 수밖에 없고,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보호주의 정책 때문에 개발도상국들의 반발로 다자간 또는 지역적 자유무역 협상이 파산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던 부시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한미FTA는 한편으로는 경제적 실익을 챙기면서도, 다른 한편 다른 다자간 또는 지역적 협정을 촉진시키기 위한 지렛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한미FTA가 미국 측의 대외 통상전략 변화와 요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측의 일방적인 요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정부와 대자본은 ‘4대 선결과제’를 양보할 만큼 미국의 한미FTA 개시 요구에 대해 ‘너무나’ 적극적으로 임했고, 협상 과정과 결과에서도 거의 모든 것을 양보했다고 평가될 정도로 협상에 ‘너무나’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국가와 자유무역협정

한국 정부는 1997년 10월 ‘다자간투자협정’(MIT) 최종 유보안을 제출할 당시까지만 해도 개방하지 않는 유보목록을 최다한 많이 제출하지만, 1997년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단행 이후인 1999년 시애틀 각료회의에서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입장으로 입장전환을 하여, ‘가능한 포괄적인’ 다자간무역협정을 요구하는데, 일부 서비스 산업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2001년 도하 WTO 각료회의를 앞두고, 공산품 부문의 무역장벽 완화를 통해 수출확대에 주력한다는 방침이었고, 농산물과 서비스 분야 중 경쟁력이 취약한 영화, 방송 등의 시청각 분야는 가능한 개방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겠다는 전략을 밝혔지만, 서비스 분야 중 이미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한 유통, 해운, 건설 분야는 한국 업체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할 수 있도록 협상하고, 법률, 의료, 교육 분야는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방한다는 방침을 정한다. 그리고 정부는 협상과정에서도 국내 제약회사의 경쟁력이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의약품의 지적재산권 문제와 관련해서도 개도국의 요구에 반대하면서 미국과 스위스의 제약업체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한국 정부는 이미 2001년에 한미FTA에 포함되게 될 주요한 의제들에 대해 ‘적극적’인 개방의사를 표명했는데, 그래서 2001년 도하개발의제 타결 이후 한국 정부와 언론들은 서비스 산업의 대대적인 개방을 기정사실화한다. 스크린 쿼터 폐지는 확실하고 국내법 자문 등에 대한 개방, 외국대학 국내분교의 비영리법인 인정, 공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의 50% 이상으로의 인상 등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반면 금융부문의 영향은 별로 없다고 단정하면서 중국과 동남아 건설시장의 개방, 해운업계와 유통업계의 대외진출, 그리고 특히 미국의 반덤핑 완화 등에 기대를 건다.

나아가 한국 정부는 2001년 도하개발의제 협상 때 약속했던 서비스부문 1차 양허안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제출하지 않았음에도 2002년 6월 30일 기한에 맞추어 제출하는데, 중국.동남아 등의 국가에 시청각서비스, 오락.문화.스포츠 서비스 등과 광고, 출판, 영화 및 비디오 제작.보급, 음반서비스, 공연서비스 등에 대한 양허를 요청하였고, 2002년 11월까지 23개국이 한국의 스크린쿼터, 법률, 통신(지분제한 철폐), 금융, 교육과 의료 등의 개방을 요구한다. 또한 한국 정부는 2003년 칸쿤 WTO 각료회의에서도 경쟁정책이나 대외투자 개방 등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다고 판단하여,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입장을 취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서 2001년 도하개발의제 협상 이후 한국 정부는 농업과 경쟁력이 없는 서비스 산업(금융, 영화, 방송, 법률, 의료, 교육, 공기업)을 개방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유통, 해운, 건설 분야 등 경쟁력 있는 서비스 산업의 해외 진출, 특히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로의 진출을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한국정부의 입장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승하여, 국내적으로 경쟁력이 없는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국제적으로 한국보다 경쟁력이 더욱 취약한 국가들에 한국의 대자본이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려는 ‘아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 결과는 주로 재벌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쟁력 있는 제조업과 일부의 서비스 산업은 수출과 해외진출로 막대한 이윤을 얻을 것이지만, 농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서비스업 부분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고 현재보다 더욱 극단적인 양극화가 나타났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WTO 다자간협상과 한미FTA에서 논의된 의제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고 다자간협상에서 보여준 한국 정부의 입장은 한미FTA에서도 기본적으로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노무현 정권에 와서 한국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이 변화된 것이 아니며 1999년 이후 현재까지 일정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FTA는 다자간협상에서 이루지 못한 한국 재벌의 꿈을, 또는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다자간협상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재벌의 ‘꿈’을 실현시키는 계기일 뿐이다.

한국의 FTA와 재벌

한국의 국가와 재벌의 관계는 노태우 정권기인 1980년대 후반에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 한국의 국가는 소위 ‘개발독재’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이행이 완결된 것은 물론 김영삼 정권의 출범이었는데, 김영삼 정권은 1990년대 초반 세계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으로 이윤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던 한국의 재벌들을 위해 소위 ‘세계화 전략’을 펼친다.

김영삼 정권은 한편으로 진입장벽을 철폐하여 재벌들이 진입할 수 있는 사업영역을 확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금융시장 개방과 자유화를 통해 문어발식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해외 사업진출을 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는 한편으로 1997년의 과잉투자에 따른 재벌기업들의 도산과 외환위기인데, 그런 점에서 1997년 경제위기는 한국의 재벌들의 요구(와 미국의 압력)를 대변하여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결과이었다.

한마디로 ‘구조조정’으로 대변되는 김대중.노무현 ‘쌍둥이’ 정권의 정책은 단지 김영삼 정권 때 미처 실현하지 못한 재벌들의 꿈을 확대.실현시켜 온 것일 뿐이다. 단지 차이점을 김영삼 정권은 재벌기업들이 자신들의 주력업종 이외의 다른 제조업 영역과 종금사와 투신사 등의 일부 금융영역으로 확장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정도였다면, 최근의 두 정권은 다자간무역협정 또는 산업분류 상 서비스 부문으로 분류되는 공기업(전기, 가스, 수도, 철도, 지하철 등), 공공서비스(교육과 의료 등)와 금융, 방송 부문, 그리고 해외사업 부문으로까지 재벌들의 사업영역을 대폭 확장시키려 한다는 점뿐이다.

물론 김영삼 정권과 이후의 두 정권 사이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에 일정한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의 경우 미국의 금융시장 개방 압력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세력’보다는 국내적인 재벌들의 요구에 주로 의존하여 정책을 추진했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나 다자간무역협정 또는 FTA와 같은 ‘외부적’ 충격에 의한 ‘내부적’ 구조조정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입장이 FTA에서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한일FTA와 한미FTA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재벌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한국 정부가 추진하였는데, 한 쪽은 재벌들의 이익을 ‘반영’하여 결국 무산된 데 반해서 다른 한쪽은 또한 재벌들의 이익을 반영하여 재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막무가내로 타결되었다.

한일FTA는 1998년 9월 16일 오쿠라 당시 주한 일본대사가 제안하고 10월 방일한 김대중 대통령이 공동연구 추진으로 화답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전경련은 2001년 11월 26일 한일 재계회의에서 일본 측 파트너인 일본 경단협과 함께 “중국의 WTO 가입과 ASEAN과의 자유무역협정 추진, 동아시아 자유무역권 등 급격한 국제경제의 변화에 대응하여”, “한일FTA 체결을 서두를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이후 전경련과 무역협회는 2003년 5월에 가서는 일본의 ‘비관세 장벽 완화’, ‘농축수산물 시장개방 확대’, ‘대한 투자 및 산업기술 협력 활성화’ 등을 한일FTA의 ‘선결과제’로 제시하고, 2004년 3월 24일 현명과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삼성전자도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한다”라면서 “그 동안 경제단체(전경련)가 각론에 대한 주도면밀한 검토 없이 한일FTA에 대해 찬성입장을 표명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선언한다. 이에 대해 당시 교섭본부장이었던 김현종은 “(정부는) 업계가 하자는 대로 (한일FTA 협상을) 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서울경제》, 2004년 4월 24일, ‘기자의 눈’, “한미FTA '네탓 공 안된다”)

이후 한일FTA가 무산된 원인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일본의 농축수산물 시장개방이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제의 원인은 자동차와 부품산업의 타격에 대해 자동차업계가 반발했기 때문으로 평가되는데 이후 언론들에서는 부품산업을 살리라고 아우성을 쳐 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전경련은 2004년의 ‘우리 나라 FTA 로드맵과 보완과제’에서 한일FTA로 GDP 3.91%, 대일무역수지 83억 달러 증가라는 기존의 ‘장미빛’ 효과분석을 철회하고, ‘기술적 격차’를 고려하면 산업생산효과가 -25.41%라는 분석결과를 내놓는다. 여기서 기술수준은 ‘최고기술 보유국 기술지수를 100’이라고 할 때 15개 부문별 산업기술지수의 평균치인데, 한국은 71.1인데 일본은 90.8이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재벌들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한일FTA를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농수산물을 구실로 한일FTA를 무산시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산업구조가 유사하여 두 나라간의 산업이 ‘경합적’이고, 특히 자동차와 부품산업에서 경쟁력이 일본에 비해 낮기 때문에 한일FTA를 통해 타격을 받게 될 거대 재벌들이 한일FTA에 반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미FTA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는데, 한국과 미국의 산업구조는 상이하여 서로 ‘보완적’이기 때문에 한미FTA로 타격을 받게 되어 반발하는 재벌은 없었고, 한국 정부는 오히려 재벌들의 이익을 보장하면서 재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미FTA를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경련의 2004 연구에서 사용한 미국의 기술수준은 일본(90.8)보다 높은 94.9%(EU는 90.1)이었다는 점은 흥미로운데, 한미FTA의 경우 크게 재벌들의 타격을 받는 산업은 없을지언정 ‘기술격차’를 고려하여 산업 전체에 미치는 효과를 보면 한일FTA보다 더욱 큰 피해를 한국 경제에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경련의 위 보고서는 ‘기술격차’를 고려하면, 일본(-23.37%)보다 더 높은 -27.37%의 산업생산 감소를 예상하고 있다. 이는 전경련이 한일FTA보다 한미FTA가 경제전체의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더욱 파괴적임을 스스로 자인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FTA의 경우는 한일FTA와는 달리 자신들이 입을 피해는 거의 없고 이익만이 보장되기 때문에, 한일FTA는 반대했지만 한미FTA는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미FTA : 국가와 재벌의 연합

한미FTA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세력은 한국의 정부와 자본이었는데, 특히 정부 측의 대외경제정책연구소와 함께 전경련과 무역협회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소는 이미 1998년과 1999년부터 한미FTA에 대한 연구결과를 산발적으로나마 내놓기 시작했고, 전경련은 2004년 3월 외교통상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DDA, FTA 협상 등 주요 통상협상 시 경제계 의견을 적극 수렴하고, FTA 민간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며, 전경련의 경제 실무 전문가를 외교통상부에 파견’하기로 한다. 한미FTA 민간대책위원회는 한미FTA협상과정에서 정부와 자본들 간의 중요한 의사소통 통로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전경련과 무역협회와 함께 한미FTA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는데, 미국이 한미FTA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2004년 중반 이전인 2002년에 이미 전경련과 무역협회와 함께 한미FTA 공동세미나를 진행시킨다. 이 세미나에서 당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연구원이었던 정인교는 한미FTA 채결을 촉구하면서, “미국과의 FTA 체결에 있어 농업부문을 제외하라는 주장은 실효성이 떨어지며”, “미국은 한국의 제1위의 교역대상국이라는 점에서 한미FTA는 우선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미FTA의 필요성으로 1)“통상마찰을 해소”하고, 2)“무역 및 투자자유화에 따른 경제적 이득”, 3)“국내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촉진”, 4)“정치.외교적 차원에서 한미 공조체제를 공고화”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서비스 경쟁력 강화 논리를 제외하면, 최근에 한미FTA를 추진하는 이유들 대부분이 이미 2002년에 제시되었다. 이후 대외경제연구원은 소위 ‘CGE’(Computable General Equilibrium) 모형을 이용해 한일FTA에서 보여주었던 ‘장미빛’ 청사진보다 더욱 화려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조작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또한 한미FTA추진과 관련하여 삼성경제연구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성경제연구소는 2004년의 ‘세계 FTA 경쟁과 한국의 선택’에서 “중국의 고도성장과 생산력 증강은 우리의 가공수출무역형 산업구조에 중대한 도전이 될 전망”이라면서 ‘중국 위협론’을 제시한 후, “FTA는 ‘강제적 개방’을 통해 구조조정과 경제개혁을 가속시켜 경쟁력을 제고”하고, “IT의 강점을 바탕으로 관련 문화산업과 서비스산업을 육성”할 것을 주장하면서, FTA를 통한 강제적 구조조정을 통한 ‘서비스산업 육성론’을 제시한다.

나아가 삼성경제연구소는 2004년의 또 다른 글인 ‘미국의 FTA 전략과 시사점’에서 “미국의 FTA 대상 국가에서 배제되는 경우 차별적인 대우에 따라 통상 측면에서의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한미FTA를 주도하는 전략적 대응을 강구”해야 하며, “중국, 일본보다 앞서 미국과 FTA를 형성함으로써 선점자의 우위를 확보하며 동아시아 지역의 허브로서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미 2004년부터 한미FTA 체결을 정부에 독촉하기 시작한다.

또한 삼성경제연구소는 2006년의 ‘한미FTA의 정치경제학’에서 한미FTA로 인해 섬유/의류 부문만 수출증대 효과가 매우 크고, 자동차 부문은 수출과 수입 증대 효과 모두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수입증대 효과가 ‘매우 큰’ 부문은 농산물, 의약품, 금융, 교육이고, 법무와 의료는 수입증대 효과가 ‘영향이 있음’ 정도인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한미FTA가 “서비스 산업의 혁신을 촉진”하고 “서비스분야에서도 구조조정을 통한 생산선 향상 효과가 기대”되고, “문화, 지식기반 서비스업 등에 대한 투자도 증가하여, 내수시장 기반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소위 서비스산업 ‘구조조정’을 통한 양극화 해소라는 형용모순적인 정책을 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한미FTA는 제대로 연구하고 준비했는가는 정부와 한미FTA 반대세력 간에 논쟁이 되었던 점이지만, 한국 정부와 자본은 자신들이 WTO 다자간협상에서 요구했던 것을 한미FTA만큼 더 잘 실현시켜줄 것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한미FTA를 요구하고 추진해 온 것만은 사실이다. 단지 한미FTA가 2004년 중반까지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던 것은 미국의 부시정권이 그 때까지는 WTO 다자간협정과 FTAA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태도변화가 나타나자마자 한국의 정부와 자본은 즉각적으로 찬성하여 나서게 되고, 2006년 초까지 미국 측이 요구한 ‘선결조건’이 해결되자마자 한국의 정부와 자본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한미FTA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아가 한국의 재벌들은 미국의 대자본들과도 밀접하게 연합해서 한미FTA를 추진했는데, 그 핵심에는 한미 재계회의가 있었다. 한미 재계회의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18차 총회(2005년 6월 21일)에 포트만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웬디 커틀러 당시 부대표보, 홍석현 주미 한국대사가 참석했을 정도로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미 2000년 7월 열린 13차 총회에서 한미 재계회의는 이미 “향후 한미간의 양자간 투자협정 및 자유무역협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에 인식을 같이”하면서, 이후에 양국 정부에 한미FTA 채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미FTA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던 2006년 6월 20-7월 1일 신라호텔에서는 한미재계회의이다. 이 회의의 한국 측 보고서는 한미FTA가 제조업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자동차와 섬유 정도에 불과함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의료부문과 관련하여 “국내 의료업계에 대해 먼저 영리법인 병원 설립을 허용함으로써 국내 의료업계가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향상시켜” “단계적 개방을 유도해야” 하고, 고등 교육 이상의 교육개방도 “국내 사학법인에 대하여 먼저 영리 교육법인 설립을 허용함”하는 “단계적 개방을 유도할 필요”가 있고, “현재 외국사학법인이 제주도나 인천송도에 자유롭게 설립이 가능하고 학생정원과 개방형이사에 대한 별도의 규제가 없는 바” “국내 사학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국 사학의 국내진입에 따른 학교설립, 학교 인수합병, 전략적 제휴 등 진입형태에 대한 사전검토를 통하여 국내사학과 협력방안을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한국과 미국의 자본들은 한미FTA 이후에도 의료, 교육 등에 대해서도 영리법인화와 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법률 서비스는 “최소 7년간은 외국계에 대한 합작.고용 허가조치를 유보해야” 하고, “미국의 회계법인의 국내사무소 설립 및 출자와 국내회계사 고용에 대한 전면허용은 시기상조”이고, 세무서비스도 “시기상조”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서비스는 모두 개방하라고 하면서도 재벌의 일파가 참여하고 있는 법률.회계.세무 서비스에 대해서는 개방을 반대하는 재벌들의 입장을 읽을 수 있고, 한국과 미국 자본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한미FTA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넘어서 대안세계화로

결국 한미FTA는 한국과 미국의 대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의 정부와 대자본이 연합하여 추진해 왔으며, 미국 정부는 미국 자본들의 이윤을 보장하는 동시에 다자간협정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려 하고 있고, 한국 정부는 농업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을 희생하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서비스산업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서비스 부문에 대한 재벌들의 사업영역을 확장시키고, 장기적으로는 동남아와 중국을 포함한 세계적 차원에서의 모든 영역에 걸친 개방을 강제함으로써 재벌의 전면적인 해외시장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세계화된 경제 환경에 맞게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자부할지도 모른다. 중국이 쫓아오기 전에 제조업의 성장을 위한 시장을 마련해 주고, 서비스업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어야 하는 ‘시대적 과업’을 스스로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분명히 한미FTA가 ‘시대적 정신’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래서 한미FTA가 타결되던 날 저녘 기자회견에서 교육과 의료 등의 서비스 부문이 더 개방되지 않아서 아쉽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젠가 서비스업을 도하개발의제 협상 때 전부 개방하지 그랬냐고 정태인 전청와대 수석이 묻자,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지난 10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다자간무역협정’에서 나타났던 모순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줄줄이 좌파정권들이 들어서고 있는 남미에서도 볼 수 있다. 남미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으니, 25년 만에 그런 추세가 종말을 고했다.

한국은 1998년부터 본격적인 구조정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10년 정도가 지났다. 앞으로 우리의 10~15년 후의 미래의 모습은 노무현 정권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미FTA를 통한 신성장동력의 발견으로 양질의 고용이 창출되고 양극화가 극복될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정책당국자들이 그렇게 닮고자 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 그런 기대는 쉽게 떨쳐버려야 할 것 같다. 많은 미국 학자들이 1990년대 말부터 미국 사회를 ‘20대 80사회’라고 자조적으로 불렀고, 현재의 미국의 사회 문제는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나아가 만약 신성장동력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재벌들에게만 열매가 돌아가는 동력일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양질의 고용 없는 성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가 도래한 듯하다. 자본의 세계적인 지배를 단순히 거부하고 막아내는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번의 반세계화 운동의 승리는 자본과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또 다른 공격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제 반세계화 운동은 자본 자체를 넘어서는 ‘대안’세계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덧붙이는 말

김창근 님은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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