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이후 국가, 민주주의, 진보정치

[특별기획 : FTA체제가 열린다](7) - 한미FTA 이후 진보정치

신자유주의경쟁국가와 사회정치적 지지기반

한국사회는 이미 97년 IMF관리시기를 거치면서 DJ로 상징되는, 이른바 자유주의좌파가 신자유주의로 귀의하면서 정치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권력도 신자유주의경쟁국가로 전환되었다.

자립경제를 내세우며 국민(민족)자본을 보호하는 것을 중요한 역할로 삼았던 브레튼우즈시대의 발전국가(development state)와 달리 신자유주의경쟁국가(neoliberal competitive state)는 국내에 고정된(fixed) 자본들이 여타 다른 국가들에 고정된 자본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핵심적이라고 평가되는 경제적, 혹은 경제외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 즉 그들 자본에게 경쟁의 이점(advantage)을 보장하는 것에, 혹은 글로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그러한 이점을 제공하는 것에 존재 이유를 두고 있다.

이 국가에게 자본의 국적은 부차적이다. 특히 글로벌스탠더드(global standard)를 고려할 때, 오직 중요한 것은 경쟁력 있는 자본을 어떻게 더 많이 자국의 영토 안에 유치, 고정시키는가이다. 삼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한국이라는 국적을 지닌 자본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경영하는 글로벌 자본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애초 태어날 때부터 지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던 자본은 지금 신자유주의시대에 이르러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정권은 집권 이후 신자유주의경쟁국가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왔다. 그것은 집권 초기 ‘동북아 물류국가’, ‘금융 허브’,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담론으로 표현되다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시장권력론’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중 속에서 그것은 ‘삼성공화국’으로 상징화했다. 시장권력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이 발언이 자유주의 내지 다원주의 국가론의 핵심인 ‘사회갈등의 중립적 조정자로서의 국가’를 노골적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본주의국가의 현실태로서의 그 어떠한 정치권력도 자신들의 계급적 성격을 이처럼 공공연하게 표명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대한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교조적(dogmatic)인가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미FTA 추진과정은 이들의 교조적 성격을 여과 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이 신자유주의경쟁국가를 떠받치는 사회정치세력들은 누구인가. 이 질문과 관련, 두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 하나는 이른바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 사이의 관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민운동세력과 자유주의정치세력과의 관계, 결국 시민운동과 신자유주의와의 관계이다.

전자와 관련,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관철과 심화를 위한 양 정치세력 사이의 밀월관계를 논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노무현정권이 2005년 당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이미 그 비밀을 털어 놓은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노무현정권은 ‘수구 한나라당’과 자유주의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책적 차이가 크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비록 대연정은 집권가능성이 매우 높은 한나라당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실제 작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보수연합’이라는 이들의 밀원관계를 법, 제도적으로 마무리하고자 한 시도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이 제안이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한 '민주화운동의 적자’, ‘민주개혁세력'의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으며 보수정치세력으로 전화했음을 공식 확인해준 객관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 권위주의 시기 혹은 파시스트지배 시기에 ‘반독재운동’을 했던 이들과 지금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수구세력’은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 ‘독재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징이었는데, 이제 그런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의 연대’를 내세우며 3당합당, DJP연합 그리고 노무현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민주당과 정몽준의 국민통합21의 후보단일화에서 확인되듯 그동안 보수대연합의 정치를 전개해 왔다. 대연정 제안도 바로 이러한 맥락 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집권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김영삼정권 민주정부 1기론’을 부정하는 것은 ‘과거의 민주성’으로 현재의 보수성을 가리려는 얄팍한 시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정책적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남북관계, 평화문제 등에서 그렇다. 여전히 한나라당에 대해 ‘수구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가능한 것도 이런 사안들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화개혁세력 대(對) 전쟁수구세력’이라는 화해할 수 없는 긴장관계로 상징될 만큼 크지는 않다. 수구를 상징하는 한나라당도 그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반영하여 ‘신대북정책’을 채택한 바 있다. 즉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진전을 계기로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은 지금 자유주의정치세력의 그것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 유의할 것은 이들 사이의 차이가 ‘평화세력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라는 현상 속에 내장된 비밀, 즉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북한을 어떻게 포섭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지배블록’ 안에서의 자유주의정치세력은 능동적인 헤게모니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반면, 이른바 수구세력들은 이에 대해 소극적, 조합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개성공단에 대한 이들 세력 사이의 상이한 시각, 한미FTA 협상과정에서 논란이 된 개성공단 원산지규정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평화의 문제를 권력정치(power politics)를 근간으로 한 국가 사이의 게임을 넘어서는 확장된 시각에서 접근한다면, 즉 직접폭력의 극단인 전쟁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등 구조적 폭력이 제거된 상태를 ‘적극적 평화’로 규정하는 평화학자 갈퉁(J. Galtung)의 발상을 빌린다면, 신자유주의가 이 사회의 다양한 관계들을 분절, 파편화시키고 있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위협하는 작지 않은 근인이라는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평화문제에서도 최소주의자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민운동과 신자유주의와의 관계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신자유주의 하위파트너론’, ‘신자유주의 포섭론’의 형태로 제출된 바 있다. 주류의 다수 시민운동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데, 그 이유는 세계화를 글로벌 자본의 운동과 분리시켜 사고하거나 글로벌 자본을 세계화를 추동하는 여러 주체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글로벌자본이 추동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계급운동, 민중운동의 영역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하다. 비록 노무현정권이, 혹은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 평화개혁세력이기에 연대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찬성하면서 한미FTA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이른바 문민정부를 자임한 자유주의우파정권의 집권이후 한편으로 계급운동, 급진적인 민주주의운동, 민중운동 등을 비판하면서 직간접적인 다양한 형태로 권력과 결합해 왔다. 이른바 주류의 종합적 시민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은 물론이고, 노동운동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환경운동의 자본, 권력과의 유착관계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 시민운동, 지역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여성운동의 경우, 대부분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의 흐름을 타고 기존의 권력구조 속에 포섭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동안 진보적이라고 평가되어온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의 국가개입과 과거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의 ‘발전국가’와의 협력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국가 혹은 지방정부가 발주하는 프로젝트가 조직재생산의 중요한 물적 기반이 됨으로써 기존의 억압적, 비대칭적 사회관계를 재구성하는 비판운동으로서의 이들의 기능은 더욱 제한, 약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흐름과 관련하여 노무현정권 등장 이후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정권이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지역의 생존전략으로 제시, 추진하고 있는 ‘지역혁신체제’(regional innovation system: RIS)라는 프로젝트이다. 그 이유는 이 프로젝트가 중앙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미시적인 공간 속으로 지역의 시민운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신자유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기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혁신체제는 대학, 기업, 연구소,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등 혁신주체들 간의 상호협력과 공동학습을 통해 산업생산체계, 과학기술체계, 기업지원체계를 효율적으로 접합시키고 인력양성, 정보, 통신 등 혁신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제반 활동과 이에 필요한 지원체제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역혁신체계의 중추는 지역전략산업 클러스터(cluster)라 할 수 있는데, 그 핵심목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무한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첨단지식 및 기술자본의 경쟁력 증진을 통한 가치실현의 제고에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목적의 지역혁신체제에 시민사회단체,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전문가들이 하나의 주체로서 참여,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참여는 국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 등 행위주체들의 자율적, 수평적 복합조직이 중요한 사안들을 논의하고 결정한다는 거버넌스(governance)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거버넌스는 낯설지 않은 개념인데, 이미 이 개념은 세계화, 지방화의 흐름 속에서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구성된 ‘지방의제21’(Local Agenda 21)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자율적 주체로서 참여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이처럼 주류의 시민운동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신자유주의경쟁국가의 중요한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하위파트너론’, ‘신자유주의 포섭론’은 여전히 비판담론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시민운동은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신자유주의 보수정치의 재생산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한편 시민운동 안에서 기존의 주류운동을 비판하며 보다 급진적 부문들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이러한 양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계급을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위기

냉전체제 붕괴 이후 글로벌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심화는 민주주의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지금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수구정치세력은 한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과잉을 말하고 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를 화두로 말하지 않으며 표현상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선진화를 그 화두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희망과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완성과 과잉, 혹은 빈곤과 위기라는 상이한 인식과 평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차이는 민주주의를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완성’ 혹은 ‘과잉’을 말하는 발상은 주로 정치적인 법과 제도의 측면에 자신들의 시각을 고정시키고 있다. 이 발상은 일정 정도의 요건이 갖추어지면 민주주의에 도달, 혹은 완성된 것으로 파악한다. 최소민주주의자의 선구자인 슘페터(J. Schumpeter)가 정치적 영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의 장으로서의 선거와 그 선거에서 대중의 엘리트선택권이 보장된다면 민주주의는 실현된 것이라고 본 것, 다알(R. Dahl)이 선출된 공직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광범위한 선거권, 공직 출마권, 표현의 자유, 다른 정보원의 존재, 결사의 자유 등을 민주주의의 실현조건으로 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법, 제도의 복합체이다.

하지만 기존의 법, 제도가 민주주의의 준거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이러한 발상은 바로 자기 한계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그 법, 제도의 외부에 존재하는 자들의 상황, 그들의 목소리들(voices)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는 기존의 법, 제도가 옹호하고 보장하는 관계들 속의 수혜자들과는 무관하다. 민주주의는 법, 제도 이전에 이 사회의 상이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나아가 그 사회관계들을 매개로 인간과 자연이 맺고 있는 더 넓은 착취관계들의 해소, 극복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신자유주의경쟁국가는 바로 이 모든 영역의 사회관계들을 자본을 유일척도로 하여 위계적으로 재편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민주주의의 축소와 위기가 일반화되는 현실은 필연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세가 상이한 부문, 상이한 관계들 속에서 불균등하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 동안 집권 자유주의정치권력은 온건한 주류 시민운동에 대해서는 유화적, 융합적인 태도를 취해 왔지만, 그것의 급진적인 부분들, 전투적인 사회정치운동에 대해서는 그 억압성을 감추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목소리들, 운동들에 대해서는 사전 배제, 사후 억압 등 단호한 조치를 취하였다. 김대중정권 시기 대외신인도 하락을 내세우며 법원의 결정을 무시한 채 대우자동차노동조합에 가한 불법적인 폭력 행사, 그리고 한미FTA 체결을 위해 노무현정권이 보인 반인권의 억압적 대응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 특히 비정규직 운동은 글로벌 자본과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심화를 매개하는 신자유주의경쟁국가들의 핵심적인 공격대상이 되고 있다. 자유주의정치세력의 가장 억압적인 지배형태를 지칭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테제’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믿는 이들에게 노동에 대한 양보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넘어서는 전(全)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다. 모든 가치판단, 행위의 유일척도는 이윤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무한경쟁의 시장논리와 동일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지배하는 곳에는 계급, 계층 간의 최소한의 타협조차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가치들과 행위들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고 위계화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벗어나서는 그 무엇도 의미 있는 존재일 수 없다. 새로운 자본축적의 영역으로 떠오른 주거, 교육, 의료, 에너지, 수도 등 이른바 공공부문들의 사유화는 지금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아니 그들의 민주주의가 대중을 얼마나 조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증거들이다. 그리고 한미FTA는 이러한 흐름을 확대심화시키고자 하는 권력의지의 상징이다.

또한 이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일국을 넘어 지구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한편으로 억압, 착취, 빈곤을 구조화시키고 있지만, 다른 한편 국민국가 안에서 단지 형식적 구호에 그쳤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실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는 대표적이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국경 밖의 문제가 아니라 국경 안의 문제이다. 아니 국경을 넘나드는 문제이다. 애초 태생적으로 자본이 지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을 말하는 신자유주의경쟁국가와 자본이 이주노동자에 가하는 차별과 억압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을 노동자계급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때, 민족적, 인종적 차별을 받고 있는 이들은 “노동자계급 이하의 계급”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자들,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경쟁국가는 여전히 자본과 시장이 가야만 그곳에 자유가, 민주주의가 흘러넘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고통 받는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이다. 거기에 이데올로기로서의 다원주의는 있을지언정 그들이 그토록 역설하는 진정한 다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대중이 할 수 있는 행위는 선거를 통해 주어진 엘리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거나 그도 아니면 선거 자체에 관심을 끊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행태 모두는 그들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전자의 경우, 그 결과가 무엇으로 귀결되든 그것은 자신들의 민주적 정당성의 근거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 문제의 근원을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전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슘페터 류(類)의 최소주의적 엘리트민주주의는 이 시대에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한미FTA, 신자유주의 좌우파의 등장과 진보정치

한미FTA를 하나의 정책 수준에서 바라보며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은 노무현정권이 그것을 추진하게 된 것을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불가피한 구조 때문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구조적 힘이 노무현 정권의 민주성을 왜곡, 제한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건의 변화에 따라 노무현정권이, 이른바 평화개혁세력이 또 다른 정책적 선택을 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능성 자체를 미리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민주주의를 동결, 후퇴시킨 것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자로 전화하여 그것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의 그 어떤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가 왜곡, 제한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균질의 단일한 그 어떤 것으로 존재하다가 왜곡,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 긴장과 모순의 사회관계들을 반영하여 복수로 존재하며 대립과 갈등을 매개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내용과 형식의 민주주의인가를 둘러싸고 상이한 사회정치세력들 간에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최근 한미 FTA 체결과 그것의 비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국면에 내재된 핵심적인 정치적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왜곡, 억압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완성’을 역설하여 스스로 민주주의운동의 극복대상임을 자임하는, 따라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노무현정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민주성이 아니라 자기지배를 실현하고자 대중이 요구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이다. 즉 노무현정권의 민주주의에 관한 발상과 신자유주의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호응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유동하는 정치지형의 변화와 진보정치의 행보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금까지 자유주의정치세력과 수구정치세력으로 호명해 왔던 기존의 정치세력들은 ‘신자유주의 우파’로 재정립되고 있다. 자유주의좌파는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민중지향적 대중경제론을 포기하고 신자유주의로 귀의함으로써, 수구정치세력은 남북관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반영하여 맹목적 대북정책에 수정을 가함으로써 서로 수렴되고 있다. 남북한 간의 대화, 6자회담을 통한 핵문제의 전향적인 진전을 통해 한반도에서 평화체제가 조성되면 이들 사이에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정치적 갈등이 존재치 않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정치의 전면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이번 대선국면에서 ‘창조한국당’을 모태로 정치세력화를 꾀하고 있는 ‘문국현신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문제 해결과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살리기, 그리고 햇볕정책과 동북아균형자론을 계승한 환동해경제협력벨트를 주요 화두로 내세우고 있는 이들 세력은 70년대 남북한의 적대적 경쟁, 수출지향의 대외개방경제전략에 대응하여 동북아 평화, 중소기업 중시 등을 담은 대중경제론을 앞세우며 대항헤게모니프로젝트를 구축했던 ‘비판적 자유주의정치세력’, 이제 그 역사적 역할을 마감하고 사라진 ‘자유주의좌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내세우는 이들은 그 실현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여성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환경 및 생태 문제, 지역 풀뿌리민주주의의 실현을 자신의 정치목록에 적극적으로 등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지금 또 다른 ‘비판적 지지 흐름’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흐름에 주목하는 것은 문국현과 그를 추종하는 새로운 정치엘리트의 출현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 주체가 누가 되었든 그들이 내세우는 내용과 비전이 고통받는 대중의 이성과 욕망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민사회운동세력, 대중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정치세력에 대해 호감을 보이고 그에 대한 지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12월 대선과 내년 총선을 경과하며 정치적으로 일정한 지지기반을 구축하게 된다면 신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그 내용에 일정한 수정을 가하는 ‘비판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수구정치세력을 상징하는 한나라당이 집권하게 되는 경우, 현재의 자유주의정치세력은 내용적으로 분열하면서 그 가운데 개혁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들 새로운 흐름의 원심력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렇게 되면 브레튼우즈시대의 정치, 즉 수구정치세력, 그리고 진보운동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그것에 대항하였던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주도한 보수독점의 정치는 신자유주의 우파와 그 안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신자유주의 좌파가 주도하는 정치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 이러한 국면의 도래가능성은 현존하는 진보세력의 대중적 영향력, 정치력이 여전히 빈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맞서야 하는 진보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력의 회복이며 그것을 위한 연대이다. FTA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을 감안할 때, 최소 10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 연대의 정치는 이른바 ‘계급 좌파’와 ‘비계급 좌파’, 혹은 좌파운동과 급진민주주의운동의 신자유주의반대를 위한 ‘전략적 연대’가 그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 연대는 단지 조직의 통합을 모색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부차적이다.

다만 이러한 목적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좌파가 급진민주주의의 발상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상이한 사회관계 속에 존재하는 동일성의 정치를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가는 모순적인 것이라는 점에 민감히 반응하면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연대의 축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 발상 아래 고정된 것, 새로운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없으며 거기에서는 그 어떤 조직적 특권도 허용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급진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문제가 주로 계급운동, 민중운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실천적으로 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계급론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재생산되는 노자간의 비대칭적, 억압적 관계를 문제시하는 것 또한 급진민주주의자들의 자기과제와 무관치 않다는 것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모색은 시민사회운동의 우경화로 인해 급진민주주의와 좌파와의 공감대가 그 어느 때보다 제고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향후 ‘창조한국당’을 매개로 한 시민운동의 제도화와 이에 따른 급진적 부문의 이탈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빈 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

연대의 정치와 관련, 지금 던져야 할 물음은 ‘누가 운동, 혹은 정치의 중심 주체인가’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공유해야 할 질문은 과연 자본, 신자유주의를 우회하여 자신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진보세력이 존재하는가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비대칭적,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이 그것을 우회한 채, 해소 및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바로 이러한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제도와 비제도’,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를 대립시키는 모든 발상과 실천을 극복하고 그것을 넘나드는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연대를 조직하는 것이 시급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제도 안의 민주노동당이 ‘완고한 민족주의 분파들’과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향후 한미FTA 반대운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의 문제,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와 내년 총선에서 진보진영이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의 문제 등은 FTA를 매개로 강화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과연 의미 있는 정치 주체들의, 새로운 사회관계들의 구성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말

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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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 한미FTA , FTA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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