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꽃들아
나는 꽃이 아니다
걷어차라
나는 모난 돌이다
살아 내내 거리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깎이고 뒹굴다
한번은 솟구쳐
움켜쥔 주먹을 떠난 분노의 돌
미안하다
이 세상의 모든 빛깔 고운 꽃들아
나는 꽃이 아니다
짓밟아라
나는 핏자국이다
멍자국 가실 날 없던 날들
벌겋게 얼굴 타올라 치욕스럽던 날들
절망과 증오로
마침내 터져버린 붉은 피
미안하다
이 세상의 모든 향기로운 꽃들아
나는 꽃이 아니다
고개를 돌리고 침을 뱉어라
나는 찌든 내다
수채냄새 올라오던 가난한 부엌
지방으로 팔려갔다 며칠만에 돌아오면 눅눅하던 방
아내는 떠나가고 마흔 여덟
헛고름 흐르고 살갗만 벗겨지던 자위의 날들
온몸에 버무러지고 버무러져 지워지지 않는
계급의 찌든내
숨기지 않겠다
미안하다
이 세상의 모든 다소곳하고 단정한 꽃들아
나는 꽃이 아니다
맘껏 비웃어라
나는 미친 불꽃
끊어진 전선과 전선을 이어 세상을 밝히던
그 자애로운 손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전선을 만져야 하던 그 날의 심정보다
눈 오는 날 전봇대에 올라 목숨의 그네를 타던 그 날의 심정보다
허리 꺾여 쫓겨나던 그 날의 심정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마침내 너희의 독점과 탐욕을 불 지르는 꿈으로 타오르는
위험한 불꽃 숨가쁜 불꽃
미안하다
이 세상의 모든 가녀린 꽃들아
나는 꽃이 아니다
피해라
나는 깃발이다
너덜거리던 내복 작업복
식은 땀 혼곤히 젖던 이부자리 배갯잎
구멍 뚫린 목장갑, 모두 기워기워
마침내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
무한착취의 인간시장
그 암흑의 전봇대 높이높이 내건
노동해방의 불온한 깃발이다
가슴에 매다는 꽃이 아니라
찢기기 위해 내걸리는 깃발
그런 나의 영전에
동지들이여, 지도자들의 향기로운 꽃이 아닌
투쟁의 불무더기를 놓아다오
계급의, 연대의
들불을 놓아다오
해방의 등불을
저 전봇대보다는 더 높이 걸어다오
[덧말] 분노를 조직하라
얼마 전 목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고 한다. 아내는 지방에 내려가 있고,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그전처럼 때때로 목을 잡고 늘어지며 목마를 태워달라 한다. 철부지 같으니라고. 하지만 나도 그렇게 자라났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며.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며.
이리저리 그렇잖아도 쓸쓸하던 차였다. MRI촬영을 위해 입원했던 인천의 어느 병원, 500원을 넣고 하는 인터넷을 통해 고 정해진 동지의 분신 소식과 절명 소식을 들었다. 담배라도 한 대 피워야겠다는 생각에 9층 옥상에 오르니 그곳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콘크리트 위에라도 푸르른 나무들을 키워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짠했다. 돌아가신 고 정해진 동지도 그렇게 이 황막한 배신의 대지 위에서 그나마 자신을 거둬줄 조그마한 공간 하나를 얻기 위해 평생을 일하고 싸우며 씨름했을 터다. 결국 이 땅이 생명의 땅이 아닌 죽음의 땅임을 알았겠지.
그의 시신이 구천으로 가지 못하고 안치되어 있는 한강성심병원 천막 분양소를 몇 번 다녀오며 무슨 말이라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며칠 째 컴퓨터를 켜놓고도 한 자도 적질 못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아이 숙제 검사를 해주다가도 문득 문득 컴퓨터의 절전모드를 해제하고 흰 여백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안이 저물녘의 모래사막 같았다.
자면서도 컴퓨터를 끄지 못했다. 무슨 말이 떠오르겠지 하는 마음보다 그게 나라는 자책과 같은 것이었다. 고인의 죽음을 통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세상 앞에 글 몇 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조용히 가세요. 하는 비감한 마음 뿐.
잠자리에 누우면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여의도 통신탑 위에 올라가 있는 이랜드-뉴코아 조합원 동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증권회관 앞 철탑에 올라가 있는 코스콤 동지가 떠올랐다. 붕어빵 아저씨 고 이근재 선생의 한을 풀기 위해 고양시청 앞에서 노숙을 하고 있을 노점상 분들이 떠올랐다. 모두 외로운 깃발처럼 느껴졌다. 싸워도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싸움들. “땅 위에서 살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다 저 위로 위로 올라가는구나.”, 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의 꿈은 정말 이 구체적인 대지 위에서는 뿌리내리기 힘든 것일까. 십수년을 쫓아다녀도 잘 풀리지 않는 해묵은 질문이 이명처럼 맴맴 돌았다. 나도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인가 보다.
갈 때마다 웅크리고 앉아 촛불을 켜든 사람들은 거의가 건설 조끼들이었다. 간혹 타 노조 사람들이나 사회단체 사람들이 보였지만 정말 극히 소수였다. 한 지인은 우스개 소리로, “아, 돌아가시며 한미FTA 반대나 비정규직 철폐, 신자유주의 반대, 통일조국 만세라도 한마디 외치고 돌아가시지. 그럼 큰 열사 되셨을 텐데. 안 그래요.” 한다. 서로 피식 웃고 만다. 열사에도 이젠 급이 있나? 열사에도 NL PD가 있나? 열사에도 건설열사, 공공열사, 금속열사 식으로 소속이 있나? 투쟁에도 이젠 큰 투쟁과 작은 투쟁이 있나? 중요한 사업장과 덜 중요한 사업장이 있나? 혹시 그가 정말 보잘 것 없는 비정규직 전기공이어서 그러나? 1970년의 목숨값과 2007년의 목숨값은 값이 다른가? 등등의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을 그냥 듣는다.
분양소에서, 정말 이젠 희망이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주제넘은 생각을 했다. 승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이 열사를 있게 했다. 안타까운 죽음들이 더 이어지면 안 된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 이제 희망을 얘기하자, 라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서울우유 공장 앞에서 또 화물연대 두 동지가 분신을 결행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이 일상적 죽음 앞에서. 이 일상적 자살 방조 앞에서. 노동자 민중의 연대와 투쟁과 승리가 아니고선, 무슨 말로 대답을 하고 표현을 하랴.
며칠 후, 노동자/민중대회가 진정으로 분노를 조직하는 대회, 동지들의 민중들의 목숨값을 되돌려 받는 대회, 그 투쟁의 기세로 진정한 변혁의 시대, 평화의 시대, 연대의 시대를 예비하는 대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아이를 재워두고 나와 아픈 어깨 주무르며 간신히 몇 자 적어 본다. 나도 작은 하나의 깃발이 되어 저 거리로 나갈 거라고. 그럼 또 한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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