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다물든, 자기검열하든 택일하라

[발행인칼럼] 넷(net)의 공포 인터넷실명제

국가보안법. 반공, 반북을 국시로 하는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 이래 군사독재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주적으로 사회주의국가 북한이 있었기에 가능한 법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호기어린 선언대로 자본주의의 승리든 어찌되었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 미국에 의한 경제적 고립정책과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마저 무력화되었다. 결정적으로 2000년 6월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포옹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서 38선을 넘으면서 국가보안법조차 무력화되었다.

개성에 공단이 생기고, 물류수송을 위해 매일 기차가 오가고, 통신, 통행, 통관 등 소위 3통이 합의되기에 이르렀다. 이번 대선에서 아무리 정통보수의 깃발을 높이 든다 할지라도 이러한 흐름을 역행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역시 위기에 처한 남한자본의 요구이기도 하기에.

이런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지금 국가보안법은 법으로는 살아있지만 현실적으로 존재의미를 잃어버렸다.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2천여 건에 달하는 간첩단 사건 중 약 6%만이 사실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북한에 연고가 있는 월남가족이나 재일동포들을 잡아다 간첩으로 만드는 기획수사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 그리고 대다수는 억압적 정치체제, 재벌중심의 반민중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재야인사에게, 학생에게, 노동자에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지하철이 있다 카더라”,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투쟁을 했다 카더라” 등등 ‘카더라’로 잡혀간 막걸리 국가보안법 사건이 대다수를 이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작 국가보안법을 무서워한 것은 간첩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카더라 방송으로 치도곤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자기 검열이 필요했다. 아니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엄습해오는 공포와 자기 검열, 이것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의 진정한 위력이었던 것이다.

공포라는 유령은 냉전이 해체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얼굴만 바꿀 뿐이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반공을 기치로 하던 냉전 이데올로기는 반테러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테러방지법 제정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계속 공방중이고, 특히 정보통신과 관련해서는 은밀히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포털 사용시 실명제를 의무화한 정보통신망법과, 입법 중이지만 인터넷 로그기록과 휴대폰 통화기록을 최장 1년간 남겨야 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 중 가장 황당한 것이 “선거운동기간 중에 인터넷 언론사는 모든 게시판, 대화방에 이용자의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적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거일 전 180일부터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의 인쇄물 등을 배부.살포.상영.게시할 수 없다”는 공직선거법이다. 실명 확인을 거치게 함으로서 누구든 게시판에 정당이나 후보에 관한 글쓰기를 위해서는 자기 검열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고, 결국 입을 막으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닌 법이다.

실명을 확인한다는 것은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은 박정희정권이 반공국시 군사쿠데타의 혁명 공약을 구체화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반공법을 제정한 연후 1962년 제정한 주민등록법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국민을 감시, 통제함으로서 권력기반을 강화하고자 전국민에게 부여한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는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 위력은 여전하다. 실제로 전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한 유일한 나라이기에 전세계 어느 나라도 실시할 수 없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실명제를 시행할 수 있다.

결국은 후보자, 정당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댓글, UCC 제작배포 등이 심각하게 규제될 수밖에 없다. 몇 십억을 들여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라고 하는 선거관리위원회 광고는 입은 다문 채로 표만 찍으라고 강권하는 것에 불과하다. 유권자로서의 정치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헌법을 들먹이는 것은 사치일 뿐이고, 오로지 너가 누군지 아니까 입을 다물든 자기 검열을 해서 표현을 하든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막걸리국보를 양산했듯이 신종 인터넷 국가보안법은 사이버 선거사범을 양산했다. 이번 17대 대선에서 인쇄물 배포나 금품 및 향응제공 선거사범에 비해 사이버 선거사범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고, 특정 후보 지지나 비방으로 1300여 명이 경찰에 입건되었다고 한다. 정치는 더욱 은밀한 그 무엇이 되고 있다. 공포정치의 망령이 이제 네트워크에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소위 민주주의를 지고의 가치로 삼았다던 변호사 출신이면서도, 막상 다수당을 이루고서도 ‘국가보안법 폐지’는 허공에 띄워버렸다. 선거 시기 인터넷의 재미를 가장 짭짤하게 본 당사자이면서도 인터넷시대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시행을 하는 걸 보면, 좌파신자유주의자라는 말장난만큼이나 허망함을 들게 한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라 했던가. 그러나 자본가의 천년왕국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 ‘없는 자’들에게는 이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다. 비정규직노동자의 생존권투쟁에도,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에도, 평택의 내땅지키기 투쟁에도 그 귀결은 벌금이어서 투쟁을 위축되게 한다. 실명제 거부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자유에 대한 변함없는 외침을 막을 수는 없다. 역사의 순리이다.
덧붙이는 말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민중언론 참세상과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실명제 거부투쟁에 지지, 지원, 격려, 동참을 해주셨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실명제 거부투쟁이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지고의 가치를 위한 투쟁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대선 시기 실명제를 거부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공동 대응한 민중언론 참세상과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앞으로 나아갈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는 싸움, 법 개정을 비롯한 실명제 거부 활동을 민중언론참세상 독자 여러분과 함께 펼쳐가겠습니다. - 이종회 민중언론참세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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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무리

    평양 "순천"공항이 아니라 "순안"공항이 아닌가요?

  • 이꽃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비제

    악법, 악제인 주민등록제도의 연장선상의 인터넷 실명제를 반대합니다. 제발... 더이상 인터넷을 침범하여 국가의 장벽을 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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