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시대, 쥐꼬리만한 희망

[기고] 2008년 무자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부쳐

2008년 무자년(戊子年). 마침 올해는 실용주의(實用主義)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도 새롭게 출범할 예정이다. 2008년은 쥐띠 해에 걸맞게 서민들의 삶에도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을까? 아니면 ‘쥐꼬리만큼 남은 희망’마저도 그야말로 실용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쥐는 백악기 끝 무렵인 약 6,500만년 전에 진화한 설치류 중의 하나이다. 설치류는 아프리칸 피그미 마우스처럼 몸무게가 겨우 7그램 남짓 하는 작은 녀석부터 몸무게가 6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덩치 큰 카피바라까지 생김새도 제 각각이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쥐에 대한 관념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옛 사람들은 쥐가 사람의 미래를 점치거나 한 해의 풍요를 예측하는 예지력이 뛰어난 동물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쥐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은 지진 발생, 화산 폭발, 해일, 폭풍우로 인한 자연재앙을 사람보다도 훨씬 먼저 인지하는 능력을 가졌다. 만화 영화 '톰과 제리'나 '미키 마우스'에서도 쥐는 귀엽고, 영리하고, 재빠르고, 머리가 좋은 동물로 등장한다.

반면 쥐가 손톱이나 발톱을 먹고 그 주인으로 변신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요물이라고 생각하거나, 곡간에 쌓아둔 곡식들을 축내거나 훔치는 부정한 동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그다지 심한 편견은 아닐 듯 싶다. 쥐는 14세기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죽음의 전염병인 '흑사병'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쥐벼룩이 쥐의 간에 기생하고 있던 페스트균을 사람에게 옮김으로써 흑사병이 돌았던 것이다.

한편 실용주의에 대한 평가는 쥐에 대한 관념보다도 더 극단적이고 모순적이다. 실제 생활에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미국식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추종해야 한다는 옹호론에서부터 모든 가치평가를 ‘실용’이라는 미명 아래 ‘이윤의 추구’에만 둠으로써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익이나 원칙을 포기한다는 폄하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실용주의(Pragmatism)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만들어진 개념이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는 1870년~1874년경 메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2주마다 열렸던 ‘형이상학 클럽(metaphysical club)’이라는 모임에서 ‘실용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1877년~1878년 '월간 대중과학(Popular Science Monthly)'지에 '과학 논리의 실례(Illustrations of Logic of Science)'를 연재하면서 실용주의 내용을 다듬었다.

퍼스는 칸트가 실험적, 경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쓴 프라그마티쉬(pragmatisch)라는 독일어에서 프래그마티즘(Pragmatism)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칸트는 실천이성의 명령을 프라크티쉬(praktisch)와 프라그마티쉬(pragmatisch)로 구분했다. 프라크티쉬(praktisch)는 선천적이고 정언적인 실천적 명령이며, 프라그마티쉬(pragmatisch)는 경험적이고 가언적인 명령이다.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라그마티쉬(pragmatisch)는 그리스어의 프라그마(Πργμα)에 도달한다. 프라그마는 행위, 실행, 실험, 활동을 뜻한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사상이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방법이 강조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태동한 '실용주의'는 윌리엄 제임스, 죤 두이 등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제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이 되면서 미국식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철학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프래그마티즘(Pragmatism)은 20세기 들어서 동아시아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번역과 근대화에 한 발 빨랐던 일본인들이 프래그마티즘을 실용주의(實用主義)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메이지(明治) 38년인 1905년 무렵이다.

이후 식민지 조선에도 실용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실용주의라는 새로운 번역어를 ‘누가, 언제’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들여왔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1920년 9월에 발행된 '개벽' 4호에 실린 '제 명사(名士)의 조선 여자 해방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실용주의라는 번역어가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동양염직주식회사 취체역(현재의 이사) 함세풍은 ‘여자해방이 즉 사회진보’라며 “실용주의의 여자 교육을 강박적으로 제한함은 배리(背理)의 사상인즉 실용적되는 동시에 자유적이 되지 아니치 못하겟소”라고 주장했다. 여성해방의 논리를 ‘자유, 평등, 박애’나 ‘천부인권’ 같은 인간의 기본권에서 끌어오지 않고, 지극히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나 싶다.

묘향산인은 1920년 12월에 발행된 '개벽' 6호의 '근세철학계의 혁명아 쩨임쓰 선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실용주의의 발생경로, 요의(要意), 인생관, 인식론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모든 믿음은 현금가치(cash value)가 있어야 참”이라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광수는 1921년 8월에 발행된 '개벽' 6호에 로아(魯啞)라는 필명으로 '팔자설을 기초로 한 조선민족의 인생관'이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그네(영미인)의 인생철학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 그것을 더 철학화한 실용주의(Pragmatism)를 실어 들이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인가 합니다”라고 설파했다. 최남선, 김성수와 함께 친일협력의 길을 걸었던 이광수가 발표했던 ‘민족개조론’의 뿌리를 캐보면 실용주의에 도달할 것 같다.

한치진은 쉴러의 신인간주의를 소개하면서 “세인이 다 아는 미인(美人) 사상가 윌리암 쩨임쓰의 실용주의 ‘푸랙마티즘’을 ‘영국식 사고방식’으로 해석하여 놓은 것을 인간주의라 한다”('동광' 13호, 1927년 5월)면서, “미국의 실용주의는 무엇을 판단할 때에 덮어놓고 그것의 결과를 보아서 은으로 금으로 회계하려는 대(代)에 영국의 인간주의는 무엇이던지 그것의 결과를 보고 은금으로 판단하기는 하되 조곰 이론을 붙이어 가지고 하자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 제33호(1930년 10월)의 '신어대사전'에는 “푸라그미틔즘(Pragmatism)”을 “실제주의, 실용주의. 진리란 우리들 생활에 소용되는 것뿐으로 시대와 사람에 따라 어떠케든지 변하는 것이란 설”이라고 설명했다.

1934년 8월에 발행된 '삼천리' 제6권 8호에는 허헌, 여운형, 김약수, 김병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민족주의 좌파 지식인들이 모여 「세계 일류 정치가.사상가 논평회」를 벌였다. 이 논평회에서 허헌은 “더구나 미국(米國)에는 사상가라고 볼수 업지요. 잇다하여도 제임쓰 가튼 실용주의 철학자나 잇슬 뿐이지요. 미국(米國)가튼 실용경제만능 나라에 사상가를 찻는 것부터 잘못이겟지만은”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1939년에 발행된 '사업향인(事業と鄕人)' 제1집에서는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의 인물평을 하면서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만능의 부호들과는 다르다”며 “그 의견 및 논책은 공리공론보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에 입각한 적절한 예를 끌어들여 문제의 진상을 분명히 드러내며 사실의 핵심을 파악하여 여러 각도에서 분석한다”고 평가했다.

도대체 구마모토 리헤이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을까?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일제시대 때 군산, 김제, 정읍 등에서 대규모 농장을 소유했던 대지주였다. 1932년 당시 구마모토 농장 소유의 논만 1천여 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13배가 넘었다. 또한 농장에 목을 매고 살아갔던 소작인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구마모토 농장은 비싼 소작료로 악명이 높았으며, 흉년에도 소작료를 일정기간 내에 완납해야 했다. 만일 조선인 소작인이 소작료 납부 기일을 어길 경우, 연체료를 내거나 소작지를 몰수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실용주의의 진면목은 바로 일제의 악질 지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부를 축적하는 방법 그 자체가 아니었을지 모를 일이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실용주의가 본격적으로 한국 땅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주한 미군, 기독교, 산업화, 도시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과정이나 절차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제 세상을 찾은 것이다.

소흥렬은 '사상계' 1967년 1월호에 '풍토없는 사상 실용주의 : 해방 20년의 외래 사조'를 발표하며, 철학자의 입장에서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반면 이월세는 1972년 9월 재향군인회에서 발간한 '안항(雁行)' 34호에 '듀이의 철학과 한국 근대화 : 실용주의는 곧 새마을 정신과 통한다'고 했다. 어느 새 실용주의는 민족개조론과 합의 이혼을 통해 두둑한 위자료를 챙기고 새마을 운동과 재혼을 했나 보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도 실용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등소평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등소평의 노선을 실용주의라고 불렀다. 등소평의 어록에는 “남쪽으로 오르든 북쪽으로 오르든 언덕만 오르면 된다”는 ‘남파북파(南坡北坡)론’이라는 말도 그의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말로 남아 있다.

등소평의 실용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다만 현재 중국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정치체제만 공산당이 독점하는 무늬만 사회주의인 특이한 독재국가로 남아 있다. 또한 지역간, 계층간 빈부격차가 점차 더 심해지고 있으며,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관료주의로 악명 높다.

심지어는 김정일 세습체제의 북한에서도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나 강성대국의 정치구호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은 철저히 실용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한편 노무현의 참여정부도 초기부터 ‘시장친화적 실용주의’를 추구하였다. 2003년 5월 29일자 '뉴스메이커'에서는 '어! 노무현 대미 외교 : 원칙 비켜나 실용주의 급선회... 북핵·북체제 인식 변화도 충격적'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으며, 2003년 12월 18일자 '한겨레21'에는 '노짱에서 ‘노장’으로? : 노무현 대통령의 21세기 신진보, 보수론... 합리적 실용주의 노선, ‘몰이념’이라는 지적도'라는 제목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사회학자 김호기는 2004년 12월 16일자 '주간한국'에 '사회통합 위한 ‘한국적 길’ 닦아야 : 실용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이념적 양극화 제어할 ‘역사적 대타협’ 필요한 때' 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2005년 1월 25일자 '주간동아'도 '‘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 집권 3년차 노 대통령 대변신 선언…사회적 대타협 창출 리더십 시험대에' 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실용주의는 한미FTA 협정의 졸속체결과 삼성재벌의 철저한 옹호로 귀결되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을 기대하며 ‘쥐꼬리만큼의 희망’을 가지고 노란색 돼지 저금통에 푼돈을 집어넣었던 서민들은 노무현 정부의 실용주의로 인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좌절과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어찌 보면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노무현 정부의 통치이념을 계승한 신자유주의 실용정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창조적 실용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부패하고 몰염치한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본질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새해에 포장지만 바꾼 2007년 재고상품 판매에 열을 올릴 것이다.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붙어 곡학아세를 일삼은 사람들은 CEO형 리더라는 포장지를 입혀 새롭게 포장하고, 탈세와 비리와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도 실용적 인물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면죄부를 받고 있다.

2008년 무자년 새해, 서민들이 쥐 꼬리 만큼의 희망이라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실용주의’라는 괴물의 환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좌절과 절망 그리고 분노를 저항으로 조직화하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그나마 그것이 조금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
덧붙이는 말

박상표 님은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국건수) 정책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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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노무현 , 새마을 , 여성해방 , 이명박 , 무자년 , 실용주의 , 형이상학클럽 , 현금가치 , 공리주의 , 소작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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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라

    실용주의 역사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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