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인의 죽음

[시] 노동자시인 조영관 1주기를 추모하며

송경동 시인이 노동자시인 조영관 1주기를 추모하며 글을 보내왔다. 1년 전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밤 민족문학작가회의 게시판에 쓴 글과 병원 옆 피시방에서 새벽 6시경 눈물로 쓴 '노동자 조영관 잘 가시라'는 추도시다.
송경동 시인은 조영관 시인이 고인이 되기 몇 년 전에 '삶이 보이는 창'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처음 만났다고 했다.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았던 인천의 건설노동자였고,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게 되리라 믿고 있던 차였다.
송경동 시인은 "아, 이렇게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박노해의 초기 시에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진실함과 감동이 거기 있었다"며 조영관 시인의 옛 기억을 떠올렸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고 했다.
조영관 시인은 1976년 서울시립대에서 처음 운동을 시작했던 사람으로, 1984년 졸업 후에는 인천지역 현장으로 투신했다. 동미산업 노조위원장을 하다 해고된 후에는 블랙리스트에 걸려 아예 건설일용노동자가 되었다.
송경동 시인은 "폼 같은 것은 아예 없었어요. 늘 손톱 밑이 검었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불이 반듯이 개워져 있었어요. 누구든 보았으면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사람이었죠"라며 조영관 시인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명이었지만 어느 시인보다 더 아름다운 시인이었다"고 회고했다.
노동자로, 시인으로 불꽃처럼 살다간 조영관 님의 유고 시집 발간 및 1주기 추모행사는 16일(토) 오후 3시에 만해NGO교육센터에서 열린다.
- [편집자 주]


조영관 시인을 묻고 돌아온 날 밤, 민족문학작가회의 게시판에 쓴 글

대부분 회원들이 잘 모르는 분일텐데, 조영관이라는 선배 시인이 돌아가셔서 한 삼일 영안실을 지키다 돌아 왔습니다.

알고 보니 박영근 선배와는 1980년 초반 철산동 자취방에 살며 함께 학습하고, 술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추던 일생의 벗이며, 형이었다고 합니다. 박영근 선배가 부르면 다 오지 않아도 꼭 와서 며칠씩 술만 먹는 박영근에게 숟가락으로 밥 떠서 먹였던 선배라고 합니다. 어젠 들어보니 김형수 선배와도 인천에서 함께 학습모임하고 그랬었다고….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인연을 가진 선배이건만 2002년에야 실천문학으로 늦깎이 등단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 당시 등단작품들을 보며 너무 좋았습니다. 아, 아직도 노동현장의 언어로 정직한 방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곤 몇 해 만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귀가 부처님 귀처럼 큰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은 무슨 하회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나 노동자밖에 못 될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손톱 밑에 현장의 때가 시커멓게 끼어 있었습니다. 손등은 상처투성이였고, 손아귀엔 괭이가 박혀 있었습니다. 후배가 뭐라고, 늘 만나면 그 굵어진 손으로 얼마나 반갑게 두 손을 따뜻이 잡고 놀 줄 모르던지, 미안했습니다.

강원도 어디 건설 현장에 와 있다던 전화 받고는 한참 잊어먹어도 좋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10월 형이 간암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보신각 앞에서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30일간의 거리예술제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런 씨팔!”
왜 되져야 하는 새끼들은 멀쩡하고, 저 높다는 하늘은 착하게만 살아온 사람만 데려가려 하는지…. 싫었습니다. 그런 삶들이. 늘 변방이고, 늘 고통이고, 늘 술인 삶이. 실제적인 사회 변화는 이루지 못한 채 모두가 개인의 방 안에서 아프게 살아가야 하는 삶들이….

일이 끊긴 작년 겨울엔 러시아 소설을 다 보았다고 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순정이 참 깊었던 선배였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런 착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쉽게 쓰면 안 된다. 먼저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런 선배였습니다. 함께 20여년 살아 온 그의 후배들이 그러더군요. 그 형은 그렇게 문학을 좋아했다고….

전남 함평 어느 골짜기에서 태어났더군요. 생가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대나무 밭 밑에 조그만 집. 서른 가구도 되지 않을 성 싶은 작은 마을. 함평뜰이 있고, 영산강이 흐르는 참 따뜻한 고장이었습니다. 형은 평생 후배들에게 무엇은 안 된다라는 말을 한번도 안 했다는데, 그 까닭이 그 너른 들과 깊은 강을 보며 살아와서 였을 거라고 모두들 유추하더군요.

술자리에서 들어보니, 한편의 사람들은 형은 운동은 했으되 과학적, 조직적 운동은 안 했다 라고 평가하더군요. 또 한편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라. 그럼 영관이 형이 운동을 안했으면 우리 중에 누가 운동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냐고 하더군요.

전 후자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운동을 했다는 그 동문들은 과거 모두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미안하지만, 소수를 빼놓고는 지금은 모두 웬만큼은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CEO고 무슨 무슨 장이고, 누구는 민노당 지역위원장이고, 누구는 국무총리실에 있고, 누구는 청와대에 있고, 누구는 정치조직의 리더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명함 하나쯤 씩은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연히 동승하게 된 형의 한참 후배의 차도 중대형차여서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영관이 형은 운동은 안 했으되 노동자로 끝까지 살아 버렸습니다. 마지막에도 강원도 어느 곳에 교각을 놓는 공사현장에서 90도 교각을 오르다 떨어져 병원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과거의 기억을 통해 과학적, 조직적 이야기를 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형이 주는 술을 한 이틀 연짱 받아먹었습니다. 사실 장지까지는 따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 내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아마도 괜시리 눈물이 더 났던가 봅니다. 생가 앞에 노제를 차리고 그 앞에 영정을 갔다 두는데, 한 사람의 삶이란 뭔가 하는 슬픔이 몰려 왔습니다. 엄마 하며 이 길을 뛰어 왔을 작은 아이 하나가, 배고파 왔는데 엄마는 들에 나가고 없는 집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작은 아이 하나가, 저 들녘을 넘어 서울로 가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이젠 외로운 유골 한 상자가 되어 맨 처음 출발했던 그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뭘까 하는 생각에 사무쳤습니다.

산다는 게 무섭고 싫었습니다. 민족이 뭔지, 계급이 뭔지. 그 작은 아이 하나에게 너무도 많은 짐과 술을 부과했을 이 세상이 싫었습니다.

영산강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이젠 모두 오십 줄에 가까운 옛 벗들이, 저기 배에 실려 가는 유골함을 보며 노래를 부르자고 했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고 모두가 일어섰습니다. 저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구절도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냥 눈물만 주룩주룩 흘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씨팔 왜 이렇게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왜 자꾸 이 시대는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생전에 시집이라도 하나 묶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김해자, 백무산, 성효숙 선배, 그리고 실천문학에서 애를 써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모두가 바라지 않았던 유고 시집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지만, 조만간에 형이 평생 사랑했던 시집 한 권을 보게 될 듯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이젠 아니어서 어떤 평이니 덕담도 모두 덧없겠지만, 그런 한 사람의 시인도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저희 속에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가끔 87년 체재 논쟁을 보게 되는데, 사실은 저희 안에도 이렇듯 끝나지 않은 87년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관이 형은 그 길에서 노동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누구의 삶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범한 삶. 전 그렇게 못 살 것 같습니다.

주변 분들과 상의해서 '조영관 노동자 시인장'으로 치러 드렸습니다. 워낙 작가회의 활동 자체를 안 했던 선배라 어려웠지만 작가회의 여러 선생님들, 선배님들이 함께 이름 걸어 주셨습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형을 좋아했던 후배의 한 사람으로 마지막까지 선배님 잘 가셨다는 보고 말씀 남깁니다.

다음은 조영관 형이 작년 평생의 후배였던 박영근 시인(2006년 5월 11일, 운명)과의 인연을 남긴 글입니다.


영근이가 보고 싶다

영근이가 죽었다. 나의 벗 시인 박영근이가 죽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헛것만 같다. 정리가 되지 않는, 너무 아프고 우울한 밤들이 계속되고 있다.

대학 3학년 말 내 나이 스물여섯인가 일곱에 만났으니 모질게 이어온 인연이다. 영근이로 인해 내 인생은 변했고, 딱 영근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출판사에서, 노동현장으로 삶의 터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내 젊은 날, 그 중심에 박영근이 있었다. 아직도 그의 죽음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비틀거리면서 죽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섰기에 더 아프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니, 죽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을 펼치면서 어느 시가 제일 맘에 드냐,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봄비」라는 시를 짚었다. 「봄비」라는 시는 이렇다.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렛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힘든 네 몸을 그만 내려놓아라’ 라니. 그의 마음의 지경이 이러했으니 늘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 같은 거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가슴을 친다. 작년 5월 이맘 때였을 것이다. 영근이 나를 불렀다. 세월의 힘을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부평고 옆 그 낡은 쪽방에서 2박 3일을 같이 있었는데 그것은 뭔가라도 그에게 먹이기 위해서였다. 어적어적 먹어대는 내가 부끄럽게 “죽기로 작정했니.” 해도 배달된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술만 찾았다. 밥술을 뜨다가 대책없이 울었고 그가 울면 나도 울었다. 존재의 무거움이, 또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업을 놓지 못하는 시인의 운명이, 이제 내 것이 아닌 사랑이, 5월 햇살의 눈부심이, 초라함이, 비천함이, 팽팽함이, 낯설은 것이, 안타까움이, 그 모든 것이 눈물로 찾아와서 우린 얼굴을 서로 부벼대면서 울고 또 울었다. 같이 가장 많이 울어 보았던 사람이 박영근일 것이다.

울고 나면 이상하게도 밥이 들어갔다. 그리곤 잤다. 자다가 깨어나 보면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3일째 되는 날은 음식을 입에다 억지로 떠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그릇을 떠먹이고, “형 가면, 나 죽어.” 했어도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철을 타고 오는데도 “어디야. 형아 돌아와라, 나 죽을 거야.” 몇 번씩 전화가 왔어도 나는 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나 죽을 거야.” 해서 수원에서 부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간 기억도 있어 죽음이란 그 당시에는 허튼 농담이었다.

그리곤 경기도 광주로 춘천으로 제부도 인근으로 떠돌아다니느라 그를 찾지 못했으니 그때의 말이 딱 현실이 된 셈이다.

그는 그렇게 몸과 맘을 소진시켜 갔다. 현실과의 먼 거리, 그것이 그의 운명이기도 했다. 시인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그는 대책이 없는 시인으로 자유인으로 살다 갔다. 그런 그가 좋았고, 한편 그런 그가 안타깝고 밉기도 했다.

여전히 나는 그의 죽음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여러 날을 이렇게 아플 것 같다. 그는 죽어서 정말 새라도 됐으면 좋겠다. (2006년 5월 어느 날. 조영관)


고 조영관 노동자 시인 추도시 : 노동자 조영관 잘 가시라

잘 가세요. 형
비참도 우울도 분노도
산자의 고통도 이젠 모두 벗고
치렁치렁 얽혀들던 늦은 밤
그러고도 늘 먼저 깨어나야 하던 이른 새벽
못다 이룬 사랑도 절망도 꿈도 모두 잊고
잘 가세요. 형

이젠 챙겨야 할 연장이 없겠군요
그래도 잘 살았어요. 암요. 걱정마세요
예전처럼 노래라도 한 곡 부를까요
걸판지게 꺾정이춤이라도 한판 춰볼까요
개구쟁이들처럼 물놀이라도 한판 할까요
시대와 역사를 향한 빛나는 눈동자들이었다가
외로운 방, 말없는 술잔이 되기도 했던
우리의 슬픔과 곤혹에 대해선
이젠 말하지 말아요
암요. 기쁨이고 따뜻한 날들이었어요
최선이었고 최대의 행복이었지요

가시다 아쉬우면 저 별들처럼
가끔 우리의 쓸쓸한 눈동자를 바라봐 주세요
그리곤 삶의 허름한 모퉁이 어디에선가
다시 봐요. 인적이 드문 어느 산길에서나
먼지바람이 휭하니 부는 낯선 객지 공사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띄엄띄엄, 쓸쓸하게 들리는
망치소리로나 만나요
누군가 또 다쳤다거나 외로워한다면
그게 형인 줄 알께요
누군가 또 여리거나 아프다면
그게 형인 줄 알께요

증오할 일보다 사랑할 일이 많아요
암 그렇지요. 미워할 일보다
그리워해야 할 일이 더 많아요
누구보다 더 높이 올라갈 일보다
내려가야 할 일이 더 많고요
이룰 일보다 버릴 일이
커질 일보다 작아질 일이
더 많지요. 그럼요. 그렇지요

잘 가세요. 형
가서 다시 또 뵈요
헤어져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 기억할께요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길
훼손되지 않은 노동자의 영혼으로
작은 이름으로 떠나가는 형의 삶이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짧은 날들이었지만 사랑했어요
형. 잘 가세요.
덧붙이는 말

송경동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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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 송경동 , 조영관 , 실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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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wantyou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살아갈수록 산다는 것이 버겁고 무섭습니다.
    말한마디 행동하나도 오롯한 맨정신에 관성과 습관이 철저하게 배제된 소박한 진실함으로 하고싶습니다.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하지만....목놓아 울지않을 수 없어 이 기사가 원망스럽습니다. 사는것이...앞서간 이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데...

  • 정화

    80년대 민중시를 극복하지 못했군요. 산문시도 산문시 나름대로 품격이 있는데, 이건 뭥미? 산문과 시의 경계에 대해 새삼 묻게 되는군요.

  • 거시기

    고인의 1주기를 추모합니다. 정화/문학적 평가보다는 자신들의 살아오는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는데 노동자들의 글쓰기는 의의가 있지 않나 봅니다. 그것을 문학적이네 아니네 하는 것은 평론가들의 몫이구요. 물론 님께서도 대중에게 보여질 수 있을 만한 양질의 생활글을 요구하시리라 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표현도 삶의 무게때문에 더욱 벅찬 시기이지 않난 생각됩니다. 문학적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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