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8년 어느 날, 이명박·박근혜·노무현만 검색되는 오늘은 싫어!

[서평]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를 읽고

우리 모두 다 아는 구전 동화 하나

옛날 옛날 하늘나라에 옥황상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옥황상제에게는 어여쁜 딸이 있었는데 베를 잘 짜서 이름이 직녀였답니다. 직녀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니 소를 잘 키우는 목동 견우였습니다. 봄날 꽃같은 사랑을 나누던 견우와 직녀가 그만 베 짜는 일과 소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견우와 직녀의 마음을 저는 알 것도 같습니다만 옥황상제는 사랑 놀음에 일을 게을리 한 두 사람에게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 만날 수 없는 벌을 내립니다.

다만 일 년에 한 번 칠월칠석날,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지요. 그러니 일 년에 한 번 사랑하는 견우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려 사랑하는 직녀를 만난다 해도 강 건너 아스라이 손짓 하고 있으려니 통곡하는 울음이 멈추지 않을 밖에요.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이 폭포가 되고 강이 되어 하늘아래 땅위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홍수 때문에 당최 여름만 지나면 먹을 것이고 뭐고 쓸어가 버려 살 수가 없던 동물들이 대책회의를 합니다. ‘이 일을 우찌하면 좋으냐.’ 이때 까마귀와 까치가 ‘우리가 저 위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겠다’며 총대를 멥니다. 이름하여 오작교입니다. 견우와 직녀는 칠월칠석날이면 은하수 오작교 위에서 지난 일 년 동안의 그리움을 풀어 끌어안고, 황혼이 질 무렵이면 다시 헤어져 있는 일 년 동안 건강하라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꼭 잡고 놓기 싫은 손, 놓아주며 눈물이 흐르니 아직도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아침저녁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들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립니다.


“선배노예들의 뜻을 절대 잊지 말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이야기에는 그것을 구전한 공동체 사람들이 동의하고 승인한 매력이 있는 법이다.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옥황상제면 하늘나라의 왕인데 그 딸이 베를 잘 짜서 직녀이고, 옥황상제의 딸이면 공주인데 그 공주의 사랑하는 연인이 귀족이나 높으신 양반이 아니라 소치는 목동이라니.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봄볕처럼 화사하다.

안타깝게도 지배계급이 판정리해서 남기는 역사는 베 짜는 아낙네도, 소치는 목동도 남기지 않았다. 왕들이 뭘 했는지, 귀족들이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잘났는가만 기록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핏줄로 면면히 세습되는 권력의 독점. 그 오만한 논리의 반복적 배열이 역사이다. 또한 역사는 아무나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에서는 왕실의 사관, 서양에서는 신의 영광을 살아있는 교황에게 바치는 수도원의 수사들이나 ‘기록’이라는 신성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글을 배울 만큼 한가한 사람들, ‘천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지배계급이었다. 가끔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지배계급의 역사가 기록하지 않았던 노동하는 이들의 권리와 투쟁.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구기가열매처럼 붉은 미래를 보여 준다. 그림_ 강우근, '구기자열매'

조선 초기 세종이 왕실의 정당성을 위해 만든 《고려사》의 <최충헌전>은 ‘만적의 난’을 기록하고 있다. 무인정권으로 집권한 최충헌의 노예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슬로건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어찌 노예라고 채찍 아래서 천대만 받겠는가!’였다. 만약 당시 반란에 참가한 노예가 이 일을 기록했다면 마땅히 ‘난亂’이 아닌 ‘노예해방투쟁’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비록 패한 투쟁이지만 비천한 노예로 사느니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꿈과 결의는 비장했다. 적들에게 어떻게 교란당했는가! 동지들의 싸늘한 시체를 뒤로 후퇴한 발걸음의 억울함과 한을 담아, 부디 살아남은 노예들은 그 뜻을 결코 잊지 말고 반드시 복수해 주자. 저 높은 신분 질서의 장벽 아래 다시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말자. 우리 비록 쓰러져 죽어갔지만 해방의 날 꽃으로 피어 만나자.”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정신을 기리며 해마다 전투했던 들판, 선배들의 피로 물들였던 땅을 딛고 만나 해방을 이루기 위해 먼저 가신 노예선배들에게 묵념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결의를 하진 않았을까?

남기고 싶은 것
-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


얼마 전 막스 갈로의 로마인물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입맛이 쓰다.

막스 갈로라는 작가를 잘 모르는데 기특하기는 하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새로운 로마’를 나날이 정복한 제국.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거느린 로마의 황제나 귀족이 아니라 노예를 그 시리즈의 첫 번째로 선택한 만큼의 양심이 그에게 있다. 또한 다음 시리즈 책들의 주인공인 네로에게는 ‘비밀’을 티투스에게는 ‘승부수’라는 단어를 주었으면서 스파르타쿠스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짝지어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노예였던, 그러나 싸우다 죽은 스파르타쿠스에게 죽음은 곧 삶이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한 장면

이유인즉슨 말하는 짐승으로 원형경기장에서 서로 죽일 때까지 싸워야하는 비참한 노예로 살 수가 없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싸운 스파르타쿠스는 죽음으로써 이름을 남겨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막스 갈로는 스파르타쿠스에게 죽음은 곧 삶이었다고 말한다.

나름대로 양심적이고 진보적일 수 있으나 오히려 교묘하게 입맛이 썼던 가장 큰 이유는 스파르타쿠스만 있고 노예반란은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수백만 노예들이 2년이 넘도록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휩쓸며 전쟁을 하는 장면들에서조차 다른 노예들은 대부분 그저 스파르타쿠스의 뛰어남을 확인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쓰일 뿐이다. 참으로 제국 로마스러운 서술이 아닌가 말이다.

만약 스파르타쿠스의 노예해방투쟁에 함께 한 노예가 역사를 남겼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싸우다 죽어갔는지, 그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감히 거대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결의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기록할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의 아주 많은 고민이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폭발했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마지막 한 명의 전사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로 등을 보이지 않았으며 기어코 무릎이 꺾이고 쓰러질 때까지 적을 향한 칼날을 놓을 수 없었던 동지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눈물겹게 고맙고 소중했겠는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그 징글징글한 전투에 대한 기억을 저주하게 만들고, 단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보기만 한 노예까지도 다 죽여서 기억을 없애려고 했다는데, 이 싸움이 어찌 뛰어난 스파르타쿠스 하나의 이름으로 끝날 것인가 말이다.

남기고 싶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함께 투쟁을 결의한 헐벗은 동지들 외에 아무리 둘러봐도 아군은 없고, 고립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를 악물고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계급은 죽어도 모른다.

  1985년 구로 선일섬유 노동자들이 사측에 탄압에 맞서 임금인상투쟁을 하고 있다. 이들이 남기고 싶은 건 이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노동자가 기록해야

그러므로 우리가 써야 한다. 노예반란을 노예가 기록하지 못했지만,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노동자가 기록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노동자들이 기록한 책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메이데이)

과거의 역사를 노동자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투쟁의 역사와 삶의 역사를 우리는 부지런히 써야 한다. 늘 중요하다고 말만 하면서 막상 날마다 날마다 벌어지는 투쟁의 현장에서 바쁜 우리는 기록해서 남기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투쟁이라는 것을 자꾸 까먹는다.

이러다가 천 년 뒤 우리의 후세들이 2008년을 검색해 이명박과 박근혜, 노무현만 알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화가 나서 땅속에서도 벌떡 일어나 ‘아니야!’라고 바락바락 소리지르고 싶어질 것이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나와 내 아이들이 살 이 땅위에 굳건하게 건설하기 위해 우리의 투쟁을 쓰고 읽자.

노동자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책,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는 그래서 값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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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 , 같은 시대 , 다른 이야기 , 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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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망

    책 얘기는 하나도 없구만.... 읽기는 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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