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호 전 전진 집행위원장(이하 직책 생략)이 본격적으로 진보신당 투자유치에 나섰다.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노건추)’라는 간판을 내걸고, ‘진보신당의 실질적 창당과정’에 “계급정당 추진세력도 함께하자”(참세상 4월 20일자 인터뷰)는 홍보물을 뿌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따로 정당을 만드는 것은 힘들 터이니, “새로운 정당 창당의 흐름 속에서 블록을 형성하며 문제의식을 이어가자”고 한다. 그리고 투자실패의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평등파가) 민주노동당을 깼던 것”처럼 “같이 하다가 나중에 필요하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방책도 알아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막힌’ 홍보물에는 경고딱지가 빠져있다.
주의를 요망함 - 이 회사(진보신당)는 이미 한 번 부도 맞은 민노그룹의 계열사 출신이며, 지금은 ‘노심’의 법정관리 하에 있음.
파산에 이르고 있는 진보정당운동
한석호는 진보신당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다. 즉 “진보신당은 흥해가는 집안”이고 “2년 후 지자체 선거에서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에 더블스코어로 이기고, 다음 총선에서는 압도적 차이로 이길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이제 막 ‘실질적 창당과정’으로 진입하고 있다. 한석호의 말마따나 먼저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가 성역 없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진보신당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한석호는 앞으로 진행될 평가와는 무관하게 벌써부터 진보신당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이는 세일즈를 위한 수사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치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청산했으니 진보신당은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는 진보정치 몰락의 근본적인 주체적 책임을 직시하는 것을 여전히 회피하고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첫 원내진출 이래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있는 진보정치 몰락의 추세는 민생파탄의 책임을 지고 몰락한 노무현-열우당 자유주의세력과의 동반몰락의 효과이다. 그리고 동반몰락은 자본주의 모순 심화의 정세에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자유주의세력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주체 자신의 오류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시대착오적인 정치기조에 갇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민생파탄을 함께 야기한 똑같은 자본가정당이라는 것을 폭로해내지 못해 열우당 몰락의 반사이익을 한나라당이 독점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방관했다. 또한 이명박의 성장주의, 시장주의에 맞서는 경제대안과 전망을 제시하고 투쟁하지도 못해 스스로를 무능력한 세력으로 전락시켰다.
지난 4년 동안 민주노동당이 보여준 것은 개혁입법이라는 명분으로 열우당과 정책공조를 하거나, 열우당이 법안을 내놓으면 좀 더 왼쪽의 수정안을 내놓는 등의 보수정당과 별 다를 바 없는 의정활동이었다. 덕분에 진보는 보수/진보개혁 구도 속에 갇혀, 소위 진보개혁세력 내의 다소 급진적인 분파로만 여겨졌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열우당 2중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자유주의세력과 나란히 몰락한 것이다.
따라서 진보정치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이웃사촌마냥 자유주의세력 왼편 정도에 위치지울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세력과 분명하게 갈라치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자신을 보수, 개혁으로 일컫는 자들이 민생파탄을 야기하는 똑같은 자본가정치세력임을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대결하는 세력으로 자신을 정립해야 한다. 보수 대 진보가 아니라 자본 대 반자본 구도를 형성해야 한다. (민주당도 ‘생활진보’를 표방하기 시작하는데, 진보신당은 상표권 분쟁이나 할 참인가?)
진보정당이 민주당의 ‘작은 친구’처럼 인식되고 있는 조건에서, 만약 진보세력이 자본 대 반자본 구도의 형성에 나서지 않고, 진보개혁 이미지에 기대어 이명박의 실정에 의한 반사이익을 앉아서 기대한다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주변적인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또는 몇 번의 학습을 통해 자신들을 시민사회의 요구에 적응시킬 줄 아는 양당제의 탄생을 목도하며 사멸할지도 모른다. 진보 프레임의 해체와 반자본주의 세력의 새로운 결집과 정립만이 진보정치 몰락 이후의 유일한 활로이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주체들이 분당과정이나 총선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올바른 혁신과는 한참이나 먼 것이었다. 대선참패에 대한 진정어린 평가는 없이 반종북 정치공세로 분당동력을 확보했고, 진보적 의제의 제시는 고사하고 보수정당과 별 차이없는 이미지 호소, 인물 중심의 선거활동을 펼쳤다.
특히 자유주의세력과의 차별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심상정 후보를 지원했던 것은 상징적이다. 진보신당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을 자유주의세력과 민주노동당 사이의 중간지점에 위치지우고 있으며, 노무현의 대체재 역할을 (부분적으로) 하고 있다.
진보신당의 여러 모습들에서 그 미래를 낙관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2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총선활동, 어떠했는가?” 참고). 진보정당운동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있고 근본적인 혁신 없이는 파산하고 말 것이라는 긴장이 주체들에게서 감지되지 않는다. 한석호의 ‘확신’은 이러한 ‘무긴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진보정당운동의 파산’이라는 구렁텅이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여기에 동참할 이유는 무엇인가?
‘심상정-한평석 후보단일화 시도’ 반성이라는 시금석
진보신당은 자신의 각성에 따라 파산의 구렁텅이를 피해갈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질적 창당과정’에서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성역없는, 진정어린 평가와 근본적인 혁신이 이뤄진다면 진보신당의 미래는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상정-한평석 후보단일화 시도’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여부는 진보신당의 미래를 가늠할 시금석들 중의 하나이다.
총선기간 중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의 민주당 한평석 후보와의 단일화 시도는 자유주의세력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희석시키는, 그동안 진보정치에 질곡을 가해온 열우당 2중대 노선의 재판이었다. 게다가 심상정 대표가 후보단일화의 명분으로 내세운 ‘한나라당 개헌선 확보 저지’라는 반한나라당 연대는 진보정치의 시계를 십수년 전으로 되돌리는 퇴행정치였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똑같은 자본가정당이라는 것은 10년의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과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과정을 통해서 정리된 자명한 공리이다. 각종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법 개악을 함께 밀어붙인 세력들을 저지세력과 연대세력으로 나누는 것은 편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결국 단일화에 실패하고, 민주당에게서 “선거에서 연대는 노선과 가치에 근거해야 한다”는 충고까지 듣는 촌극까지 연출하며, 심상정 대표는 개인의 수모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의 수모를 샀다.
따라서 후보단일화 시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자유주의세력 2중대 노선의 청산과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시도를 이으려는 것에 대한 진보신당의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인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의 진보신당은 ‘총선용 공동대응기구’일 뿐이며, 누구도 기득권을 갖지 않고 누구나 동등하게 당 건설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실질적 창당과정’의 진정성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심상정 대표에 대한 원칙적인 비판이 총선과정에서 ‘노심’에게 집중된 권한과 인기를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사실상 ‘원탁’은 주빈석이 따로 마련된 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조직가라면 먼저 심상정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의 관철을 통해 진보신당의 건전성을 증명해보였을 것이다. 이마저도 못하면서 “진보신당의 흐름은 계급정당의 문제의식을 심어낼 수 있는 훌륭한 밭” 운운하는 것은 허위광고에 불과하다.
슬그머니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꺼내드는 뻔뻔함
민주노동당 분당과정에서 신당파의 반종북 정치공세로 말미암아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문제의식이 철저하게 배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동자당원들은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당이 쪼개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더욱이 신당파는 진보의 다원주의를 운운하며,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 마치 낡은 진보인양 몰아붙였다. 당연히 그들은 창당과정, 총선과정에서도 노동자정당,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말조차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치닫도록 주도한 한석호가 총선이 끝나자 슬그머니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꺼내드는 것은 뻔뻔한 것이다. 더욱이 진보신당 참여를 당연히 전제하면서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한다는 이율배반적인 간판을 내걸고서 말이다. (진보신당을 노동자정당으로 개조하겠다는 말인가? 진보신당이 노동자정당이 아니게 된다면 탈당할 의지는 있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이라도 노동자정치세력화 화두를 다시 제기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을 통한 노동자정치세력화 실패에 대한 명확한 통찰에 근거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정치세력화 실패와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참세상 4월 14일자)에서 주장된 것처럼 반자본주의 투쟁기조를 회피하는 진보신당은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결코 발전시킬 수 없다. 이제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반자본주의 투쟁, 그리고 한국사회 발전에 대한 사회주의 전망과 함께 가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건추가 진보신당 참여를 당연히 전제하며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제기하는 한, 이는 뻔뻔한데다 공허한 울림에 불과한 것이다.
일정시기 동안 진보정당운동은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념적 한계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모순 심화의 정세에 반자본주의 투쟁의 강화로 적응하기를 거부했던 진보정당운동은 현재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발전에 질곡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제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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