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6월 26일 중국에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6월 27일에는 비핵화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 영변 핵시설의 상징인 5㎿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이에 상응하여 미국도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절차에 즉각 착수했으며, 북한에 대한 적성국 교역법 적용 제외를 선언하였다. 이렇게 대북 제재 해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지난해 10·3 합의 이후 소강상태에 빠졌던 비핵화 논의가 급진전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대규모 대북 식량지원이 시작되었으니 지금까지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긍정적인 기류가 흐르게 된 것이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서 제출은 2단계 불능화의 완료를 의미하며, 이로써 북한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이제는 북한 스스로 과거 핵 활동에 대해 신고하고 이를 6자 회담이 검증하게 된다. 결국 지금의 2단계 완료국면은 북한이 불능화를 통해 미래의 핵을 원천적으로 포기함과 동시에 신고서 제출로 과거의 핵을 검증받는 상황인 것이다. 무엇보다 북미 갈등이 재연되어도 북한은 원자로 가동을 할 수 없으며 더 이상의 재처리나 플루토늄 추출이 불가능해졌다. 북한 스스로 중요한 카드를 버렸다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다. 9·19공동성명에서 ‘말’로 한 약속을 그 동안 2·13합의와 10·3합의를 통해 ‘행동’으로 이행함으로써 천금같은 ‘신뢰’를 쌓게 되었다.
‘검증’에 가로 막힌 핵
이러한 가시적 성과에 힘입어 7월 10일 재개되어 12일까지 진행된 6자회담에서는 북핵 2단계 조치인 핵 프로그램 신고 및 불능화에 대한 평가 그리고 3단계 조치인 검증 및 폐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즉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는데 초점이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6자회담 참가국들은 검증체계 구축과 대북경제지원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비핵화 2단계를 완료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장애물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즉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 작업과 그에 대한 상응조치인 대북 에너지 지원을 10월말까지 완료하기로 합의했다. 문제의 핵심인 일본의 대북 중유 지원과 관련해서는 “여건이 조성되는 대로 참여한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일본이 납치 문제 해결을 에너지 지원의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검증에 대한 비협조적인 태도와 6자회담의 파행적 운영을 예측케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북한 핵 신고서의 검증체계를 마련한다는 원칙에는 합의했지만 세부적인 이행계획을 만들지 못했다. 시설 방문, 문서 검토, 기술인력 인터뷰 등 상식적 수준의 검증의 원칙에 대해 합의한 ‘검증을 위한 회담’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북미간 추가논의가 불가피하게 됐다. 미국의 테러 지원국 해제 조치가 정식 발효되는 8월 11일까지 검증 문제를 놓고 북·미간 치열한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미국은 앞서 6월 26일 북한에 대한 테러 지원국 해제를 의회에 통보하면서 45일간의 유예기간 동안 검증체계 마련에 북한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해제 조치를 취소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검증’을 주장함으로써 북핵 신고서의 검증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를 하지 못했다. 물론 북한의 주장은 남북한 동시 사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미 199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기 때문에 새롭지는 않다. 2005년 9·19 공동성명에도 “6자회담의 목표는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라고 돼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북한의 의도는 검증 범위와 수준 문제 역시 북·미 협상 위주로 끌고 가면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검증체계 구축에 큰 비중을 두었던 미국으로서는 회담 결과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북핵 3단계 조치로 들어선 이제부터 회담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데, 테러지원국이 해제되는 8월 10일까지 로드맵이 나오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이행이 힘들 것으로 보인다. 테러지원국 문제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미국이나 나머지 국가들이 북한의 협조적 자세를 끌어내지 않으면 6자회담은 미궁 속으로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평양이 높은 수준의 요구를 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아마 나머지 5개국이 수십억 달러의 경수로를 북한에 제공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6자회담이 재개됨으로써 북핵 문제를 둘러싼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다시 지루한 싸움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임기 말 부시행정부의 적극적인 태도와는 반대로 부시의 임기 말로 인해 북은 다소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 시간 내에 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일정기간 잠복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미국에서 긴급한 현안이 없는 한 한반도 문제는 항상 외교 순위에서 뒷전에 밀린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장애물이 만만치 않고 협상 과정이 매우 험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핵무기가 신고서에 포함되지 않았고 미국이 납득할 수준의 검증방식과 결과도 장담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북핵 상황을 일부러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이제 북핵 해결을 위한 문턱에는 도달한 셈이다. 북미 모두 살벌하게 피 튀기는 진검승부의 장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숨을 고르며 초식을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뒷북의 달인, 이명박
문제는 국내에서의 촛불정세에서도 북한 영변에서는 핵시설 냉각탑 폭파라는 국제적 이벤트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현장에 이명박 정부는 어디에서도 그 존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북핵 문제가 진전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6자회담이 개최되기만을 기다렸다.
한미동맹 제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쇠고기 문제를 통째로 헌납했지만 부시가 보여준 것은 싸늘한 시선 이상의 기류만 감지되었다. 이명박 정부에게 매우 절실했던 환상의(?) 한미FTA는 부시 임기 내에서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절대적 신뢰의 존재였던 부시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이 없어서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근의 북핵 정세를 활용해서 남북관계의 복원을 꾀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적합한 시기를 놓치고 뒷북만 친 셈이다.
이명박의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제의가 먹혀들어가지 않더니 옥수수 지원도 거절당해 체면만 구겼다. 지난 7월 11일 새벽 금강산에서 여성 관광객에 대한 총격 사건과 오후 18대 국회에서의 시정연설은 남북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명박 대통령의 ‘전면적 대화’ 제의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시정연설 이후 이틀 만에 신속히 내놓은 강경한 입장은 남북관계가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건과 맞물려 더욱 경색되는 게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근본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을 철회하지 않고서는 이번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봐도 이번 사건이 우발적 사고임에도 현 정부가 강하게 반응하면서 금강산 관광을 중단한 것에 대해 북한이 반감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 사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해 3000만 달러인데, 달러가 한 푼이라도 아쉬운 북한으로서는 관광이 장기간 중단될 경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미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에서 ‘정공법’을 사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명박 정부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아서 손해가 나더라도 안 할 것은 안하겠다는 생각이며, 남북관계 악화로 발생되는 손실은 북미관계와 북일 관계의 정상화를 통해서 메우겠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북한은 현재 미국에 의해서 북핵 대가 식량 50만 톤이 인도적 방식으로 지원 중이다. 중국과는 북경올림픽에 대한 협조와 함께 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심지어 중동의 오일머니가 유입되어 그 동안 방치되어 흉물이 되고 있던 평양의 ‘류경호텔’이 한 중동국가의 투자를 통해 재건설 중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다양한 제안이 오히려 강경파를 포함한 북한 당국을 자극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명박 정부만 빼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는 실용주의도 없고 정책다운 정책이 없다.
해법은 간단하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있다는 것이 명확히 확인된 이상 ‘비핵개방 3000’ 정책 등 대북강경노선을 선회하면 된다. 무능한 정권임이 확인되었음에도 금강산 총격 사건을 빌미로 대북 강경책을 구사한다면 오히려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되어 길을 찾아 헤매는 미아로 남을 것이며,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역하는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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