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에 헌법재판소는 어떤 존재일까? 인권운동은 법률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악법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을 할 때가 있고, 법률을 개선하거나 좋은 법률을 제정하기 위한 운동을 할 때도 있다. 우리 현실 속에서 법률이 가장 강력한 사회적 규범이라고 할 때, 인권을 우리 사회 규범으로 세우기 위하여 인권운동 역시 법률과 씨름한다.
헌법재판소는 새로운 법적 규범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권운동에 무척 중요한 기구이다. 2005년 호주제가 헌법 불합치로 결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난해에는 야간옥외집회 금지조항에 대해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이 나길 기대하면서 인권운동의 많은 주제가 헌법재판소로 향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인권운동의 희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2004년에,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는 2005년에, 그리고 지문날인제도는 2005년에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합헌 결정 뒤에는 해당 운동이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논거가 사라진 탓일 것이다.
지난 2월 25일 헌법재판소는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에 대하여 "합헌"이라고 결정하였다. 9인 재판관 전원의 의견은 아니었지만 7:2로 합헌에 다소 쏠린 의견이었다. 정보인권운동은 이번 결정에 크게 실망하였다. 왜냐하면 선거운동기간 실명제에 대한 이번 결정 외에도, 상시적인 실명제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전망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인터넷실명제는 곧 국가실명제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는 최초로 법제화된 국가 실명제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갈수록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가리지 않고 국가 실명제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고, 2004년 '공정선거'를 명분으로 마침내 법제화되었다. 이 조항은 선거운동기간 중 인터넷언론사가 게시판·대화방 등에 실명인증의 기술적 조치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1천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실명제의 대상이 되는 인터넷 언론은 계속 반발하였다. 2006년 지방선거 기간에 실명제를 거부한 민중의 소리에 과태료가 부과되었고,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 기간에는 민중언론 참세상이 실명제를 거부하였다가 과태료 재판을 받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는 계속 확대되어 왔다. 2007년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일일 방문자수 10만 명 이상의 포털, 언론, UCC 사이트 등에 상시적인 실명제가 도입되었다. 2009년에는 이 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실명제 대상사이트가 37개에서 153개로 확대되었으며, 올해 167개로 다시 늘었다. 현재 국회에는 실명제 대상을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일일 방문자수 10만 명이라는 제한을 삭제한 정부의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또 2009년 개정된 ‘인터넷 주소자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실명으로만 인터넷 도메인 등록을 할 수 있다.
그 이름이 어떻게 서로 달리 불리건, 이러한 인터넷 실명제들은 국가 실명제이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어떤 소수자 커뮤니티가 증오 범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의 합의 하에 실명 확인 절차를 둔다면, 그것을 인권 침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국가가 일방적으로 국민에게 실명 확인을 강제하는 것은 확실한 인권 침해이다.
어떠한 명분도, 국가의 수사 편의를 위하여 모든 국민을 잠재적 악플러 혹은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근대 시민사회 이후 수립된 인권관이다. 우리가 실명제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인권 의식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반증한다.
사찰과 검열의 일상화
더 나쁜 소식은 이렇게 확보된 게시자의 신상 정보를 국가가 사찰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정부에 비판적인 게시물을 작성한 이용자의 신상정보를 경찰과 정부가 수집하고 공유한다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다. 실제로 수사기관이 이렇게 수집된 개인정보를 영장도 없이 제공받는 건수가 연 5백만 건을 넘어섰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문화부가 정부에 비판적인 이용자 아이디 7~800개를 파악하여 청와대·대검찰청·경찰청·방송통신위원회 등 42개 정부부처에 전달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는 인터넷 실명제가 사찰과 검열에 쓰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한 관행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이미 감시 사회이다.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이용자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실명확인 절차를 거치거나 거치지 않고 자신의 글을 게시할 수 있으므로 사전검열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선거기간 동안 모든 인터넷언론사가 실명제를 실시하는 상황에서 이용자가 실명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법률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반대의 글을 게시"하는 것과 관계없는 표현을 게시할 경우 익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런 선택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2007년 12월 차별금지법 논란이 한창이었을 당시 사회적 소수자들이 선거운동과 관계가 없는 이 법안에 대한 의견을 인터넷언론사에 제시하고 싶어도 실명을 밝혀야만 했다. 사회적 비판자나 소수자가 의견을 밝히려면 신원이 노출되고 불이익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거나 의견 발표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것이 표현의 자유 침해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장담한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면 실명제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헌법재판소까지 합헌이라고 결정한 마당에 운동도 위축될 것이다. 특히 침해 당사자라 할 시민들의 지지가 흐릿하다는 사실은 활동가에게 절망스럽기만 하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인 것일까. 슬쩍 사이버 망명을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악플러를 잡기 위해서라면 국가 감시쯤이야 용인할 수 있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권운동의 규범은 법조문이 아니라 인권 현장에서 나온다. 인권침해 당사자가 계속 등장하고 인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현장이 인권운동의 규범을 만든다. 인권운동은 현실 법률을 뛰어넘는 이상을 포기할 수 없다. 합헌 결정 후에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도 국내외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문날인 거부 운동 역시 청소년 운동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피해 드러내기
인터넷 실명제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 있다. 당사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피해를 드러내는 것. 사실 나는 사이버 망명이 실제로 국가 권력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실천으로서 사이버 망명을 선택한다면 지지하겠다. 다만 당신의 선택을 보여주셔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를 거부한다고,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꼭 꼬리말을 달아주시기 바란다. 그것이 인터넷 실명제를 폐지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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