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비정규직 길라임의 꿈과 재벌 3세의 연대

정규직화 열망과 맞닿은 스턴트우먼의 열망

러시아 민속학자이자 예술이론가인 블라디미르 프롭(Vladimir Propp)은 ‘미담의 형태론’(1928)이라는 책을 통해 각국의 동화 속에 담긴 이야기의 구조를 정리했다. 그는 동화 속에 나타난 반복된 이야기 구조를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봤다. 각각의 동화 속 인물들은 다르지만 그 인물들이 하는 근본적인 행위의 목적은 같다는 것이다.

그는 등장인물 각각의 행위가 그 이야기 전체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보고 이야기 구조 속에 있는 기능(function) 31개를 분류했다. 이런 이야기 구조론에 따르면 신데렐라와 같은 구조를 가진 이야기는 시대와 배경을 달리해도 나타날 때마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요즘 최고 인기드라마 중 하나는 SBS의 주말드라마 '시크릿가든'이다. 이 드라마도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 구조가 기본이다. 현실에 차별 받고 고난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왕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한다는 이야기 구조는 자본주의 시대 비정규직 여성과 재벌 3세의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로 재구성 됐다.

가난한 스턴트우먼인 길라임(하지원 분)과 재벌가 3세인 주원(현빈 분)의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사랑은 각자가 속한 계급적 현실과 두 사람의 욕망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블라디미르 프롭은 각국의 동화에서 담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발견했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고 하나는 성에 대한 욕망으로, 이야기라는 것은 두 욕망(쾌락원칙)을 제한하는 현실원칙과의 갈등구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밌는 이야기란 대부분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억압하고 있으며 그것은 올바른가 아닌가를 무의식적으로 반성하게 한다. 현실원칙은 현실에서 지켜야 하는 윤리와 풍속, 도덕, 법률 등이라면 쾌락원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두 원칙이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킬 때 이야기는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고 결말을 향해 전진해 간다.

  액션배우 경력 7년의 길라임은 저임금 비정규직의 전형이다. [출처: SBS 시크릿가든 캡쳐]

자본주의 윤리 앞에 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중인 길라임

길라임에게 현실원칙은 자본주의적인 윤리다. 대부분 연기자가 그렇듯이 액션스쿨이라는 도제 시스템은 고용안정이나 산업재해의 사각지대에 있다. 끊임없는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조연과 엑스트라, 스턴트맨 연기자들의 차별받는 현실은 언젠가는 스타가 된다는 욕망에 감춰져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돼지껍데기는 80년대 영화 파업전야에 나타난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라는 저임금 고단한 노동의 상징과 겹쳐진다.

액션스쿨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자리다. 길라임이 6기 후배들 중 그만두겠다는 후배들에게 “그동안 해온 거 안 아까울 자신 있어?”라고 묻자 후배는 “아깝지만 앞으로 할 거 생각하니까 까마득하고 무섭습니다”라고 말한다. 길라임은 “모두가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거야. 어디서 무얼 하고 살든 가슴 뛰는 일을 해 그럼 그게 꿈인거야”라고 꿈을 접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이런 꿈의 욕망은 25일간 울산 현대차 1공장을 점거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 25일간 농성을 이어가던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상당수는 주말 밤의 배고픔을 핸드폰 DMB로 '시크릿가든'을 보며 견디기도 했다.

'시크릿가든'을 즐기던 비정규직들은 법과 원칙이라는 현실 원칙을 넘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들의 욕망은 비정규직의 설움과 차별이 불러온 강렬한 열망이었고 고난한 투쟁에 자신을 내 던졌다.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5년에서 10년 넘게 차별받는 하청을 감내한 건 그 동안 해온 게 아까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투쟁에 나선건 앞으로도 계속 힘든 일에 차별 받을 생각 때문이었다.

길라임은 액션스쿨에 들어오기 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였음이 19일 방송분에서 나왔다. 길라임의 경력은 현정부가 2020 국가고용전략으로 추진하는 저임금 단시간 파트타임 일자리였다. 소방관이던 아버지 밑에 자라 고등학교만 졸업한 길라임은 식당 서빙 6개월, PC방 카운터 3개월, 햄버거 조리담당 5개월, 카센터 세차 2개월, 보조출연 3개월 같은 일자리만 26개월 간 전전했다. 길라임의 스턴트 경력이 7년이고 극중 나이가 29세임을 감안하면 길라임은 학교 졸업과 동시에 비정규직의 길만 걸었다. 그나마 길라임에게 애션스쿨의 스턴트우먼은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일자리지만 이 역시도 자신의 노동력을 담보로 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전형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상당수도 길라임과 마찬가지로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에 들어오기 전엔 사회에 첫발을 내 딛으며 저임금에 야간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 하청업체를 거치거나 다양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겪어봤다.

현재 30대 초 중반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은 2002년 이후 20대중반이나 후반 무렵 현대차 하청으로 입사했다. 당시 이들에겐 정규직 일자리는 하늘의 별따기 였다. 98년 IMF 경제위기가 강요한 정리해고와 파견법이 정규직이 떠난 일자리에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그 후과는 2002년 이후 드러나기 시작해 이젠 청년실업과 고용의 양극화가 사회문제가 됐다.

현대차 농성장에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렇게 오랜 세월 하청 생활을 통해 비정규직이 하나의 신분이 됐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정규직이란 타이틀이 너무 절실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제 4신분이라고 낙인 찍힌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규직화라는 동화 같은 욕망을 꿈꿨다.

  길라임의 이력서. 길라임의 경력은 현정부가 2020 국가고용전략으로 추진하는 저임금 단시간 파트타임 일자리였다. 소방관이던 아버지 밑에 자라 고등학교만 졸업한 길라임은 식당 서빙 6개월, PC방 카운터 3개월, 햄버거 조리담당 5개월, 카센터 세차 2개월, 보조출연 3개월 같은 일자리만 전전했다.

이태리 장인이 만든 트레이닝 복 입은 주원, 길라임의 꿈을 주저 앉힐까?

서로의 신분을 인식한 것은 길라임과 주원도 마찬가지다. 신분 차이에 따른 현실을 너무 뼈저리게 알고 있던 길라임은 애초부터 둘의 연애가능성을 차단하고 나섰지만 서로 다른 신분적 매력에 빠진 주원은 자신의 현실을 뛰어넘을지 말지의 기로에 섰다.

이래서 신데렐라 이야기의 구조는 언제나 보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데렐라와 같은 구조를 가진 이야기는 신분상승을 통한 동화 같은 행복한 결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데렐라 이야기는 현실에 맞서 투쟁하려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이다. 백마를 탄 왕자님이나 이태리 장인이 한땀한땀 수를 놓아 만든 수백만원 자리 명품 트레이닝 복을 입은 재벌가 아들이 나타나 가난하고 핍박받는 여성을 현실에서 탈출할 꿈을 꾸게 해주기 때문이다.(공주와 가난한 남성 관계도 마찬가지다) 왕자나 재벌을 만나기전 여성은 자신의 힘으로 꿈을 이뤄가지만 왕자나 재벌은 꿈을 꺾는 대신 부유한 삶을 약속한다.

시크릿가든의 이야기 구조는 두 사람이 각자의 신분에 맞선 갈등이 투쟁이 되어 끌어간다. 길라임은 사랑을 위해서든 꿈을 위해서든 투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지만, 주원의 투쟁은 복잡한 집안 내 권력 암투에서 살아남기와 기득권 버리기를 결정해야 하는 갈등이다.

아직까진 길라임은 그 왕자가 자신의 꿈을 망가뜨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 드라마가 어떤 결말로 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아직까지 신데렐라 이야기 구조 공식에 몇 가지 에피소드로 풀어가는 기능은 그대로다. 기본적인 플롯은 주인공들의 욕망을 막는 현실적 조건을 어떻게 뛰어넘을 가에 있다.

  울산 현대차 1공장 3층에서 농성하던 비정규직들은 매일 밤 정규직들만 자유로이 다닐 수 있던 계단 아래로 내려갈 날을 꿈꾸며 잠들었다. [출처: 합동취재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법 판결이후 법에만 기대하다간 정규직화 열망이 꿈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현실을 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백마 탄 왕자인 정몽구 회장님에게 마냥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의 꿈을 결단 내릴 수 있는 사람도 정몽구 회장이지만 그들은 정회장에게 매달리지 않고 정회장에게 대들었다. 이들의 투쟁이 어떤 결말로 나타날지는 한국 사회의 큰 관심사다.

길라임도 스턴트 우먼으로 연기자가 되기 위한 꿈을 가는 길에 나타난 걸림돌 같은 사랑을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주원도 자신의 꿈엔 걸림돌이지만, 신분상의 차이를 확인시켜 주며 돈 봉투를 내미는 주원의 어머니는 또 다른 폭력과 차별이다. 길라임이 이 폭력과 차별이라는 신분의 문제와 어떻게 투쟁할지가 시크릿가든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둘의 신분상 차이는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누군가는 물거품이 될지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건 재벌인 주원에게도 마찬가지다. 주원의 꿈인 신분을 넘는 사랑을 하는 순간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박탈당한다. 둘에게 물거품은 서로의 계급적 현실을 명확히 인식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래서 길라임은 주원에게 ‘네 말이 다 옳다’고 얘기한다. 주원이 끊임없이 신분상 차이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자신이 사랑의 물거품이 되겠다던 주원이 길라임의 투쟁에 연대할지,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며 적당히 타협할지다.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들의 가족이 대책위가 되면 가장 큰 힘이 되지만, 투쟁을 말리면 정규직화의 꿈을 주저앉히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연인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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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크가든

    먼말이예요?

  • ^^ㅎㅎ

    기사 재미지게, 현실감있게 잘 읽었습니다.^^

  • 시청자..

    안드로메다와 비규정규직..다음으로 눈에 띄는 제목이군요..ㅎ 예전엔 어쨌든 눈에 보이는 주인공이라도 잘 되면 좋아라 했는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드라마 애청 20년만에 화도 납니다. 어떤 기사에선 헛물켜는 일이라며(재벌과 비정규직..) 충고하던데, 화나는 건 현실을 자꾸 지적질 당하는 거 같아서 그런가,,, 싶습니다.
    물론, 계속 봅니다...^^ 이 작가가 이놈의 현실을 어찌 끝낼지,, 더불어 좋아하는 배우도 보아가며.

  • 우왕 굳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고 의미있는 기사였습니다 ^^

  • 뎡야핑

    꺅!!!! 잘 봤어요 시크릿 가든 기사라니 ㅋㅋ

    비정규직 길라임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과연 행복해질까.. 기본적으로 로맨스에 판타지니까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잘 잡고 있는데 앞으론 어떨지 다음주가 기대됩니다~~ 다음에도 기사 또 써주세요~~!

  • 이수빈

    싯그릿거든티비

  • 거참..

    힘들게 사시네... 머를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건지 한낯 드라마일 뿐인데 그걸 현실에다 비유하다니..유치찬란하네.. 자기인생 자기가 선택한걸 다른사람이 뭐 이렇게 말이 많은지 오지랍도 유분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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